터키/성지터키,그리스

그리스참고(스크랩)

월요일은자유인 2007. 4. 2. 16:25
 

※그리스의 문화


        ‘시에스타’라고 불리는 오후의 휴식시간이 그리스를 대표하는 이색 문화. 그리스인들의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직장이나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낮잠이나 휴식을 즐긴다. 이것을 시에스타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몇몇 지중해 연안의 국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관습이다.

        유 교수는 그리스를 방문할 때마다 그림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리스의 섬을 빼놓지 않고 들른다. 크레타, 미코노스, 산토리니, 낙소스 등의 섬들은 그 환상적인 풍경으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도 자주 찾는 여행지라고. 특히 파란 하늘과 바다, 흰색과 파란색의 건물이 어우러진 산토리니는 ‘에게 해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관광지. 이곳의 하얀 건물과 파란색 교회 지붕, 마을에서 바다를 향해 보는 일몰은 그리스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풍경이라고 한다.

        부인 나은영씨는 그리스의 어디를 가든 올리브나무를 볼 수 있으며, 그리스인들의 식탁에서 올리브와 올리브오일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매일 먹는 모든 음식에 올리브오일을 넣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밝고 투명한 색을 띠는 엑스트라 버진 오일과 약간 탁한 색을 띠는 버진 오일에 정제 오일을 섞어 만든 퓨어 올리브오일 두 가지를 주로 먹는데, 그리스인들은 올리브오일을 치료 목적으로도 먹어왔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감기 기운이 있거나 소화가 잘 안될 때 약 대신 올리브오일을 듬뿍 넣은 음식을 먹어요. 그러면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몸이 자연스레 회복된다고 하더라고요. 올리브오일을 먹는 것이 일종의 민간요법인 셈이죠.”

        올리브오일과 함께 그리스인들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그리스 사람들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로 손꼽히는 그릭 샐러드. 집에서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데 양상추, 파프리카, 양송이버섯, 토마토 등 신선한 야채에 올리브오일과 요구르트를 섞어 만든 드레싱을 얹고 그 위에 페타치즈를 뿌려 만든다. 페타치즈의 쌉쌀한 맛이 싱싱한 야채와 어우러져 그 맛이 일품이라고.

        그릭 샐러드 외에 그리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수블라키가 있다. 수블라키는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쇠꼬챙이에 차곡차곡 꿰어 큰 덩어리로 만든 다음 숯불에 구워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맞춘 요리. 수블라키는 길거리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굽는 과정에서 기름이 쏙 빠지고 특유의 냄새도 사라져 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리스는요~

        고대 올림픽이 처음 시작된 나라이자 유럽 문명의 발상지로 정식 명칭은 헬레니공화국.
수도는 아테네이며 그리스어를 사용한다.
유럽의 남동부, 발칸 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에게 해,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해 있다.
인구는 약 1천1백만 명이며 본토와 산토리니, 크레타, 로도스, 낙소스 등 2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중해 장수 식단 &그리스 신화로 이름난 그리스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에 등장하는 그리스 대표 요리

        요리·그릭조이·산토리니·기로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리스 여성 툴라와 전형적인 미국인 이안이 서로 다른 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 사돈의 팔촌까지 가족으로 생각하는 그리스인들은 그만큼 가족 행사가 많아 이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준비한다. 영화에서도 역시 이런 모습이 그려지는데 무사카를 먹는 여주인공 툴라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가 시작된다. 무사카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고기에 토마토소스를 듬뿍 얹은 후 호박 등의 야채와 치즈를 올려 오븐에 넣고 구운 요리. 그리스인들은 기로스와 수블라키도 즐겨 먹는데 기로스는 그리스식 케밥으로 기름을 쏙 뺀 바비큐 치킨을 알맞게 잘라 야채와 함께 그리스식 밀전병인 피타빵에 돌돌 말아 먹는 요리이며, 수블라키는 양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을 꼬치에 꿰어 그릴에 구워 먹는 음식이다. 이외에 토마토와 올리브에 페타치즈를 듬뿍 올린 샐러드도 즐겨 먹는다.


▶기로스

준·비·재·료

피타빵 1장, 바비큐 닭고기·양상추·토마토 30g씩, 블랙 올리브 4개, 양파·피망 ½개씩, 오이피클·파인애플 약간씩, 짜찌기소스(플레인 요구르트 ½컵, 레몬주스 2큰술, 식초·마늘·소금·후춧가루 약간씩), 통후추 간 것 2작은술, 칠리소스·파마산치즈 1작은술씩

만·들·기

① 양상추는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토마토는 반달 모양으로 얇게 썬다.

② 바비큐 닭고기는 얇게 채썰고, 양파와 피망은 모양을 살려 동그랗게 썬다.

③ 파인애플은 주사위 모양으로 썰고, 블랙 올리브와 오이피클은 0.3cm 두께로 썬다.

④ 분량의 재료를 섞어 짜찌기소스를 만든다.

⑤ 피타빵 위에 짜찌기소스를 펴 바르고 양상추, 바비큐 닭고기, 토마토, 양파, 피망, 파인애플, 블랙 올리브, 오이피클을 올린 다음 통후추 간 것, 칠리소스, 파마산치즈를 뿌린 후 돌돌 만다.


▶무사카

준·비·재·료

감자·호박·가지 1개씩, 올리브오일·빵가루 적당량씩, 미트소스(다진 쇠고기 400g, 다진 양파·다진 토마토 1컵씩, 올리브오일 ¼컵, 다진 마늘 1큰술, 토마토페이스트 2큰술, 소금·후춧가루·오레가노 가루 약간씩), 베샤멜소스(버터 50g, 밀가루 2큰술, 우유 3컵,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만·들·기

① 호박과 가지, 감자는 0.5cm 두께로 잘게 썰어 올리브오일을 두른 팬에 각각 굽는다.

② 분량의 재료를 팬에 넣고 볶아 미트소스와 베샤멜소스를 각각 만든다.

③ 오븐 용기에 올리브오일을 바르고 빵가루를 깐 후 감자, 호박, 가지의 중간에 미트소스를 깔면서 놓는다.

④ 마지막으로 미트소스를 덮은 후 그 위에 베샤멜소스를 얹는다.

⑤ 180℃로 예열한 오븐에 넣고 20분 정도 굽는다.


▶수블라키

준·비·재·료

닭가슴살·돼지고기 안심 200g씩, 양파·토마토·피망 ½개씩, 올리브오일 적당량, 소금·통후추 간 것 약간씩

만·들·기

① 닭가슴살과 돼지고기 안심은 2cm로 크기로 네모나게 썬다.

② 양파, 토마토, 피망은 깨끗이 씻어 2cm 크기로 네모나게 썬다.

③ 나무꼬치에 닭가슴살, 돼지고기 안심, 양파, 토마토, 피망을 순서대로 꿴다.

④ 꼬치를 팬에 올려 올리브오일을 발라가면서 약한 불에서 굽는다. 소금과 통후추 간 것을 뿌린다.

▶팍스마디아

준·비·재·료

바게트 2쪽, 토마토 2개, 양파 ½개, 올리브오일 2큰술, 소금 1큰술, 오레가노 가루 ½큰술, 레몬주스·후춧가루·마늘·버터 약간씩

만·들·기

① 토마토와 양파는 깨끗이 씻어 5mm 크기로 네모나게 썬다.

② ①에 올리브오일, 레몬주스, 소금, 후춧가루, 오레가노 가루를 넣고 버무린다.

③ 바게트는 저며 썰어 마늘로 문질러 향을 낸 후 버터를 녹인 팬에 넣고 노릇하게 굽는다.

④ 마늘바게트구이에 ②를 얹어 먹는다.


▶양갈비

준·비·재·료

양갈비 5대, 말린 허브·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레몬즙 1큰술, 올리브오일 적당량, 샐러드 야채(토마토, 양파, 올리브) 적당량, 피타빵 약간, 튀김기름 적당량, 올리브소스(올리브오일 4큰술, 레몬주스·오레가노·소금 약간씩)

만·들·기

① 양고기는 갈비 부위로 준비해 갈빗대 모양대로 자른다.

② 믹서에 말린 허브와 소금을 넣고 곱게 간다.

③ 양갈비에 ②와 후춧가루, 레몬즙을 골고루 뿌리고 올리브오일을 바른다.

④ 양념한 양갈비를 그릴에 넣고 노릇하게 굽는다.

⑤ 토마토·양파·올리브는 한입 크기로 썰고, 피타빵은 채썰어 기름에 튀긴다.

⑥ 분량의 재료를 섞어 올리브소스를 만든 후 샐러드 야채, 피타빵과 버무린다.

⑦ 접시에 양갈비와 샐러드를 담고 소스를 뿌린다.


그리스인들의 건강 비결, 7가지 장수 음식

        세계적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인들의 장수 비결은 바로 요리 재료에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그리스 성인 2만2천2백 명을 대상으로 식습관을 조사한 결과, 그리스 식단대로 먹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망률이 25%가 낮고 심장병과 암 사망률도 각각 33%, 24% 낮다고 발표했다. 제철 과일과 야채를 자연 그대로 먹는 그리스인들의 요리법과 동물성 지방이 적은 요리 재료가 바로 장수의 비결인 것. 그 대표적인 재료가 요구르트, 올리브, 토마토, 레드와인이며 육류보다는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또 야채를 오븐에 구워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를 섞어 먹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 노화를 방지하는 올리브 &올리브오일
        그리스에서는 그린 올리브보다 블랙 올리브가 더 많이 생산되며, 올리브를 샐러드에 넣어 먹거나 식초에 절여 끼니마다 먹는다. 올리브오일 또한 그리스 식단에서 빠지지 않는 재료로 요리할 때 넣거나 소스로 이용한다. 올리브와 올리브오일은 노화를 방지하는 효소가 들어 있어 기억력 감퇴와 인식 능력 기능 저하를 예방한다. 골다공증, 유방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단백질 공급원인 페타치즈
        매일 먹는 샐러드에 페타치즈를 굵게 썰어 넣어 먹는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산양의 젖으로 만든 페타치즈는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 짭짤한 맛이 나며 파이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 유산균이 살아 있는 짜찌기소스
        그리스인들에게 요구르트로 만든 짜찌기소스는 우리나라의 된장처럼 친숙한 전통 소스로 플레인 요구르트에 오이, 마늘, 소금, 올리브오일 등을 넣어 만든다. 보통 기로스나 수블라키에 곁들여 먹거나 피타빵에 찍어 먹는다.


▼ 항암 효과가 있는 토마토
        토마토에 함유되어 있는 리코펜 성분은 유방암과 전립선암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인들은 토마토를 즐겨 먹는데 대부분 익혀 먹거나 올리브오일을 곁들인다.


▼ 성인병을 예방하는 견과류
        아몬드, 해바라기씨, 잣, 호두 등의 견과류를 샐러드에 넣어 먹기도 하고 빵에 넣기도 한다. 견과류는 불포화지방이 풍부하여 각종 성인병과 노화를 예방한다.


▼ 고단백 보양식, 신선한 해산물
        그리스인들은 새우, 낙지, 오징어, 홍합, 문어 등을 즐겨 먹는다. 홍합수프, 해산물 밥이나 타임, 오레가노 등 허브를 뿌린 생선구이 등이 인기 요리.


▼ 하루 2잔으로 노화 방지, 레드와인
        레드와인은 매일 마시면 노화 방지와 심장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레드와인의 레스베라트롤이라는 물질이 노화를 늦춘다. 그리스인들은 일조량이 풍부해 유럽에서 질 좋기로 이름난 그리스산 레드와인을 식사 때마다 곁들여 마신다.


▶그리스 전문 레스토랑에서 배우는 그리스 음식


▶그릭조이

        이국적인 지중해풍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그릭조이는 저렴한 가격으로 그리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곳. 이곳의 대표 요리인 돌마데스는 국내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맛보러 들를 정도로 인기. 먹기 부담스러운 전통 향신료는 줄이고 매콤한 맛을 더해 그리스 음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먹기에도 부담 없다.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 문의 02-338-2100


그리스식 파스타 파스티치오

준·비·재·료

펜네(파스타) 200g, 미트소스(다진 쇠고기 400g, 다진 양파·다진 토마토 200g씩, 올리브오일 ¼컵, 다진 마늘 1큰술, 토마토페이스트 2큰술, 소금·후춧가루·오레가노 가루 약간씩), 베샤멜소스(버터 50g, 밀가루 2큰술, 우유 3컵,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만·들·기

① 펜네는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넣은 끓는 물에서 ⅔ 정도 익힌다.

② 분량의 재료를 팬에 넣고 미트소스와 베샤멜소스를 각각 만든다.

③ 올리브오일을 두른 오븐 팬에 펜네와 미트소스를 켜켜이 깐다.

④ ③ 위에 베샤멜소스를 바른 후 180℃로 예열한 오븐에서 20분 정도 굽는다.


▶산토리니

        이태원 해밀턴호텔 뒤쪽에 위치한 산토리니는 휴양지로 유명한 그리스 화산섬의 이름에서 따왔다. 삶은 시금치에 치즈·달걀, 파슬리 등을 넣고 밀가루를 입혀 튀긴 시금치파이와 페타치즈와 토마토가 듬뿍 들어간 새우 사가나키가 인기 메뉴.

영업시간 낮 12시∼오후 10시 문의 02-790-3474

그리스식 애피타이저 시금치파이 스피타코파타

준·비·재·료

삶은 시금치 400g, 페타치즈 100g, 너트맥(향신료의 일종) 1작은술, 피타빵 4장, 올리브오일 4큰술, 다진 파·올리브오일 약간씩, 짜찌기소스 적당량

만·들·기

① 올리브오일을 두른 팬에 삶은 시금치와 페타치즈, 너트맥, 다진 파를 넣고 중간 불에서 파가 익을 때까지 볶는다.

② 피타빵에 올리브오일을 바른 후 팬에 볶은 재료를 올려 세모 모양으로 감싼다.

③ 팬에 올리브오일을 듬뿍 두른 후 시금치를 넣은 피타빵을 겉면이 노릇해질 때까지 약한 불에서 굽는다.

④ 접시에 구운 스피타코파타를 담고 짜찌기소스와 함께 낸다.


▶기로스

     대 앞에 위치한 이곳은 그리스의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 ‘기로스’에서 이름을 딴 곳. 테이블이 6개밖에 없는 작은 곳이지만 그리스 풍경이 담긴 사진과 소품, 그리스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해 그리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기로스와 수블라키, 시금치파이, 페타피자, 그릭 샐러드 등 그리스 대표 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포장도 가능하다.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30분(일요일 휴무) 문의 02-312-2246


▶올리브오일드레싱으로 맛을 낸 그릭샐러드

준·비·재·료

페타치즈 50g, 블랙 올리브·그린 올리브 5개씩, 양상추·토마토·피망 ½개씩, 오이 ¼개, 양파 약간, 올리브오일드레싱(다진 양파 1큰술, 올리브오일 ¼컵, 발사믹식초·머스터드소스·설탕 약간씩)

만·들·기

① 양상추, 토마토, 오이는 손질해 한입 크기로 썰고, 양파와 피망, 올리브는 모양을 살려 동그랗게 자른다.

② 페타치즈는 1cm 크기로 주사위처럼 썬다.

③ 분량의 재료를 고루 섞어 올리브오일드레싱을 만든다.

④ 그릇에 야채와 페타치즈를 담은 후 올리브오일드레싱을 뿌린다.


▶독특한 분위기가 물씬~ 그리스풍 인테리어

        그리스풍 인테리어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고대 그리스 신전·신화 속에 등장하는 대리석 장식과 함께 여신상, 촛대, 석고상 등을 이용한 클래식한 스타일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를 무대로 한 ‘트로이’ 등의 영화에서 바닥과 계단을 대리석으로 꾸미고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우고 석고상이나 벽화로 집안을 장식했던 것을 연상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지중해에 접한 그리스 섬에서 볼 수 있는 화이트와 블루 컬러를 모티브로 한 지중해풍 스타일이다. 눈부시게 하얀 테라코타 벽과 코발트 블루 컬러를 이용해 소박하고 시원하게 연출한 것이 특징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 블루와 화이트로 쿨한 감각
        지중해와 에게 해에 위치한 그리스의 섬들은 흰색과 파란색 건물에 푸른 바다와 하늘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흰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국기에서 알 수 있듯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하늘을 상징하는 흰색에 큰 의미를 두어 인테리어에도 적극 활용한다. 지중해풍 인테리어는 돌로 단단하게 벽을 쌓은 후 하얀 회벽을 바르고, 블루 컬러를 칠하면 완성된다.

        집에서는 손으로 쉽게 바를 수 있는 핸디코트를 이용해 이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데, 도구를 사용해 균일하게 칠하는 것도 좋지만 핸디코트에 지푸라기나 톱밥, 모래, 작은 자갈 등을 넣어 투박한 느낌을 살리면 독특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 고대 그리스 고전 양식을 재현한 클래식 스타일
        그리스풍 인테리어 하면 가장 먼저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스 신전의 돌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기둥은 그리스식 인테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그리스식 기둥은 크게 도리스식과 이오니아식으로 구분되는데, 도리스식은 아무런 장식 없는 기둥에 기다란 홈이 파여 있어 웅장한 느낌을 주는 반면 이오니아식은 기둥머리에 소용돌이 장식이 있어 섬세함과 우아함이 느껴진다. 이런 그리스식 기둥 장식과 더불어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벽화, 석고 부조와 물병이나 화기 등이 그리스풍 스타일을 대표한다. 집안에서는 신전 기둥에서 모티브를 딴 액자나 화병, 신전의 천장과 기둥 사이에 새겨져 있는 조각 등을 재현한 벽걸이 부조 등으로 클래식하게 연출할 수 있다.

▶그리스 출신 예술가 &아름다운 풍광 담긴 그리스 영화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스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그리스에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배우 멜리나 메르쿠리(1925∼1994)는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페드라’ 등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상과 심사위원 특별상,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1935∼)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화면에 사회 현실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영원과 하루’ ‘안개 속의 풍경’ ‘율리시즈의 시선’ 등의 대표작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는 그리스 항구도시 피라에우스를 무대로 실존인물인 조르바의 삶을 그려 주목받았다. 시집 ‘방향’ ‘제1의 태양’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에게 해의 시인’으로 불리는 오디세우스 엘리티스(1911∼1996)와 ‘전환점’ ‘키프러스’ 등을 쓴 게오르기오스 세페리아데스(1900∼1971)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스 하면 가장 먼저 작열하는 태양과 아름다운 바다가 떠오른다. 이런 아름다운 그리스의 풍광은 영화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지중해’(1991)는 미기스티 섬을 배경으로 짙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담고 있다. 줄스 다신 감독의 ‘일요일은 참으세요’ (1960)는 그리스 항구도시 피라에우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햇살 가득한 그리스 풍경과는 반대의 우수 어린 그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들도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1988)에는 잿빛 해변과 인적 없는 도로 등 쓸쓸한 그리스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음악 칼럼리스트 김갑수가 추천한 그리스 음악

        현대 그리스 대중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마노스 하지다키스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을 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대부분 마리아 파란두리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파란두리의 음반 중 추천곡은 ‘어 트리뷰트 투 더 그릭 송 헤리티지(A Tribute to the Greek Songs Heritage)’에 담긴 ‘고깃배의 탱고’.

        영화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진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아테네의 흰장미’ 등으로 친숙한 나나 무스쿠리가 많이 불렀다. 무스쿠리는 67년 ‘내 조국의 노래’를 발표했으며 하지다키스가 만든 ‘마눌라 무(나의 어머니)’와 ‘메 타스프로 무 만틸리(하얀 손수건)’가 대표곡이다. 또한 그리스 출신 음악가로 마리아 칼라스와 아그네스 발차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의 음반 중에서는 ‘더 패션 오브 칼라스(The passion of Callas, EMI)’가 대표적인 추천 음반. 발차는 베스트 앨범 ‘내 조국이 가르쳐준 노래’를 통해 그리스의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의 대중음악으로는 반젤리스와 뉴에이지 뮤지션 야니의 음반이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건반 연주를 기본으로 하는 두 사람의 음악은 신비감이라는 그리스 특유의 정서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 반젤리스의 음반으로는 ‘바닷가의 작은 소녀’가 담긴 ‘동물의 묵시록(폴리그램)’을, 야니의 음반으로는 ‘스웹트 어웨이(Swept Away)’가 담겨 있는 ‘라이브 앳 더 아크로폴리스(Live at the Acropolis, BMG)’를 추천한다.


▶생활 속에서 찾은 그리스 신화

        서양 문화의 근간의 되는 그리스 신화는 후세 문화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그리스 신화의 흔적은 유명 브랜드나 사물의 이름 등 우리 생활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에서 따온 것. 나이키의 심벌인 스우시(Swoosh)는 칼이 허공을 가를 때 내는 소리의 영어식 표현으로 빠른 속도를 의미하며 이 모양은 여신 니케의 날개에서 빌려왔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는 신들의 어머니인 헤라(Hera) 여신의 이름이며, 남성 화장품 브랜드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사이렌(Siren)은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배를 난파시켰던 신화 속 님프(요정)의 이름으로 위험에 대한 경고음을 의미하는 사이렌의 어원이 됐다. 뛰어난 진통작용을 가지고 있는 의약품 모르핀(Morphine)은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에서 따왔다. 흔히 녹턴(Nocturne)이라 부르는 야상곡은 밤의 정적을 몽환적이고 달콤한 가락으로 연주한 음악으로 밤의 여신 닉스(Nyx)의 로마 이름 녹스(Nox)에서 유래되었다.▲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 역을 맡아 열연한 브래드 피트.

        이외에 비유적 의미로 쓰이는 표현들도 있다. 무엇이든 성취하는 사람을 칭할 때 쓰는 말인 ‘미다스의 손’은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던 미다스 왕 신화에서 유래된 말. 발뒤꿈치의 근육 이름이자 치명적인 약점을 의미하는 아킬레스건은 불사신이었으나 약점이었던 발꿈치에 화살을 맞고 죽은 트로이 전쟁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의 역사

1.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에게 문명이란 에게 해 지역에서 B.C. 7000~B.C. 3000년과 B.C. 3000~B.C. 100년에 각기 꽃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문명을 뜻한다. 에게 문명이 꽃핀 지역은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諸島)를 비롯한 여러 섬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및 테살리아를 포함하는 그리스 본토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 지역에서 처음으로 꽃핀 주요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달했다. 그후 그리스 본토 사람들은 크레타 문명(Minoan Civilization)을 받아들여 독자적??문명을 이룩하였다.

        크레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초기(B.C. 3000~B.C. 2100), 중기(B.C. 2100~B.C. 1500), 말기(B.C. 1500~B.C. 1100)의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에는 신석기 시대의 여러 특징들이 지속되어 오다가 B.C. 2500년께 신화적인 인물인 미노스(Minos) 왕의 출현 이후 크레타 문명이라 부르는 새롭고 특징적인 문명을 태동시켰다.

        중기에는 금속 세공과 같은 기술을 일구어 내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말기에는 도리스(Dorian)족의 침략과 자연 재앙(화산 폭발, 지진, 해일)으로 섬들이 파괴되었으며, 미케네인들과의 과다 경쟁으로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쇠퇴기를 걷게 되었다.

        크레타 문명은 지중해를 통해 상품을 수출하는 등 해상에서 지배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중기에 나타난 다채색의 카마레스(Kamares) 도자기는 이집트인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B.C. 1700년께 크노소스(Knossos), 파에스토스(Phaestos), 말리아(Malia) 등지에 있던 궁전들이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크레타인들은 이전보다 더욱 아름답게 재건축하였다. 그것은 복합층 형태를 가진 호화로운 귀족 아파트 접견실, 창고, 서가, 그리고 발달된 하수 시설을 갖춘 거의 미궁과 같은 구조였다.

        크레타인은 또한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든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닮았다.


2.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이 쇠퇴하면서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 출현하였다. 이 문명은 B.C. 1500~B.C. 120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 문명의 이름은 미케네라는 고대 도시 성립 이후 출현하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 권위 아래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해 왔으며, 미케네 문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금 보석들과 장신구들이다. 미케네인은 후기에는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케네의 도시 국가들은 트로이(Troy)를 격파하고 흑해까지 그들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B.C. 12세기에 도리스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고 말았다.


3. 기하학 시대

        기하학 시대(Geometric Age)는 B.C. 1200~B.C. 800년에 해당한다. 도리스족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나중에는 크레타와 소아시아(Asia Minor)의 남서부 해변까지 장악하였다.

        또한 이 때에 테살리아인(Thessalian)으로 불리는 인도 유럽 민족의 하나가 지금의 테살리아에 정착하였다.

        도리스족은 영화를 누렸지만 그리스는 약 400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 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도리스족은 철과 기하학적인 모양의 도자기를 전해 주었으며 다산의 여신 대신에 남성신을 숭배했고 포세이돈, 제우스, 아폴로와 같은 미케네 시대의 신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800년께 미케네 시대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재건되었고, 전제 정치 대신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영도되었다. 이 때 도리스족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이오니아족(Ionian)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로는 아테네가 있었다.


4. 고풍의 시대

        고풍의 시대(Archaic Age)는 B.C. 800~B.C. 480년에 해당한다. 이 때는 지방의 농업과 가축 농업이 활기를 띠었고, 그리스의 새로운 식민지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의 시실리, 남부 프랑스와 남부 스페인에 건설되었다. 한편 그리스 알파벳 발명과 호머의 시, 신전의 설립 등은 여러 도시 국가 주민들에게 그리스인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처음으로 심어 주게 되었다.

        도시 국가는 높은 지대에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건설되었으며 이 곳에는 신전, 보물이 보관되었고, 외부 민족의 침입 때는 피난처로도 제공되었다. 성채 밖에는 아고라(Agora:시장)가 있었으며 그 뒤쪽은 거주 지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 국가들은 자유로운 자치권이 있는 국가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말다툼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제 군주의 지배를 ?竄置構?집정관이 이끄는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가졌다.


5. 아테네와 살론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4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한편 B.C. 594년 집정관에 임명된 살론(Salon)이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 회였지만 그는 좀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살론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으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특권의 세습을 폐지하였고, 부에 근거해서 네 가지 계급으로 정치 권력을 개편하였다. 즉 첫번째와 두 번째 계급만이 지배자(관리인)가 될 자격이 있고, 네 가지 계급 모두 행정 장관을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개혁은 민주주의의 선구적인 것이었다.


6.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에는 여러 도시 국가가 스파르타(Sparta)라는 형태 안에서 존재하였다. 이것은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그룹이었으며 전제 정치가 남아 있는 몇몇 도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통치하였다. 그들은 도리스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B.C. 9세기의 입법가 뤼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 정해진 엄격한 군사적 규정에 따라 운영되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만일 허약하다고 판명되면 산 꼭대기에 갖 1f다 버렸다. 7세의 소년들도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으며 소녀들은 군사 훈련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튼튼한 아들을 낳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7. 페르시안 전쟁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께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 페르시아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적대감을 갖고 보복을 결심했다.

        B.C. 519년 점차 세력을 팽창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좌에 등극한 다리우스(Darius) 1세는 아테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뒤에서 아테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 역시 그리스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페르시아 군대가 B.C. 490년 마라톤(Marathon)에 상륙하자 1만여 명에 불과한 아테네 병사들은 뛰어난 지략으로 페르시아 사수들과 기병대를 격파하였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다.

        한편 다리우스 1세가 계획을 달성하기 전에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 넘어갔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아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입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 수를 거의 500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초기의 전세는 그리스 쪽에 불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원과 숙련된 기동 작전을 펼쳐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1년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장군 밑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플라테아(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전멸시켰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인들의 도시 국가들도 해방시켜 주었다.


8. 고전 시대(B. C. 480~B. C. 338)

        페르시안 전쟁을 거친 후 여러 도시 국가들이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의 목적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구출하고, 또 다른 페르시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한편 페리클레스(Pericles:B.C. 461~B.C. 429)의 영도 아래 아테네인들은 문화, 예술, 과학의 황금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대개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안 도시들 안에서 싹텄으며 해외 무역과 함께 호화로운 물결을 타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영토를 더욱 팽창하기 위해 서쪽을 관망하기 시작하였고 본토에 있는 도시 국가들에 대항하려 하였다. 아테네는 또한 스파르타에 의해 주도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해 있었던 무역 지대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9.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테네가 본국 도시인 코린트(Corinth)와 케르키라(Corcyra)의 논쟁에서 케르키라를 지지하자 코린트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발발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31~B.C. 421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전쟁은 본래 코린트와 아테네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아테네는 육지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티카(Attica)를 넘겨 주고 해군력으로 펠로폰네소스를 봉쇄하였다. 이로 인해 쌍방은 분명한 활로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불안정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테네에게 포위를 당했던 스파르타는 B.C. 413년에 아테네 함대와 보병을 격파하면서 그 포위망을 뚫었다. 아테네인들의 군대와 돈과 배들은 점점 고갈되어 갔고, 서서히 굶주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실리(시칠리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은 스파르타에 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소아시아의 이오니안 도시 국가들??반환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결국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넘어가고 말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여러 도시 국가들이 파괴되었으며 오직 스파르타만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에 대항했던 도시 국가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과두 정치를 통해 강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에게 해의 도시 국가들은 점차 옛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드높아지기 시작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B.C. 376)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역사의 무대는 이제 스파르타와 ? 팍柳陋?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세력 부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비할 때 마케도니아는 북쪽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발전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으나 육상과 해상의 통신 수단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발전된 문화를 수용하였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는 테베(Thebes: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적이 있지만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로부터 군사 전략에 관해 충실히 배웠고, 후에 보병 부대와 창기병 부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서서히 그의 입지를 주변 도시 국가들로부터 강화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카이로네이아(Khaironeia)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여러 도시 국가들을 연합 동맹 형태로 묶 어 페르시아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336년에 암살당함으로써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야망은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병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던 20세의 알렉산더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세계의 질서는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빈틈이 없으며 야심적인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가 추구했던 사업을 계승하려 하였다. 그는 국내의 질서를 회복한 후 페르시아를 목표로 B.C. 334년에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출정하였다. 페르시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알렉산더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파라오임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관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B.C. 331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하는 동안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알렉산더는 150년 전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했으며, 왕의 보물들을 압수하였다. 그 다음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Bactria)인의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하였지만 그의 병사들은 무리한 원정으로 지쳐 갔기 때문에 결국 B.C. 324년에 메소포타미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정착해 남쪽의 아라비아(Arabia)에 대한 정복을 꿈꾸었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1. 로마의 통치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내는 동안 로마인들은 서쪽으로부터 세력을 팽창시켜 그리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B.C. 168년에 마케도니아가 패하고 소아시아도 점령당하더니 결국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이 로마에 넘어가게 되었다.

        B.C. 31년에는 해상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로마의 첫번째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그후 3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한 지방이 된 그리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예술, 문학 그리고 철학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아테네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다.


12. 기독교화와 비잔틴 제국

        로마의 평화는 395년에 서고트족(Visigoths), 반달족(vandals), 480년의 동고트족(Ostrogoths), 500년의 불가르족, 540년의 훈족(Huns) 그리고 600년 이후의 슬라브족의 대이동에 의한 침략으로 붕괴되어 간다.

        한편 이 시기 동안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전파됨에 따라 로마 황제의 개종과 비잔틴 제국의 형성을 불러일으켰다. 324년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1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 곳을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였다.

        4세기 말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비잔틴 제국은 1453년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힘과 부를 증대시켰다.

        한편 394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는 기독교를 그리스의 공식적인 종교로 만들었고 그리스 로마신에 대한 숭배를 금지시켰다.


13. 십자군 전쟁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 동방의 이교도와 북쪽의 이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은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창궐한 이슬람교로부터 성지(The Holy Land)를 해방시킨다는 목표 아래 1095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후 십자군 전사들은 종교적인 열정만큼이나 탐욕적인 면이 많아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한편 베네치아인들은 크레타 섬을 포함해 전략상 중요한 항구들을 손에 넣었고, 지중해에서 강력한 무역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크게 약화되었고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14. 오스만 터키 제국의 지배

        13세기 말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오스만 터키 제국이 14세기 중엽부터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비잔틴 제국은 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서유럽은 100년 전쟁에 휩싸이고 있었기 때문에 의존할 곳이 없었다. 결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제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후에도 그리스는 터키 제국과 베네치아 간의 전쟁 무대로 변모됨에 따라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에서는 이오니아 섬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일부분으로 바뀌었다.

        터키 제국의 통치 기간에 나타난 악습 가운데 하나는 터키의 근위병, 술탄의 개인 경호원으로 그리스인 가정에서 남자 어린이 한 명을 차출하는 것이었다. 근위병의 대부분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보병이 되었지만 영리한 자는 고관 대작을 포함한 높은 관직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리스 여성들은 술탄의 후궁으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터키 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터키 제국의 해군이 베네치아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게 격파당함으로써 기세??꺾이기 시작하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무능한 술탄들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쇠퇴를 재촉하였고,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에 있는 오데사(Odessa)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과 키예프(Kiev)에 있던 교회 성직자들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당하자 러시아의 대주교는 모스크바를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제3의 로마'라고 선포한 뒤 남쪽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1820년 술탄에 대항한 알리 파샤(Ali Pasha)의 반역은 그리스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점차 그들은 터키 제국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터키인들과의 충돌은 본토와 많은 섬들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테베, 트리폴리스(Tripolista), 나바리노(Navarino), 메솔론지(Messolongi), 모넴바시아(Monemvassia), 나폴리온(Nafplion) 등을 되찾게 되었다. 1824년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터키와의 충돌이 발? 暉臼?혈전을 거듭하던중 서유럽(러시아, 영국, 프랑스) 함대가 개입하여 터키 함대를 격파하였다.


15. 그리스 국가의 탄생

        전쟁의 승산이 없어짐에 따라 술탄은 결국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스는 카포디스트리아스를 그들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나폴리온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나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암살당하고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또다시 개입하여, 그리스는 군주 정치를 해야 하며 그리스가 권력 투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왕위를 비그리스인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바이에른 출신 오토 1세가 1833년 왕위를 계승했으며 수도를 아테네로 옮겼다. 그러나 그 역시 정치 스타일이 독재적이었고 독립 전쟁 지도자들과도 많은 갈등을 야기시켜 결국은 해임되고 말았다.

        한편 1866~1868년 사이에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크레타에서 터키에 대한 반 란이 일어났고, 1881년 러시아­터키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는 테살리아와 에피루스의 일부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896년 과거 그리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모든 영토는 그리스에 다시 귀속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자는 대그리스주의)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897년 크레타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그리스는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터키와의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터키 군대가 아테네를 흡수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열강들의 중재에 따라 크레타는 그리스에 반환되었다.


16. 발칸 전쟁

        20세기 초에 터키 제국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새롭게 형성된 발칸 국가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마케도니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영토에 대한 갈등이 두 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을 초래하였다. 1차 발칸 전쟁 때는 1912년에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터키??대항해 싸웠고, 1913년의 2차 발칸 전쟁에서는 세르비아, 그리스가 불가리아와 싸웠다. 이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남부, 에피루스 일부분 그리고 몇몇 에게 해 섬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17. 양차 세계 대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중립으로 남아 있을 것을 주장했으나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압력으로 연합국측에 가담하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초기에는 그리스를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절하여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독일 군대는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1941년 4월 그리스를 침공했는데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나치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인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은 계속되었다. 저항 단체로는 ELAS(Ellinikos Laikos Apeleftherotikos Stratos), EAM(Ethnikon Speleftherotikon Metopon), EDES(Ethnikos Dimokratikos Ellinikos Syndesmos)가 있었는데 ELAS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창립되었지만 모두 좌익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EAM은 그리스를 공산화하려는 스탈린주의자들로 구성되었고, EDES는 우익과 군주 정치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다. 독일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ELAS와 EAM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1944년 여름에 임시 정부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1944년 10월 좌익과 우익 양 진영은 서로 나뉘어 내란을 벌였다.


18. 시민 전쟁

        1944년 12월 경찰이 신타그마(Syntagma) 광장에서 공산주의 데모대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좌익과 우익 사이의 싸움은 시민 전쟁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간섭하여 ELAS와 EAM의 승리를 막았고, 1946년 공산주의자들이 보이콧한 선거에서 왕정 지지파들이 승리하였고 게오르기오스 2세가 국민 투표에 의해 왕위에 복귀하게 되었다.

        10월에 좌익 군대가 창설됨에 따라 시민 전쟁은 계속되었다. 좌익 군대는 수천 명을 모아 게릴라 전법으로 활동했지만 소련의 영향력 확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미국이 반(反)공산주의 연합 정부를 지원함에 따라 승리는 반공산주의 그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스는 시민 전쟁으로 인해 2차 세계 대전?대전 때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수천 명의 주민들이 집을 잃었고 감옥에 끌려가거나 추방되었다.


19. 재건과 쿠데타

        시민 전쟁 이후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새롭게 결성된 우익 그리스 연합(Greek Rally)이 승리하였다. 그후 그리스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고, 미국이 그리스에서의 우익 정부를 지원함에 따라 그리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다.

        한동안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다가 1967년 4월 파파도풀로스(Papadopoulos)가 주도한 육군 대령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가 성공함에 따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임시 군사 정권이 성립하였다. 1972년 6월에 파파도풀로스는 그리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 공언했지만 1973년 이후 임시 군사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11월에 학생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여 약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파파도풀로스는 요아니디(Ioannidi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후 군부는 그리스의 혼란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리에 있던 카라만리(Karamanlis)를 불러들였고 그의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은 1974년과 1977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개인적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그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81년 유럽 공동체에 그리스를 가입시킨 것이다.

        1981년 10월 선거에서 PASOK(범그리스 사회당)가 승리함에 따라 그리스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인정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난이 심화되고, 전화 도청과 횡령죄 등 여러 사건에 지도부가 연루됨에 따라 인기는 급강하하였다.


20. 1990년대

        1990년의 선거에서는 신민주당이 승리하였다. 높은 인플레와 지나친 정부 지출 등의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 정부는 일련의 긴축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1991~1992년 사이에 공공 부문에서의 파업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알바니아 피난민들의 유입과 구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마케도니아라는 명칭 사용에 대한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후1993년 선거에서 PASOK가 170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민주당을 누르고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II. 그리스의 자연 환경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는 본토와 전체 영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2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토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중부 그리스, 에피루스(Epirus), 테살리아(Thessaly), 마케도니아(Macedonia), 트라키아(Thrace)로 구분되며, 섬 그룹은 스포라데스(Sporades), 북동부 에게 해, 사론(Saronic) 만(灣), 키클라데스(Cyclades), 도데카네소스(Dodecanese) 그리고 에게 해에는 없지만 이오니안(Ionian)으로 구분된다. 한편 에비아(Evia),크레타(Crete)와 같은 섬들은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다.

면적은 13만 1900km2이며, 그리스 영토 내의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은 총국토 면적보다 약 3배가 큰 40만km2이다. 또한 산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북부 지방은 검은 소나무 삼림이 대부분이고 중부와 남부 지방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삼림인 관목 밀생 지대이다. 북쪽 지역에서 갈색곰과 노루를 볼 수 있고, 남쪽 지역에서는 재규어, 야생 염소, 호저 등이 발견된다. 저지는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못 미치며 그 대부분이 에게 해에 면해 있는 해안 평야이다.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대개 6월의 연평균 기온은 23~33℃이며 1월에는 6~13℃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남부 그리스는 북쪽보다 4℃ 정도 더 따뜻하다.


III. 그리스의 정치

        
1975년 6월 11일에 그리스 정부는 대통령에 의해 통치되는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입법권은 단원제인 300석의 의원들에 의해 수행되고, 행정권은 대통령과 정부에 부여되었다.

        한편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고, 대통령은 의원들에 의해 선출되며 5년 임기에 재임이 가능하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3차 투표에서는 5분의 3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된다. 만약 후보자가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보통 선거를 통해 다수표를 획득한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초기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상당한 권력을 부여하였지만 1985년에 PASOK 정부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시하였고 1986년에 비준을 받게 되었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범그리스 사회당(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 사회당(Communist Party), 좌익과 진보주의 그룹 연합(Coalition of Left and Progressive Forces)이 있다. 현재의 정국은 신민주당과 PASOK의 대결 구도로 짜여져 있으나 PASOK가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는 현재 UN(국제 연합), EU(유럽 연합),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유럽 평의회, NATO, WEU(서유럽 동맹), OSCE(유럽 안보 협력체), BSCE(흑해 경제 협력체)에 가입하고 있다.


IV. 그리스의 경제

        그리스는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으나 점차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그리스는 혼합 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자본당 수입이 가장 낮은 수준이라 포르투갈처럼 개발 도상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스는 1980년대 사회당 정권이 민간 기업을 무더기로 국유화하고, 노사 분규가 생기면 기업주가 정부에 기업을 매각하는 풍조가 생겼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부실(不實)의 늪에 빠져 있었다. 안이한 경영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0년 4월에 출범한 신민주당 정권은 국가 경제를 좀먹는 국영 기업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매각을 실행하였다. 또한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투자 촉진법을 제정, 각종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국가 예산 지출을 줄이고 인플레를 잡기 위한 정부의 긴축 정책은 공공 부문에서의 대규모의 파업으로 이어지고 1993년 선거에서 예전의 PASOK가 다시 집권함에 따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PASOK 등장 초기에 1980년대와 같은 지나친 국가 예산 지출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PASOK 정부는 이전 정부의 안정화 조치를 따랐고 정부·노동자·고용주 사이에 3자간의 사회 계약을 협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95년 4월에 인플레는 10%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2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IMF(국제 통화 기금)도 1995년도 결산에서 그리스 경제는 향상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회계 정책에 있어서의 쇠퇴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관광업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해운업이다. 관광업은 외화 획득에 있어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94년에는 무역 적자의 28.9%에 맞먹는 약 4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4년의 관광객 총수는 1100만 명을 넘었고 총외화 벌이 액수는 국내 총생산의 6.8%에 해당했다.

        한편 우리 나라의 대 그리스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타이어, 가전 제품, 직물, 조선, 신발 등이고 수입 품목은 알루미늄 제품, 엽연초, 철강 제품, 대리석 등이다. 우리 나라는 1990년에 선박 수출에 힘입어 수출액이 1억 5961만 달러에 이른 반면 수입은 7682만 달러로 우리 나라의 수출 초과 현상은 여전했다. 이같이 물걋??タ?역조 현상이 뚜렷하자 그리스측은 우리 나라에 적극적인 수입을 촉구하고 있으나 그리스에서 구매할 상품이 별로 없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그리스 시장은 인구 1050만 명의 소규모이므로 몇 명의 유력한 바이어를 통한 수출이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제 통화로는 달러보다 마르크화를 선호하며 바이어와의 거래 성사 여부는 품질, 가격 조건 이외에 인간 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V. 그리스 문화

        그리스에는 전통적인 관습이 넘쳐흐르고 있다. 명명일(생일 대신에 축하함), 결혼식, 장례식 등은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명명일에는 집을 개방하고 선물을 들고 축하하러 온 손님들에게 간단한 음식들을 대접한다. 결혼식은 매우 즐거운 축제이며 춤과 축연이 베풀어지고 주연은 며칠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또한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싶다면 지정된 누드비치(Nude Beach)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전통적으로 예의를 중요시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예절에 벗어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여 남자들의 대부분은 직접 축구를 하거나 아니면 관중으로 축구장에 들르곤 한다. 농구는 축구 다음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를 방문하면 많은 환영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리스인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 인구와 민족

        공식적인 그리스 인구는 1995년의 인구 조사에서 105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아테네의 인구는 약 250만 명이지만 아테네에 포함된 지역까지 합치면 337만 명에 이른다. 다른 대도시로는 테살로니카가 40만 명, 피라에우스(P iraeus)가 50만 명, 파트라스(Patras)가 14만 명 그리고 이라클리온(Iraklion)에 1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 내에 거주하는 가장 큰 소수 민족으로는 트라키아에 30만 명, 브리톤스(Britons)에 10만 명이 거주하는 터키인이다. 그 외에 5000여 명의 유태인, 에피루스에 있는 블라흐족과 사라카차니 양치기들이 있고 최근에는 알바니아인이 많이 유입되었다.


2. 종교

        그리스인 가운데 97%가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나머지는 카톨릭,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유태교,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지방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신앙심이 매우 깊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세속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동방 정교회

기독교는 많은 교파를 형성하고 있지만 아래와 같이 편의상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구교(카톨릭과 동방 정교회). 동방 정교회는 중근동 지역(그리스 등)을 비롯해 구공산권 각국에 퍼져 있는 반면, 카톨릭은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유럽 남부 대부분과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② 종교 개혁 이후 루터와 칼빈의 신조를 이어받아 온 유럽 북부 여러 나라의 프로텐스탄트 각 교파. ③ 주로 앵글로색슨 계통에서 전개한 프로테스탄트.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종교가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 특히 동방 정교회(또는 동방 교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의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 외에도 루마니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등 동구권을 비롯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있다. 동방 정교회라는 명칭은 카톨릭이 서방 교회라는 것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동방 정교회와 서방 교회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는데 이처럼 나누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제국이 395년 동로마 제국(또는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된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교회는 이처럼 분열의 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종적인 양분은 1054년에 일어났다. 이 때부터 그리스 신학과 라틴 신학의 두 신학 체계를 형성하며 분열되었는데 그리스 신학은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라틴 신학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하는 라틴 민족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지성적인 특징을 가진 반면, 서방 교회(카톨릭)는 윤리적이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동방 정교회는 카톨릭과 달리 이콘(Icon: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들의 화상 畵像)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카톨릭의 포도주나 빵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나 집안에 들어갈 때면 이콘에 입을 맞추며, 작은 이콘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렇듯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 비해 신비적인 면이 강한 편이지만 동방 정교회의 입장에서는 카톨릭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지나치게 율법?岵막?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3. 언어

        그리스어는 4000년의 구술(口述) 전통과 약 3000년의 문자 전통을 가진 가장 오래된 유럽 언어이다. 4000년 이상 진화된 그리스어는 다음과 같은 시기를 겪었다. 그리스어는 아테네의 황금 시대에 힘을 발휘했고,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혼성 상업어로 쓰였으며 헬레니즘 시대(B.C. 330~A.D. 100)에는 동쪽, 즉 인도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후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언어로서 아람어(셈어) 대신 채용되었고 로마 제국에 속한 동부 지역 국가들도 공식 언어로서 채택하였다. 380~1453년 사이에는 비잔틴 제국의 공식 언어로 선포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리스어는 그 위상을 유지해 왔으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는 과학과 학술 용어에서 객관적인 언어 실체로 인정받았다.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 지역과 해외에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남부 그리스 방언이다. 현대 그리스어 는 그리스의 방언들 즉 크레타어, 키프로스어, 마케도니아어와 고대 그리스 어휘를 조합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4. 예술

        고대부터 예술은 그리스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여름 동안에는 옛부터 있었던 고대 극장에서 연극이 상연된다.

        시각 예술은 현대 유럽 예술의 조류를 따르고 있으나 자수, 짜기, 벽걸이, 융단과 같은 전통 민속 예술은 아직도 계승되고 있다.

        부주키(bouzouki)는 가장 민중적인 악기이며, 지역마다 각자 고유한 악기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가난과 고통을 주제로 한 렘베티카(Rembetika)음악은 군사 정권하에서 금지되었으나 다시 부활되었다.

        고전 시대, 헬레니즘 시대, 로마 제국의 통치 시대 동안의 건축은 세 가지 독특한 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깨끗한 도리스 양식, 가느다란 이오니아식, 화려하게 장식된 코린트식 등이다.

        음유시인 호머는 서사시 `오디세이'와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인 `일리아드'를 지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였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공화정』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콘스탄틴 카바피(Constantine Kavafy:1863~1933)는 개인적이며 회화체적인 스타일의 시를 그리스에 도입함으로써 대변혁을 일으켰다. 또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20세기 그리스 소설가 중 가장 유명했으며,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유럽과 미국의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한 유명한 프리마돈나였다.


5. 축제

        부활절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인데 이 때는 촛불을 들고 행진하며 축제와 함께 불꽃 놀이가 있다.

        또한 수많은 지역 축제들이 1년 내내 개최된다. 많은 문화 축제들은 여름에 개최되는데 가장 유명한 축제로는 희극, 오페라, 무용극, 고전 음악 연주회가 상연되는 아테네 축제이다. 이 축제는 고대 그리스 드라마가 에피다우루스(Epidaurus) 극장에서 상연되는 에피다우루스 축제와 함께 개최된다. 다른 문화 축제를 벌이는 도시로는 이오아니나(Ioannina), 파트라스(Patras), 테살로니카 등이 있다.


6. 언론 매체

        가장 널리 보급된 그리스 신문은 『에트노스 Ethnos』, 『타 네아 Ta Nea』, 『아포예프마티니 Apoyevmatini』이다. 영자 신문은 daily Athens News, Weekly Greek News가 있고, 영어 잡지로는 Greece's Weekly, Odyssey가 있다.


7. 건강과 음식

        수도꼭지에서 받은 물은 일반적으로 마셔도 괜찮은 편이다. 건강상 조심해야 할 점은 태양열에 의한 화상과 열사병, 탈수증이며 밤에 곤충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방충제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또한 독이 있는 뱀은 살무사뿐이지만 대개 드물고 그리스의 유명한 양치기 개는 대부분 짖기만 할 뿐 물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전통 음식 가운데 유명한 것은 수블라키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숯불 갈비에 해당하며 생선이나 육류를 쟁반 모양으로 잘라 수십 장씩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을 총칭하는 말이다.

        육류로는 돼지고기와 양고기가 널리 쓰이는데 간이 음식점(타베르나)에서는 양고기를 주로 쓴다. 간은 소금과 후추로만 한다. 그리스 양고기는 육질이 곱고 느끼한 맛이 거의 없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리스의 기후는 포도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와인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가 된다. 대개 레치나와 나머지 것들로 구분된다. 레치나는 송진을 넣어 가미한 것인데 독특한 맛이 난다. 레치나가 아닌 다른 와인 중에는 파트라스의 데메스티카와 아테네 근교의 이미토스가 있다. 지방의 와인으로는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나는 부타리나우사 적포도주가 유명하다.

        또한 맥주도 그리스의 명물로 손꼽힌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맥주 회사까지 이 곳에 많이 진출해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커피에는 그리코(단것), 메트리오(보통), 스케토오(블랙)의 세 종류가 있다.


8. 관광지

        그리스 관광의 가장 큰 매력은 고대 유적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들의 유적지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와 라틴 문화의 잔재들을 볼 수 있다.

또한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외에 베니스풍의 건축물, 터키식 성, 성전 등 이민족들에 의해 남겨진 문화 유산들도 볼 수 있다.

        에게 해의 앞바다에 있는 섬들 가운데 남쪽에서 가장 큰 섬은 크레타 섬이다. 고대 크레타 문명을 꽃피웠던 이 곳에는 B.C. 2000년에 건축된 크노소스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34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고 한 영국 귀족에 의해 발굴되었다. 방만 1200여 개, 2~4층으로 구성, 미로처럼 얽힌 복도들, 여왕의 방 옆에 있는 욕조, 수세식 변기 시설 등은 4000년 전에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섬의 남쪽 패스토스에도 크노소스와 비슷한 궁전 유적이 있으며, 크노소스에서 동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는 말리아 궁전이 있다. 이 세 궁전은 크레타의 3대 유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에게 해에는 신화와 신비에 쌓인 수많은 섬들이 있다. 불의 섬 테라, 비너스상이 발견된 밀로스, 장미의 섬 로도스, 피타고라스의 고향 사모스, 누드비치로 유명한 미코노스 섬, 히포크라테스 가 탄생한 코스 섬, 면세 천국 칼림노스 등이 해당된다. 한편 그리스 정부는 최근 170여 년 전에 프랑스에 넘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되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테네에서 유명한 곳으로는 B.C. 480년에 완공되었으며 우아함과 조화를 겸비한 파르테논 신전 유적지가 남아 있는 아크로폴리스(The Acropolis), 고대 광장(Ancient Agora), 모나스티라키 교회(Monastiraki), 아테네 대성당(Cathedral of Athens) 등이 있다.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민속 박물관, 팔라미다(Palamida) 요새가 볼 만하며, 중부 그리스에서는 아폴로 신전이, 북부 그리스에서는 페라마(Perama) 동굴, 판타레이몬(Pantaleimon) 수도원, 아토스 산, 올림푸스 산이 유명하다. 특히 그리스 정교의 성지인 아토스 산은 휴가철에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참선을 통한 구도와 고행, 철저한 수도원 생활로 유명한 아토스 산 일대는 수백 개의 수도원이 바다와 접한 절벽과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색다른 기분을 누릴 수 있다.

▶까발라(네압볼리, 네아폴리스)

터키 국경인 압살라에서 서쪽으로 21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시내 중심에 사도 바울 도착 기념 교회가 있다.

▶복음으로 새로워진 도시 “네압볼리” (까발라)
        그리스와 터키를 잇는 E80번 도로를 타고 데살로니키에서 북동쪽을 향하여 다가보면 그림같이 어여쁜 성경에서 네압볼리라고 부르는 도시가 나타난다.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혼 여행지로 택하여 이곳에 여행을 올 정도로 도시는 아담하고 지중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겨울이라 할지라도 훈훈한 바닷바람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중해의 역하지 않는 바다 냄새를 선사한다.

        로마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에그나티아 도로는 작은 돌을 벽돌처럼 촘촘히 땅에 박아서 만든 마차 길이다. 오늘도 자동차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부두가의 도로를 사도  바울을 기념하기 위하여 오도스 바불로스라고 주민들은 부르고 있다. 즉 바울路이다. 이 도로를 걸어서 조금 올라가면 유럽 땅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도착하는 바울의 그림이 있다. 길가에 화려한 벽화가 크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불빛이 환하므로) 그 벽화는 최근의 것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자는 모습, 천사가 나타나서 꿈에 말하는 모습,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는 모습으로 세 부분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프레스코화로  그리어져 있으나 자동차의 매연과 비바람에 조금은 색이 바랜 채로 바울 기념교회 전면에 전시되어 있다. 바울 사도 당시의 이 도시 이름은 “네압볼리” 즉 새(네아) 동네(뽈리) ,신촌 이었던 것이다.  네압볼리 부두에서 손에 잡힐 듯 떠 있는  앗소스 섬 주민들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내륙에 새운 도시라는 의미에서 새 동네라는 이름이 지어 졌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경 일이다.

        그러다 바울사도가 마게도니아 사람들의 환상을 본 후 에게해 건너편 소아시아 지역 드로아(트로이)에서 배를 타고 이 땅에 도착한다. 바울 당시의 부두는 현재의 항구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자그마하게 터만 남아있고 오늘날 항구는 근래에 와서 만들어진 것 이다.
        이 도시는 9세기경부터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 들어가기 전인 14세기 까지 도시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도시라는 ‘크리스토 뽈리’라고 부른다. 즉 ‘예수촌’이라고 부르지만 터키인들이 이도시를 접수 한 후 말을 메는 곳, 또는 말 등위라는 의미를 가진 ‘까발라’라고 부른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아크로폴리스의 성벽이 말해주듯이 이 도시는 오랫동안 많은 침략과 전쟁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그런 아픈 상처보다는 자신들의 도시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도시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로 수돗물을 공급해주었던 도수교 밑에서 작은 가계를 하고 있는 요르고스라는 중년 남자는 자신의 가계를 찾은 이방인인 나에게 이곳 출신 알리라는 사람이 이집트의 파사(총독)가 되었고 그리고 이 도시는 하느님이 축복한 도시라고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곳 주민들의 이러한 인식이 살아있는 한 이 도시는 복음으로 새로워진 영원한 그리스도의 도시인 것이다.


▶바울도착 기념 성당.(현재는 정교회)

        사도 바울로가 도착한 지점에는 기념 조형물이 그림과 함께 있고 뒤에 정교회가 있다. 바닥에는 커다란 돌덩이 세 개가 있었는데 바울이 도착할 당시의 돌이라고 전한다.


▶데살로니까에서 까발라까지 3시간 소요.


▶네아 폴리스 ocean 에 투숙한 에피소드.

▶필립비는 유적이 널려있다 거대한 기둥들 . 대리석등 사도 바오로의 감옥터에는 벽에 벽화가 있다는데 철책으로 못 들어가게 해 확인할길은 없는데 필립비 도시의 잘못된 사람을 세워놓고 재판하는 계단터 아레오 파고 법정 비마터 앞에 서서 가아드의 설명을 듣는다.

       자색 옷감 장사로 리디아 여인이 강가에서 바울로님 만난 곳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기념 성당이 있어 지금도 세례 장소로 쓰고 있다. 우리는 그 강가이였던 곳에서 미사 봉헌. 오래 못 잊을 곳이다. 부유한 그 여인은 바울로님을 그리 도와드렸다고 성서엔 기록되어 있다.


▶필립피

지금의 Flippoi.

그리스 카발라 주에 있는 구릉도시.

        네아폴리스(카발라)의 연안 평야와 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BC 356년에 이 근처의 금광을 장악하기 위해 이 오래된 타소스의 마을을 요새화했다. BC 42년에 필리피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무찔렀다. 적군과 엇비슷한 병력을 거느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필리피 서쪽에 있는 에그나티아 가도 양쪽에 진을 쳤다. 이들의 진지는 늪지 덕분에 부분적으로 보호를 받았으나 안토니우스의 기습을 받은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병력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을 쳐부순 것을 알지 모르고 자살했다.

        약 3주일 뒤인 10월 23일 브루투스도 2번째 공격을 감행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역시 자살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필리피에서는 제대 군인들을 위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러한 식민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사도 바울로는 2번째와 3번째 전도 여행에서 만났던 필리피의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에게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썼다. 이 지역에는 로마 제국시대의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인구 728(1981).

        기원전 42년 필립비 성 밑에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군대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카시우스 군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는 8,000명의 병사를 잃고 패전하여 자살했으며,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는 1만 6,000명의 병사를 잃고 승전했다.
이후 필립비는 ‘중동의 작은 로마’로 불리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 통치하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누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 칭하였다.

        필립비가 발굴된 것은 1862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였다.
        산 위에는 아크로폴리스 산성의 잔해가 남아 있고 평야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도로 옆에 디오니소스 신전과 바울로가 갇혔던 감옥이 있다.


        바울로가 필립비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지각티스 강은 폭이 좁아 큰 개천 정도로 보이는데 강가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리디아 교회가 있다. 리디아가 옷감장수였음을 의식해서인지 내부 전면을 채색유리로 단장했다. 지각티스 강에서 리디아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온다.


        스몰리카 산을 지나고 1957m 판기온 산을 지나고 네카니 산을 지나고 963년 지어진 성벽을 지나 리디아 마을로 들어선다.


▶암피폴리스

        필립비’ 유적지를 지나 ‘암피폴리스’로 간다. 바울이 실라와 ‘디모테오’를 데리고 함께 가신 곳이다. 주변이 금광이었다는 이곳은 작은 마을을 지나 산위로 올라서니 커다란 두개의 강이 감싸 흐르는 산꼭대기의 천연의 요새다. 이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마케도니아 전쟁으로 치열한 전투를 하던 돌들만 널려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폐허로 유적 잔해들이 빗속에 나뒹굴고 위에서 바라보니 광활한 너른 들을 내려다보며 호령했을 제후들이 주변에 흩어진 400여기의 무덤 속에서 잠잔다.

        조금 아래를 돌아 헬레니즘 시대에 세웠다는 사자상을 보러갔다. 이 사자상은 기원전 2세기전의 작품으로 레소보소섬의 선원이었다가 시리아의 총독이 된 라오메돈(laomedon)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차가 다가가자 어디선가 송아지만한 개떼들이 차를 에워싸고 모여든다. 관광객에게 많이 길들여진 모양이지만 냄새가 고약하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사자의 위용은 간데없고 입안에 새들이 둥지를 틀어 새끼를 기르는 것이 보인다. 유적지 사자상 입 속의 새둥지라...... 그리스의 모습이다.

        암피폴리스를 지난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였던 암피폴리스에는 알렉산더의 동문인 라오메돈의 용맹을 칭송하는 거대한 사자상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엄마에게 “저 사자는 왜 혀가 없어?”하고 물었다. 혀가 없으면 이빨도 소용이 없다. 결국 사자의 용맹은 무용하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조각가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단다.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생각했을 장인 정신 혹은 예술혼, 그도 아니면 책임감이라도 높이 사게 된다.


▶아폴로니아

        사도 바울이 지나가다가 전도 했다는 네아 아폴로니아(NEA APOLLONIA)를 향해간다.

       터키 음식이 진했다면 그리스 음식은 아무 맛이 없다. 그렇다고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도 없다. 쓱쓱 뚝뚝 그렇게 가볍게 뜯고 튀기도 해서 방금 나온 듯한 신선함, 그리스에는 원초의 냄새가 난다. 아폴로니아로 가고 있다. 성서시대의 정보교환지. 로마로 가는 중간 통과지인 곳에 바오로가 강론했다는 나무와 돌이 있다. 베마.


▶데살로니카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를 찾아가는 길에 로마 아고라(시장)의 발굴 현장이 있었다. 대리석의 열주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한 노인이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신의 군번 표지를 보여주며, 한국에 근무했었다고 한다.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주로 '재파니스, 곤니찌와'가 첫 말이다.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는 테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인 디미트리오스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2줄의 측면 복도가 있는 5세기 양식의 성당으로 그리스 최대의 교회이다. 무겁고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였으며, 많은 화려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기둥은 옛 것과 새 것이 혼재하여 화재로인한 최근의 복원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메테오라(Meteora)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신비로운 올림푸스 산이 반쯤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제우스 신을 비롯한 열두 거신족이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곳이다.
확실히 그리스인들, 오만방자하다. 터키는 무장해제하고 단순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땅이었다.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인간다움이 보다 귀하게 드러나는 곳. 사람들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소박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랐다. 도시들은 눈에 띠는 곳마다 작은 꽃들을 가꾸고 꽃집에 장식된 꽃들도 상품이라기보다 선물 같은 정성과 감각으로 도시를 꾸몄다.


        그러나 그리스에 들어서자 낯익은 풍경들이 되살아왔다. 이제 소음과 번잡함 속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척 콧대가 높다.

        2910m 올림푸스 산이 드러나고 있다. 18개 봉우리를 거느린 신들이 사는 곳. 우리는 그 성스러운 장소를 최소한 시속 8, 9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 장엄하다. 결국 올림푸스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시리게 다가오는 올림푸스를 지나 오사 산의 장관을 마주보며 달린다. 가는 곳마다 자귀나무가 풍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테살리아 평원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있다. 트리칼라를 지난다. 성당 꼭대기에 학이 둥지를 틀고 있다. 트리칼라를 지나서 karbaka가 메테오로지역이다.

메테오라, 고양된 영혼의 땅에 들어서 호텔 오르페우스에 묵는다.


열두 신은 다음과 같다.
·제우스(zeus): 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서 우뢰의 신이다. 그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신과 인간들의 아버지이다.
·헤라(Hera): 출산과 질투의 여신으로 제우스의 아내이다.
·포세이돈(Poseidon): 바다의 신이자 지진의 신이다.
·아테나(Athena): 애지(愛智)와 공예의 여신으로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아폴론(Apollon): 태양의 신이며, 음악, 궁술, 의술, 예언의 신으로 미 청년이다.
·아르테미스(Artemis): 달의 여신이며, 활의 명수로 수렵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폴론과 쌍둥이로 에페소의 수호신이다.
·헤르메스(Hermes): 제우스의 전령이며, 웅변, 나그네, 상업, 도적의 신으로 항상 철모를 쓰고 단장을 짚고 샌들을 신었다.
·아레스(Ares): 전쟁의 신으로 성격이 흉포해 신들의 미움을 받았다.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불과 철공의 신으로 절름발이지만 아테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아프로디테(Aphrodite):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고린토의 수호신이다.
·데미테르(Demeter): 수확의 여신이다.
·헤스티아(Hestia): 주방의 여신으로 가정의 수호신이다.

        ※신화 하나

        아르고스 왕의 딸 이오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자연히 헤라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헤라는 제우스와 이오의 밀회를 감시하기 위해 일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를 감시원으로 보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제우스는 이오를 아름다운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이오가 암소로 변신한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남편 제우스에게 암소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제우스는 아르고스의 눈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암소를 이오로 다시 변신시키는 일을 지혜로운 헤르메스에게 부탁했다. 헤르메스가 불행한 이오가 묶여 있는 목장에 와보니 아르고스가 일백 개의 눈을 뜨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도적질에는 초인적인 재주를 가진 헤르메스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헤르메스는 피리로 자장가를 불기 시작했다. 달 밝은 밤에 구성지게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아르고스의 눈은 하나하나 스스르 감기기 시작했다. 일백 개의 눈이 모두 감기고 아르고스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헤르메스가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내리쳤다.
        이오는 그리스 서쪽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때부터 그 바다를 ‘이오니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오는 헤엄을 쳐서 이집트로 갔다. 제우스는 그곳에서 헤라의 눈을 피해 이오를 전과 같은 모양으로 변신하게 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오늘날 리비아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헤라는 아르고스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광채 나는 아르고스의 일백 개의 눈을 공작의 꼬리에 장식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메테오라

        우리 일행은 차로 세 시간 가량을 달려서 주위가 바위산으로 휘장을 친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400m 높이의 층암절벽이 우뚝 서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모여 있다. 13세기부터 이곳으로 수도사들이 모여들어 14세기부터 수도원이 건립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자 수도원 다섯과 수녀원 하나만이 남아 있다.
        어떻게 산상절벽에 있는 수도원으로 물자를 날랐는지 놀랍게 여겨진다. 지금은 케이블카로 물품을 수송한다. 중턱까지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지만 계곡의 다리와 계단은 험준함을 느끼게 했다.


▶방문시기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연중으로 방문할 수 있지만 12월에서 3월까지는 습기가 많고 추운 편입니다. 최성수기는 7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로 몹시 붐비며, 5월에서 6월 사이가 가장 날씨도 좋고 그다지 혼잡하지 않으며, 요금도 비수기요금으로 적용되는 시기입니다.


▶교통편 

        아테네나 테살로니키, 트리칼라, 이오아니아 등에서 칼람바카(Kalambaka)로 가는 버스가 있다. 아테네에서 약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버스편은 아테네 터미널 B-(버스, 5시간 30분)-트리칼라-(30분)-칼람바카-메테오라로 연결하면 되고. 칼람바카 중앙광장에서 버스가 하기오 스테파노스나 대 메테호른 등으로 연결할수 있습니다.
        기차편은 아테네나 테살로니키에서 출발해 라리사(Larissa)에서 갈아타고 갈수도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출발한다면 오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리바디아와 람비아 사이의 멋진 산악풍경을 감상할수 있습니다.


▶복장 

        수도원은 소매가 없는 옷이나 길이가 짧은 복장 등 노출이 심한 경우는 입장이 금지됩니다. 샌들이나 반바지 차림도 입장을 시켜주지 않으므로 복장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일반정보 

        메테오라 수도원 입장시 약간의 입장료가 필요하며, 개관시간은 보통 오전 9시에서 오후 7시까지며, 대 메테호른은 화요일, 발람은 금요일, 루사노는 수요일에 휴관하므로 유의해야 합니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

        "시간이 없으니까 한 15~20분 안에 돌아와. 계단이 많아서 좀 힘들거야."택시 아저씨가 내려주자마자 대 메테오른 수도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이... 정말 많았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니 스커트를 준다. 나는 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여자는 긴 스커트만이 허용되는 것 같았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에는 칼람바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게 있었다. 탁 트인 시야로 칼람바카의 오밀조밀한 마을과 기암절벽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발람수도원을 지나쳐 ▶성 니콜라스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의 '파노라마 뷰'에서 잠시 내렸다. 칼람바카의 기암절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하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

        5시 반에 문을 닫는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에서 아저씨는 다시 택시를 세웠다. 택시에서 내려 나는 다시 달렸다. 다행히 이곳은 계단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곳에서 거의 평지에 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가 입장료를 냈다. 그런데 매표원이 표를 주면서 '치마치마' 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소리인지 그리스어인지 영어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으니 매표원이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니 이런... 치마 그러니까 스커트가 놓여져 있었다.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그래서인지 밝고 깨끗한 분위기였다. 정원에는 붉은 꽃들이 만발한 꽃밭도 있었다.


▶고린토

        공항에서 현지가이드의 영접을 받은 우리는 버스 편으로 아테네 남쪽에 있는 고린도를 향하여 떠났다. 버스에서 인사를 나눈 가이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리스어 몇 마디:

☞빨리 빨리 : 그리고라

☞ 천 천 히 : 시가시가

☞ I love you : 사가뽀

        우리는 운하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스프, 야채 사라드, 으깬 감자요리, 포크 스테이크, 디저트(청포도와 사과)로 된 식사는 담백하고 맛있었다. J 동문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에게서 그리스에 가거든 꼭 마셔보라고 추천받았다는 포도주 이름을 대며 웨이터에게 있느냐고 물으니 있다고 한다.


☞고린도의 아폴로신전과 로마의 유적

        운하구경과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고대 유적지로 이동하였다. 이곳에는 아폴로신전의 유적이 남아있는데 당초 건축되었을 때(BC 6세기)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기둥은 이 근처에서 나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기둥하나가 한 개의 돌로 되어있다 한다. 기둥양식은 단순한 도리아식이다. 그리스의 건축물은 그 기둥의 양식에 따라 3가지의 양식으로 구분된다. 도리아식은 柱頭의 모양이 접시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단순하고 강직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고린도 식은 주두가 화관모양으로 화려하게 되어있고 그 중간형태가 이오니아식인데 달팽이 모양의 주두를 갖고 있다.

        아폴로신은 제우스의 아들인 태양의 신이므로 도리아식 기둥으로 건축되었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폴로신전이외에도 많은 로마시대 유적이 발굴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공중목욕탕, 저수조, 로마식 포장도로, 수세식 화장실 등 흥미로운 것이 많이 있는 데 그 중에서도 성지순례자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Bema라고 하는 것이다. Bema란 총독이 대중에게 연설을 하거나 재판을 할 때에 사용하는 돌로 만든 단이다. 발굴되어 있는 Bema는 길이 3m, 높이 10m정도의 석단인데 이것이 유명한 이유는 유대인으로부터 가정파괴범이며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자라고 고발된 사도 바울을 로마의 총독 갈리오가 재판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 재판에서 갈리오는 로마시민인 바울이 로마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판결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계속 전도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린토 운하를 지나면 곧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인데 운하 때문에 육지가 갈라졌으므로 이젠 섬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다. 자동차로 몇 킬로미터를 가면 오른쪽 해변에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가 고린토 신도시이다. 고린토 시민들은 신약시대의 고린토를 팔레오 고린토(Paleo Corinth), 즉 구고린토라고 불러 현대적인 항구도시 신고린토와 구별하고 있다.  구고린토에는 허영의 거리가 있는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음란과 방탕이 판을 치고 있다.


▶고린토 베마

        바울로가 총독 갈리오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바울로의 활동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갈리오가 고린토 총독으로 재임한 기간은 51년부터 52년까지였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간 곳을 ‘재판자리’라고 했는데 그리스어로 ‘베마(Bema)’라고 부른다.
        ‘베마’는 총독이 연설하거나 재판할 때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든 단으로 높이는 약 5m이고 폭은 15m 정도 된다. 순례자들은 고린토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베마를 볼 수 있다.

        코린토 유적지입니다. 아고라 또는 극장 터 같은데, 아래 사진은 재정관 에라스토스가 적혀있어 로마서 16장 23절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따라서 로마서가 코린토에서 작성되었다는 중요한 물증이 됩니다.


▶고린토교회

        고린토 교회는 1929∼36년에 일본의 기술진에 의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졌다.
        고린토는 지진이 심하므로 지진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진 건축가들이 건립했다. 교회 내부의 천장과 벽에 장식된 성화들은 작자미상의 예술가가 평생토록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성전 입구에는 초대 목회자로부터 88대까지 이르는 목회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초대 목회자의 이름은 바울로이고, 제 2대가 아볼로이며 제 3대가 실라라고 적혀 있다.


▶국립고고학박물관.
        고대 그리스 유물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어 그리스 문명을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곳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유물이 많고 넓으니 쉬엄쉬엄 천천히 돌아보도록 하자.
        미케네 문명실의 아가멤논의 것이라고도 하는 황금가면도 훌륭하지만, 하프를 연주하는 인물을 아주 자그마하게 표현한 단순미가 수천년이 지났지만 마치 현대 조각을 보는 듯하다.

이집트 조각에서의 부동성이 보여지는 아르카익기의 딱딱함과 형식적인 표현을 지나, 신이 신으로만 남는 공허함이 아닌, 인간의 사랑과 미움, 싸움과 죽음, 모든 인간의 애환을 담고 있는 신들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이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표현한 대리석, 청동조소 작품들이 수없이 전시되어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야경

        고린도를 떠나 아테네로 돌아 온 우리는 시내의 Callirhoe호텔에 체크인 하고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이 호텔은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2004년 하계올림픽을 계기로 새 단장을 하여 아주 깨끗하다.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 중 4쌍은 아크로폴리스가 바로 앞에 보이는 Dionysos Zonars 카페에 가서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리스의 토속맥주인 Mythos를 마셨다. 맥주 맛이 좋음은 물론 이곳 카페에서 바라보는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은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어 우리를 감탄하게 하였다.


▶아크로 폴리스

        고대 아고라 옆에는 현대식 건물로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박물관 어느 곳이고, 인간을 균형있게 표현한 그리스 조각 작품이 대단하지만, 그릇마다 제각기 그려져 있는 그림들 또한 재미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우와!!!! 수도에서 냉장한 물이 나온다. 예지가 얼른 물통에 찬물을 채워 넣었다. 땡 잡았다.^^


▶파르테논신전

        아테네의 바위언덕 아크로폴리스에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47∼432년에 건립한 유명한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유적이 있다. 파르테논은 ‘처녀가 머무는 집’이란 뜻으로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을 위해 건립되었다. 폭이 30.8m이고, 길이가 69.5m이며, 높이가 10.4m인데 도리아 양식의 석주가 46개 세워졌다. 신전의 어느 부분도 직선을 이루지 않는 것이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부분들이 완만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 아름다운 신전을 터키군이 탄약 창고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리스군이 차마 신전을 폭파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군대가 쏜 대포가 신전에 떨어져 사흘 동안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한다. 유네스코(UNESCO)는 파르테논 신전을 인류문화재 제 1호로 지정했다.
        신전 옆에는 서기 130년에 건립한 아티크오데온 극장이 있는데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내려오면 언덕에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이 있는 것을 보며, ‘친구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필로파푸 언덕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파구스(Areopagus) 광장을 만난다.
        기원전 683년부터 매년 귀족 명문가에서 아홉 명의 집정관 아르곤(Archon)이 선출되었다. 아르곤은 임기 일 년을 마친 후 종신 원로원의 회원이 되는데 아레오파구스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해서 원로원을 아레오파구스 회의라고도 불렀다.
        오늘날 그리스 인구의 95%가 그리스도교인이며 5%가 이슬람교도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15세기 이후로 370년 동안 터키(투르크)의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현재 아테네의 인구는 330만 명으로 그리스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수가 본토 인구보다 더 많아 1,200만 명에 이른다. 주산업은 해운업으로 세계에서 2위를 자랑하는데 보유하고 있는 선박의 수가 세계 3위이다.

        국민 총수입 가운데 해양운수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이고 관광수입이 20%이며, 그 외는 교포들이 보내는 송금과 수출로 얻어지는 것이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이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 병원은 누구에게나 무료이며, 교육은 대학졸업 때까지 무료이고, 은퇴한 후에는 누구나 연금을 받는다.
        아테네의 결혼풍습은 특이하여 신부는 집도 장만하고 가재도구도 마련해야 하는 반면, 신랑은 침대 하나만 가지고 오면 된다.
        그래서 여권이 아주 강하며, 딸을 낳으면 부모는 딸의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아들을 낳으면 그렇게 일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출산을 기피하여 매년 인구가 줄어드는 실정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오후 2시가 되면 문을 닫고 낮잠을 자며, 5시에 일어나 다시 문을 열고 장사를 계속한다. 몇 년 전 대통령이 낮잠을 자는 폐습을 없애려고 했지만 국민들의 항의시위에 못 이겨 그 만둔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 1894년에 완공된 경기장은 6만 9,000개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올림픽 경기장은 서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졌다. 중세 로마 시대부터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올림픽 경기는 새 경기장에서1896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올림픽 월계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진다. 아폴론은 다프네라는 처녀를 짝사랑했는데 아폴론이 그녀를 포옹하려고 하자 다프네는 월계수로 변해버렸다.  아폴론은 슬퍼하면서 월계수를 성수(聖樹)로 삼아 나뭇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어 영웅, 시인, 승리한 경기자에게 씌워주었다. 월계수는 올리브 나무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