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수스,카파도키아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 11시 30분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이정도의 시간이면 그렇게 힘든 비행은 되지 않을 뜻 싶다.
비행하는 동안 이코노미석 증후군을 피할려면 물과 쥬스 등 음료를 쉴 세 없이 많이 마셔두는 것이 최상이다. 그리고 1시간에 한번 정도는 일어나서 기내를 걸어 다니는 것도 좋다. 일어났다. 앉았다 옆사람한테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상황을 보아 가면서 최대한 물을 많이 마시고, 가끔 자주 걸어주는 것이 최상이다. “스튜디어스가 귀찮을 수록 나의 여행의 피로는 덜 쌓인다.”
체면이 나의 여행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비타민 C와 죽염을 충분히 먹어 주면 여행의 피로가 덜 쌓인다.
기내식은 주는대로 열심히 먹다보면 체할 우려가 높다. 기내에서 먹을 것이 한정되어있다는 불안감에 사람들은 기내에서 주는 음식을 대부분 다 먹게 되는데, 결국 체증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량을 알아서 조절하는 것도 장기 비행의 요령일 것이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20:25 - 23:35까지 터키 국내 아다나로 가기 위해서 공항에서 체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을 하여서 첫날을 이스탄불에서 체류하는 것이 아니라, 첫 순례지인 다르소에 가기 위해서는 인근의 아다나로 간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을 한다. 환승을 기다리는데 시간표상 거의 3시간정도 기다리게 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공항에서의 환승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지루했던 비행동안 뭉쳤던 근육도 풀어주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고, 공항 내에서 돌아다니면서 eye shopping도 재미가 있다. 어차피 우리가 순례를 하기 위해서는 첫날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현지 가까운 곳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항상 주어지는 상황을 새로움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사물을 보면 시간도 잘 가고, 지루함도 덜어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피곤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하면 성지순례내내 피곤함으로 점철된다. 기쁜 마음으로.... 성지순례의 은총의 충만함으로....
▶이스탄불 공항에서 23: 35분에 떠나서 01:10분에 아다나 공항에 도착한다.
▶아다나 공항 01:10에 도착을 하여 호텔로 이동 후 휴식을 취한다.
아다나 공항은 국내선이기 때문에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을 하여 아다나 공항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며, 비행시간을 그리 길지는 않는 것 같다. 1시간 40분 정도. 새벽 1시면 이집트에 들어갈 때와 같은 시간이다. 말이 새벽이지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아침 8시가 된다. 터키와 우리와는 시차가 7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는 자는 시간에 계속 움직여왔고 어차피 시차 관계로 첫 날 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비행기 안에서 계속 비몽 사몽간에 왔기 때문에 다음 일정을 소화하는데는 그렇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숙소를 배정 받은 후, 잠시 눈을 붙인 후 성지 순례 첫 날을 시작할 수가 있다.
첫날이기 때문에 숙소의 건물 구조를 잘 인지해 두었다가 아침에 혼란을 피하도록 한다.
☞1일차는 비행으로 다 채워진다.
memo : 1일차 (공항,환승,기내식,분위기, team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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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하기에 앞서 꼭 성지 순례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성지를 가지고 있는 터기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 터키 국가 개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위치해 있는 터키는 히타이트에서, 로마, 비잔틴제국, 오스만 대제국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거쳐간 곳이다. 초대교회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 순례객들이 터키를 찾음과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화려했던 이슬람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는 이슬람국가로서 자리 잡았다.
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 경이라고 한다.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터키어는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이다.
터키는 면적이 78만㎡(남한의 9배정도)로서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인구의 약 90%는 터키어를 사용하며 KURDISH, ARABIC, GREEK, ARMENIAN 등을 소수가 사용한다. 종교는 99%의 모슬렘(대부분 SUNNI파)과 1%미만이 그리스 정교, 유태인들이다.
기원전 2000년에 소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철기민족인 히타이트족은 그들의 동부 이웃 민족인 수메르족에게서 배운 법체계와 정부 조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했으며 현재 터키의 근간을 이루었다. 11세기 셀주크 왕조가 세워지면서 지금의 터키 문화의 근간을 세웠지만 그 이전에는 비잔틴 제국이 지금의 터키땅을 지배했으며 많은 기독교 유물을 남겼다.
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문제발생시 적극 도와주려 한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갖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수도 : 앙카라(Ankara, 260만명)
◈인구 : 약 6천 785만명(2000년 기준)
◈면적 : 779,452㎢ (한반도의 3.5배)
◈주요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즈밀(Izmir),콘야(Konya)
◈주요민족: 터어키(Turkish,90%),쿠르드(Kurd) 및 아랍(Arab, 10%)
◈주요언어: 터어키(Turkish,90%), 쿠르드어(Kurdish) 및 아랍어(Arabic,10%)
◈종교: 전국민의 98%가 이슬람교도(수니파)이며, 그밖에 기독교, 유태교, 그리스정교 등
◆ 위치와 면적
터키는 흑해와 지중해 사이. 서쪽으로는 따뜻한 에게 해와 동쪽으로는 만년설이 덮인 아르산을 끼고 자리잡은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소아시아(Anatolia)반도와 유럽 대륙의 남부인 트라키아 (Tracia)의 일부로 이뤼진 땅 덩어리 이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량적 위치에 있으며 면적의 97%는 아시아에 3%는 유럽에 속한다. 이를 구분하는 것이 보스 포러스 해협으로 북쪽으로는 흑해, 남쪽으로는 말마라 해를 연결한다. 터키는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 기후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터키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변화무쌍한 기후대가 나타나곤 한다. 흑해 연안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경험할 수 있다.
기후는 4계절이 뚜렷한 나라이나,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서와 남부에는 겨울에도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온다. 이스탄불의 여름 평균기온은 28-30℃ 정도이고, 겨울 평균 기온은 10-12월이 7-15℃, 1-2월에는 3-9℃정도이다.
☞ 표에서 보듯이 1월은 우기에 해당이 된다. 우리처럼 장마철인데,
장마비처럼 내리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일정에 지장을 줄만큼은 아니라고 한다.
■ 일반 정보
◆ 통화
화폐의 만성적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터키 정부는 2005년 1월 1일부로 1백만 터키 리라를 1 신 터키 리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2005년 1월 1일부터 화폐 액면단위가 현재보다 100만분의 1로 바뀐 새로운 화폐가 구 터키 리라와 함께 통용되고 있다. 은행 근무시간은 08:30-12:00, 13:30-17:00(월-금요일)이며, 은행이나 환전소(Kambiyo)에서 환전하면 된다.
◆ 전압
터키의 전원은 220V
◆ 전화
터키의 공중전화는 연결이 나쁘기 때문에 전화를 사용할 때에는 수화기들어 신호음을 확인 한 후에 다이얼을 돌린다. 터키의 우체국을 PTT라고 하는 황색 간판으로 표시된다. PTT의 국제전화를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전화를 사용할 있다.
00(국제전화)+82(한국 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상대방 전화번호 수신자 부담을 이용한 전화번호는 00800-828282을 이용한다.
전화카드식 공중전화와 제톤(jeton)이라고 불리는 코인식 공중전화가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3가지 종류의 코인과 전화카드는 우체국이나 가판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 국제통화를 해야 할 경우 우체국의 국제전화 서비스를 이용하면 가장 저렴하게 통화를 할 수 있다.
☞ 한국으로의 전화
-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 0 또는 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 필요)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집전화번호
- 공항 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경우: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 한국으로의 수신자부담 신청번호: 00800 + 828282 +전화안내원이 나옴
◆ 우편
PTT (Post, Telephone, Telegram)라고 씌여진 노란색 간판이 걸려 있는 곳이 우체국이다. 일반 우체국의 경우 영업시간은 08:30-12:30, 13:30-17:30 (월-금)으로 일반 관공서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08:00-24:00 (월-토), 09:00-19:00 (일)까지 영업을 하는 특별우체국도 소수 있다.
일반, 등기, 속달 우편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시내 우편물의 경우 배달기간으로 보통 3, 4일이 소요되며 한국까지는 2주 정도가 걸린다. 간혹 일반 우편물의 배달이 지연되거나 분실되는 등의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 현지 연락처
▣ 주 터키 상주대사관
주소:Cinnah Caddesi(진나 자데시) Alacam Sokak No. 5 06690 Cankaya(창카야), Ankara, Turkey
전화: 312-468-4822∼3 FAX: 312-468-2279
▶우리가 순례하는 코스를 따라서 선으로 연결해 보았다.
■ 터어키 약사
<터어키의 기원>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남부에서 기원한 터어키 민족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혹은 돌궐족)이며,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어키의 Teoman Yabgu 왕국을 중국인들은 "흉노"라고 불렀다.
터어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고대국가 시대>
터어키 국토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연계하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여 왔다.
- BC 5000-1500년 : 청동기 시대로 도시국가 생성, 발전
- BC 1500-1200년 : 히타이트(Hittite) 시대
- BC 1200-220년 : 동부 Urartus 왕조와 서부 Phrygia 왕조가 융합, 중부에는 히타이트 도시국가 잔존
- 4세기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 융성
튀르크(돌궐)족은 기원전 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룩하였는데 이중에는 그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다.
10-11세기경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 셀주크제국 건설
<오스만제국 시대 (1281-1922)>
오스만제국은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년 유럽에 진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Sultan Mehmet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들어섰다.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다.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 지역까지 축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1920.8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Mustafa Kemal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7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공화국 시대 (1923 - 현재)
1923.10.29 케말파샤, 군주제를 폐지하고 터어키공화국 선포
1965.10. Demirel의 정의당, 총선에서 승리, 보수정부 수립, 1971년까지 집권
1971.3. 근로자 파업, 학생 및 노동자 소요의 파동으로 군부가 개입, Demirel 사퇴
Demirel 총리 사퇴 이후 1973.10까지 군부 감시하에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실시
- 계엄령 실시와 모든 좌익 활동의 가혹한 탄압 등 강력한 반공정책 실시
1980.9 Kenan Evren 터어키군 총참모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무혈 군사혁명을 주도, 국가안보회의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을 잠정 폐지시키는 동시에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1982.11 Evren 국가안보회의 의장, 국민투표로 정권 장악
1983.12 Ozal의 조국당 집권(군사정부 수립후 3년만에 민정 이양) 이후 정도당(DYP),
조국당(ANAP), 공화인민당(CHP) 등이 정파 이익에 따른 상호 연립내각의 구성·
해체를 반복함으로써 빈번한 정권 교체
1996.6 이슬람계 복지당(Welfare Party : RP)이 주도하는 Erbakan 내각 성립
군부의 개입으로 97.6 Erbakan 내각이 붕괴한 후
1997.7. 조국당(ANAP)이 주도하는 Yilmaz 내각 출범
98.11 Yilmaz 정권이 부패 연루 혐의로 국회의 불신임에 의해 퇴진한 후
99.1. 민주좌익당(DSP)의 Ecevit 주도하 제56차 내각 출범
99.4.18 총선 실시후 민주좌익당(DSP) Ecevit 당수를 총리로 한 민주좌익당(DSP),
국가행동당(MHP), 조국당(ANAP)간 3당 연정하 제57차 정부 출범
2000.5월 임기가 만료되는 Demirel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을 추진하였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어 현행 헌법 규정에 의거 Ahmet Necdet Sezer 전 헌법재판소장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 현지 교통
☞ 항공
터키 에어라인(TK)은 이스탄불을 기점으로 앙카라를 통과하여 터키의 주요도시로 운항한다. 이외에도 이스탄불을 기점으로 국내 여러도시로 운항하는 이스탄불 에어라인(IL)이 있다.
*터키항공 TURKISH AIRLINES
- 홈페이지: http://www.turkishairlines.com
☞ 버스
버스와 돌무즈(미니버스)는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더군다나 가격 또한 상당히 저렴하다. 터키에서는 터미널을 오토가(Otogar)라고 한다. 주요구간이 450 터키리라 정도이며 정류장에 있는 판매소에서 미리 표를 구입한 뒤에 승차하면 된다.
☞ 철도
철도 또한 터키의 보편화된 여행수단이다. 시외로 나가고자 할 경우에는 철도 및 장거리 버스, 보트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시르케시역에는 유럽방면의 철도가 도착, 출발하고 있으며, 시르케시역 구내에 철도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다. 아시아 방면으로 운행되는 열차를 이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하이다로 파사역으로 가면 된다.
1등석과 침대칸은 미리 예약을 하여야만 한다. 티켓은 철도역과 대도시 우체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버스]
터키의 도시에서 대중교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시내버스이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것과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 두가지가 있는데 요금은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개인회사의 버스는 안내원이 요금을 직접 받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은 버스표를 요금함에 넣는다.
터키의 독특한 교통수단으로 '돌무시'라는 것이 있다. 대략 15명 내외가 탈수 있는 미니버스로 정류장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 손님이 있으면 세우고 내려준다. 돌무시는 거리에 따라 요금을 다르게 받으며 일반 버스보다는 저렴하다.
터키 내에서 장거리로 이동할 때 국내선 외에 주로 이용되는 것이 시외 장거리 버스인데 유럽의 기차보다도 나은 수준이다. 버스는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버스 회사에 따라 다양한 스케줄을 제공한다. 먼 거리를 이동하므로 시간과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야간 버스를 이용하는 배낭여행객이 많은 편이다.
☞[전철]
전철은 이스탄불에만 있으며 노선이 다양하지 못해 대부분의 여행객은 전철보다는 버스를 이용한다. 요금은 대중교통 수단 중 가장 저렴한 편에 들며 역 근처에서 토큰을 구입해서 이용한다.
☞[택시]
터키의 택시는 현지의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이용해 볼 만하다. 하지만 길에서 택시를 잡기는 쉽지 않으며 관광지 주변에 서 있거나 혹은 숙소에서 전화로 불러서 이용한다.
택시와 돌무시 버스의 중간 형태로 돌무시 택시가 있는데 대략 10명 정도가 탑승 할 수 있으며 요금은 돌무시 버스보다 비싸고 택시보다는 저렴하다. 손님을 태울 때는 아무곳에서나 서지만 일단 손님을 태우면 목적지까지 직행한다.
■ 여행 길잡이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나는 교차로,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이다. 그리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만난 곳이다. 그래서 문화의 혼합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터키는 의미 깊은 곳이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바울이 소아시아 전도여행을 갔던 지역이며 많은 사도와 성인들이 이곳을 지나쳐 갔다. 물론 그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강성하면서 완전히 이슬람 문화에게 점령 당했지만, 아직도 터키 곳곳에서는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두가지 관점에서 우리는 터키를 여행하면 좋을 것 같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며 이슬람 문화를 다시 경험 할 수 있는 나라, 터키이다.
가장 극명하게 그 혼합된 양상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성소피아사원일 것이다. 성화와 코란이 공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터키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도 모른다. 역사는 변한다. 그 누구도 예측불허로 변화한다. 그 변화의 흔적들을 이곳 터키에서 발견해 보자.
여행적기 : 터키는 기후조건이 온난한 지대에 자리하고 있지만 지형의 다양한 특성 및 해안과 평행으로 뻗은 산맥으로 인하여 지역에 따라 심한 기후차가 나타나기도 한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봄(4월~6월)과 가을 (9월~11월)이다.
4월부터 10월에 걸쳐 즐길 수 있는 지중해 연안과 흑해에서의 해수욕은 터키여행의 독특한 매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터키특유의 어촌정경,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고고학측면의 흥미로운 수수께끼들, 해안지대 특유의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모두 즐길 수 있다.
흑해 연안부 지역은 사계절 내내 늘 따뜻한 곳으로 푸른 녹음과 휴양에 최적한 날씨가 계속된다. 이스탄불과 마르마라 해안지역으로부터 이즈밀, 에게해, 안탈야지방을 넘어 동부지역과 지중해지역을 찾는 겨울여행에도 기후에 따른 장애요소는 전혀 없다.
여름 해수욕의 즐거움, 고원에서의 산보, 야외스포츠를 통하여 터키의 여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중앙아나트리아는 중앙아시아 건조 초원지대 특유의 기후가 함께하고 있는 곳으로 여름에도 서늘한 날씨가 계속되어 터키의 고대역사적 유물들을 손쉽게 둘러 살펴 볼 수 있으며 겨울에는 주야를 통해 스키를 즐길 수 있다.
■ 관광제안
터키의 요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더욱 맛있는 요리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침은 빵 두 조각에 수프와 차를 마시는 정도로 한다.
차는 홍차맛과 비슷하지만 끓이는 시간과 넣는 향료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
빵은 에크멕과 피데라고 하는 두 종류의 빵이 있는데, 바게트 모양과 비슷한 피데가 식탁에 자주 오르는 편이다. 식당에서 에크멕이 자주 오른다.
점심은 육류에 샐러드를 곁들여서 먹는다.
저녁은 가족이 함께 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수프, 육류 음식, 밥, 마카로니, 만두의 일종인 뵤렉을 먹고, 후식으로는 과일, 과자를 먹는다.
터키 요리는 향신료와 향미 야채가 많이 들어간다. 대표적인 소스는 토마토 소스인데 음식점에 가면 빨간 빛깔의 요리가 눈에 띄는데, 이것은 익힌 토마토를 넣고 끓인 양고기와 콩 요리이다.
딜이라는 향채나 고추를 넣어 매운맛을 내고, 고추는 양파와 함께 고기 요리에 넣는다.
흰색 치즈와 요구르트도 빠질 수 없는 향신료이다.
대표적인 요리는 케밥과 쿄프테로 케밥은 고기 산적의 일종으로 소금과 후춧가루를 사용한다.
섭조개 요리는 섭조개가 아닌 팔라프(밥에 고기, 새우를 넣고 버터로 볶은 음식)가 가득 들어 있으며 먹을 때 레몬 즙을 곁들여 먹는다.
■ 주의사항
○ 종교적 민족적인 특성을 존중하자
터키민족은 애국심이 상당히 강하다. 이는 물론 어느 국가에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그들의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이로 인해 터키인과의 사이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그럴 때에는 즉시 사과하도록 하자.
○ 지역적으로 조심해야 하는 지역
터어키의 정세 및 치안은 대체적으로 안정되어 여행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으나, 터어키 동부 및 동남부 지역(이란·이라크·시리아 접경지역 22개주 중 4개주는 비상사태 선포중)에는 쿠르드(Kurd)족들이 대정부 테러활동을 전개하고 있어 이 지역 여행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o 군사시설에 대한 불필요한 접근 및 사진촬영 금지
o 비상사태 선포지역(4개) : Diyarbakr, Tunceli, Hakkari, rnak
○ 동남부 국경 접경지역은 여행 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자동차 여행시 국경 도로 외에는 여행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외국 언론인들의 동남부지역 취재는 사전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 소매치기에 유의하여야 한다. 특히 관광지역 또는 기차 객실내에서 친절을 가장하여 접근하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마취약을 탄 음료수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배낭여행자 주의)
○ 자연 환경 면에서는 이스탄불 부근 흑해에서의 수영은 삼가도록 한다. 강한 역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터키에는 여는 중동국가들처럼 전갈과 뱀, 모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의하는게 좋다.
○ 터키 남성들은 동양여자에 대하여 사교적인 편으로 추근거리거나 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지만 화를 내어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못 들은 채한다. 터키 국부로 아타튀르크는 신격화되어 있으므로 욕설, 비판, 훼손해서는 안 된다.
○ 기념품을 사는 경우에 백화점, 상점에서 가격에 대하여 정찰제를 고집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부가가치세로 10-15%을 포함하고 있어 5% 할인을 받을 수 있다.
○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나라가 터키이다. 여름에는 얇은 옷인 여름 옷을 준비하고, 겨울철에는 우리나라 겨울보다 따뜻하지만 동부로 갈수록 점점 추워지기 때문에 두터운 옷을 준비한 것이 좋다.
○ 터키인에게 식사를 초대 받았을때는 최연장자가 "아피에 올순(Afiyet olsun: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먹지 않는다.
▶2일차 : 아다나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08:00 조식 후
아다나는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여기서 버스를 타고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이스켄데룬이란 도시가 나온다. 구약 성서에 큰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곳이다. 예언자 요나는 여호와로부터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그곳이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명을 회피하고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나다 태풍을 만나고 사공들에 의해 바다 속으로 던져진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 먹혀 뱃속에서 3일을 지내다 육지로 토해진 후에야 여호와의 계시를 실행한다. 기사회생한 요나의 전설이 서려 있는 이스켄데룬은 현재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 도시다.
☞아다나에서 타르수스까지는 33km 정도이다. 타르수스에서사도 바오로의 우물, 클레오파트라의 문을 순례한 후 카파토키아로 이동을 한다. 타르수스에서 카파토키아까지의 직선 거리가 200km에 이른다. 사이에는 2100m가 넘는 산도 있다. 이코스를 버스로 넘을 때 제법 힘이 들것 같다. 직선 거리 200km이면 터키 도로 사정으로 약 3시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싶다.
아다나 공항 근처 호텔에서 숙박을 한 후 조식 후 다르소로 차편으로 이동을 하는가 보다. 일정표를 보면 이제부터 그리스까지는 계속해서 버스로 이동을 하게 된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과정이 일정표상으로는 애매함.
☞타르수스와 아다나는 직선 거리로 약 33km의 거리다. 위성사진으로 험한 코스는 아닌듯...
☞인공위성에서 본 타르수스와 아다나, 아다나 지명 옆에 아다나 공항 활주로가 보인다.
◇바오로사도의 고향1
♣1.다르소(타르수스); 바오로 사도의 생가터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파견대장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타르수스) 출신의 유다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이다.”(사도21.39) 라고 해명했던 도시이다.
이곳은 바오로 사도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지명은 초대교회당시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별로 없는데 다르소(타르수스)는 기원전 600년경에도 현재의 이름으로 불러진 기록이 있다. 초대 교회당시 다르소(타르수스)는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평지(분지)를 이루고 있다
다르소(타르수스)는 길리기아의 옛 수도로 이 지방의 동쪽, 비옥한 지대인 ‘길리기아 페디아스’의 주요도시이다. 다르소(타르수스)는 터키의 남쪽, 소아시아의 남동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길리기아 관구 내에 있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길리기아의 주요도시로 다르소(타르수스)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남부 도시이며, 지중해로부터 약 19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다.
다르소(타르수스)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선 B.C. 3000경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사시대의 신석기시대로 소급되어지는데, B.C. 3000경에 다르소(타르수스)는 이미 요새화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르소(타르수스)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B.C. 400경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점령했다가(B.C. 401에는 앗수르와 바빌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사라졌는데, 그때 당시 크세노폰이 쓴 원정기에 다르소(타르수스)가 언급된다.)
그 뒤에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B.C. 200경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게 되었고 그 중에는 사도 바오로의 조상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B.C. 104에는 로마가 다르소(타르수스)지역에 침투하였고, 따라서 다르소(타르수스)는 B.C. 65에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쪽 끝의 모든 민족들을 정복함에 따라 로마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B.C. 50경, 다르소(타르수스)가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시세로가 총독으로 있을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B.C. 41에는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조공을 받기 위해 다르소(타르수스)에 있었는데, 이 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 문’을 세웠다. 그 문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A.D. 641에 아랍이 침입하여 이 도시를 파괴했으며, 1086에는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점령하여 1097년 십자군들이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 이 도시를 지배했고, 결국 다르소(타르수스)는 16C에 오스만 투르크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터키의 한 도시 ‘테르수수’라고 불려지고 있다.
현재, ♣아다나 공항에서 왼쪽으로 40km떨어진 곳에 다르소(타르수스)가 있으며, 인구는 8만 정도 된다. 길리기아 평원의 비옥함은 다르소(타르수스)에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특산물은 직조와 천막 제조업이다(바오로도 천막을 제조하는 직업적인 기술을 가졌으며 전도 활동 중 생활수단으로 이 기술을 사용했었다.). 다르소(타르수스)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중앙 소아시아 사이에 무역을 하는 중요한 상업 지역이며 옥수수, 면, 양모, 가죽 등의 수출로 유명하다. 주전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길리기아를 통해 페르시아 정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다르소(타르수스)는 동, 서양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사도 바오로 시대에는 다르소(타르수스)가 대학도시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니 헬라 철학과 문화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던 다르소(타르수스)는 아테네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학문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르소(타르수스)는 사도 바오로의 출생지로 사도행전에만 5회 언급되었다(사도 9:11, 11:25, 21:39, 22:3 등)
1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9:11 |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
2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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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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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21:39 |
바오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 청컨대 내가 저 백성에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
5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22:3 |
▶memo 다르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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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도바오로의 우물(여행사)
바울의 집은 클로오파트라의 문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인 ‘예니 자미’란 모스크 근처에 있다. 철문 안에 매표소가 있고 40∼50평쯤 되어 보이는 정원이 깔끔하게 가꿔져 있는데, 집 안에는 바울이 사용했다는 조그만 우물과 하얀 수염이 그려진 바울의 초상화도 보인다. 지름이 1m도 안 되는 우물은 깊이가 35m로,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고 있다.
▶ 사도 바오로의 우물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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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 생가 터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우물.
♣클레오파트라의 문(여행사)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7년부터 A.가비니우스의 부하로 동방원정(東方遠征)에 종군하여 무훈을 세우고, J.카이사르의 갈리아원정 때는 그의 부장(副長)으로 신뢰를 받았다. BC 49년 호민관(護民官)이 된 뒤부터 로마에서 활약하였고, 카이사르 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는 은의(恩義)를 입은 카이사르의 한 팔이 되어 그를 도왔다.
BC 44년 콘술(집정관)이 되고, 그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유언장을 발표하였다. 추도연설에서 민심을 선동하고 암살자들과 타협하면서 그들이 실권을 장악할 길을 봉쇄하는 한편, 동시에 카이사르의 세력기반(로마의 대중 ·병사)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출현으로 그의 지반이 잠식되고, 이에 편승한 공화파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합법적으로 허용된 북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일마저 실패, 결국 남프랑스 지방으로 피신해 카이사르의 유장(遺將) M.A.레피두스와 합류하였다. BC 43년 말에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국가건설 3인위원’으로서 제2차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성립,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BC 42년 필리피전투에서 M.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이기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이름을 떨쳤다. BC 40년 삼두정치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BC 37년 그 임기를 연장하여 동방원정에 전념하였다.
BC 30년대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하는 5인의 왕의 대(大)패트런(Patron)이 되었고, 로마 지배하의 여러 주(州)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아 디오니소스의 신(神)으로 숭배받았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실각한 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둘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를 아내로 맞았으나, 이집트를 중시하여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아내로 삼아 그녀와 그의 아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나누어 주는 등, 그녀와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등 고국의 신임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결전을 벌였다. BC 31년 악티움해전(海戰)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쳤는데, 다음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삼두정치에서는 항상 우위를 유지하였고 동방원정도 로마의 국가적 요구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이집트에서의 그의 방종이 지나쳤고 대웅변가 M.T.키케로를 적으로 만들어, 패배자로 끝을 맺고 말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왕국을 살리기 위해 소아시아(터키)와 이집트를 지배하던 안토니우스 편에 붙는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군대를 이끌고 온 곳이 바로 타르수스였는데, 전쟁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가슴을 독사가 물게 하여 자살하고 만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바울의 고향에 있다고 해서 언제부턴가 ‘바울의 문’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문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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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버가(PERGA) : 다르소 인근 도시.(성지 코스와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다)
1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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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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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4:25 |
버가는 안탈야 부근의 지역으로 지중해에서 10km떨어진 곳이며 사도바오로와 바르나바의 1차 전도여행도중 밤빌리아 지방에 도착한 첫 성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마르꼬복음의 저자 마르꼬요한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 곳이다.
이로한 일로 인해 2차 여행 때 마르꼬가 사도바오로가 데리고 가지않겠다고 하여 바나르바와 갈라서게 되었다. 이렇듯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오로와 요한도 후에 절친한 동역자로 복음의 일을 잘 감당하였다. 버가 지역에 산재한 그리스 시대와 로마시대 유적들, 비잔틴 교회의 유적, 투기장과 극장터등을 통해 예전에 번성을 누렸던 도시의 일면을 찾아볼수 있다.
☞버가(페르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아스펜도스 노천 극장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A.D.161-180 재위) 만들어진 것으로 그 웅장한 로마시대 건축물을 느낄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자밥이 되기도 했던 슬픈 장소이기도 하다.
☞지도에서 볼수 있듯이 우리의 순례 코스와는 반대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바오로의 전도여행에 나오는 지역이어서 참고 자료로 알아본다.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가파도키아에 이른다고 한다.
☞타우루스 산맥 : 터키는 전지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132m의 산악국가로서, 국토의 약 1/5만이 해발 500m 이하이다. 북쪽에는 폰투스 산맥이 있고 남쪽에는 타우루스 산맥이 솟아 있다. 동서로 뻗어있는 타우루스 산맥은 동부에 있는 질로다이(4,116m)가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또한 타우루스 산맥을 기준으로 남쪽 산에는 작은 나무라도 있는데 반해 북쪽은 거의 나무를 볼 수가 없다. 산에는 바위와 돌들만 보인다.
길이는 800km이다. 최고봉인 에르지예스산(3,916m)과 해안 근처에 알라산(2,305m) 등의 고봉이 솟아 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세이한강(江) 하류의 평야로 통하는 안부(鞍部)는 예로부터 ‘실리시아 관문(關門)’으로 불리는 교통로로서 현재는 횡단철도가 통한다. 세이한강에서 동쪽은 안티토로스산맥으로 불리며, 아르메니아 산지에 이어진다.
▶ 2일차 memo 아다나 - 다르소 - 사도 바오로의 우물 - 클레오파트라의 문 -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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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소에서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이 산맥을 통과한다고 하니, 차 멀미에 대비해야 한다.
☞아다나에서 다르소로 해서 카파토키아까지의 여정이다.
카파토키아는 가이사르 아래에 있는 도시다.
☞아다나 - 타르수스 - 카파토키아의 여정이다. 위쪽 작은 원이 카파토키아다.
▶ 카파토키아에 도착 후 휴식.
아침에 아다나 숙소에서 일어나 출발하여 직선거리 30여 km에 이르는 타르수스에 도착하여 바오로 생가 터와 클레오파트라 문과 타르수스를 순례하고, 카파토키아에 이르는 여정에 불과하지만, 차타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제 3 일째
☞카파도키이아에서 하루 종일 이 지역을 순례한다. 괴로메 골짝기, 야외 박물관, 샌들교회,암흑교회,뱀교회, 사과교회, 버클 교회, 데브란트 계곡, 퍄샤바계곡, 데린쿠유를 순례한 후. 이고니온으로 이동을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이고니온(콘야)까지는 직선 거리로 180km에 이른다. 이고니온에서 숙박을 한다.
♣4.카파도기아(지역:여행사)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었으나 차차 속국, 속주로 독립성을 잃어갔다. BC 6세기의 문헌에 의하면 당시 카파도키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카파도키아는 BC 190년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셀레우스 왕조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이후는 로마에 충성을 바쳤으며 11세기까지 동로마제국의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동서 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대상들의 교역로로 크게 융성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로마시대 이래 탄압을 피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기암에 굴을 뚫어 만든 카파도키아동굴수도원이 남아 있다. 약 3백만년 전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뒤덮고 있으며,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카파도키아.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 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습성을 지닌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를 깍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이 지역 거주민에게 더없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깍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 생각될 경우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을 뿐 아니라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이다.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섯집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1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2:9 |
|
2 |
신약성경 |
베드로1서 |
1:1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
카파도키아가 신약 성경 가운데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사도 행전에서의 일이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는 멀리 소아시아 지역인 카파도키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한다(사도행전2,9)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것을 증거하던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고국에 돌아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살게 된다.
로마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까타콤베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게 되었을 때 카파도키아는 수도원 운동으로 교회사에서 또 하나의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다. 카파도키아에서 수도원 운동을 하며 삼위일체를 변증했던 유명한 카파도키아 신학자 성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 나지안누스가 바로 그들이다.
성바실리우스(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아테네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Caesarea)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는 가이샤랴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으며 유복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주님을 만난 후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수도원이란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이곳에서 기도하며 영성 훈련을 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당시 앞서가던 이집트의 여러 수도원들을 순례하며 그들의 수도원 생활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하는 수도사들은 하루에 세끼 가훈데 두끼를 먹고, 다른 한끼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노동과 영성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도원 운동은 이후 유럽의 클루니 수도원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수도사들이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삶을 같이 나누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 운동과 프란치스코 수도원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는 당시 카파도키아와 가이사랴에 있는 교회들을 위협하고 있는 아리안 주의로부터 교회를 지켜온 위대한 신학자였으며, 그의 친구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우스(Basilius)와 미래의 황제 율리아누스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우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돕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우스(Arius)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교회학자’로 불린다.)는 심오한 영성 신학으로 인하여 동방 정교에서는 그를 최고의 성인으로 불렀다.
카파도키아는 7세기 아랍인들이 소아시아를 점령하게 되자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다시 지하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을 힛타이트인들이 기원전 12세기에 몸을 피신하기 위해 파놓은 59m 나 되는 지하 도시를 개조하여 중간 지점에 십자가 형태의 교회를 만들고, 성찬을 위해 포도주 공장과 저장소 그리고 숙소와 곡식 창고, 지하로 피신하기 위해 거대한 돌문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희미한 불 빛 속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성찬을 하며 주님을 먼저 믿고 하늘 나라에 간 성인들의 모습을 동굴 벽에 그렸던 것이다.
이곳 지하 도시를 방문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명소는 지하 도시 출구에 가깝게 위치한 신학교와 세례터이다. 이러한 극심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지하 도시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왔고 훈련된 복음 전도자들이 인근 각처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는가 하는 것은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카파도키아가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07년 프랑스 예수회 신부가 우연히 이곳을 방문하다가 그간 사장되어온 지나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전 세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카파도키아는 1923년 이곳을 지켜왔던 그리스인 수도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비어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카파토키아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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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괴뢰메골짜기(여행사) : 전일을 카파도키아를 순례한다.
☞윗 부분 타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순례할 괴로메 지역 지도상으로 볼 때 괴로메 지역번호를 숫자로서 구분할 정도로 괴로메 지역이 광범위하다.
아래 원안에 있는 표시들은 Uschair라는 동굴도시 표지이다.
☞괴뢰메 란 뜻은 '보이지 않는' 이란 뜻으로 기독교 박해자들을 피해 눈에 띄지 않는 지하나 동굴 속에 피해 신앙생활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네브쉐히르(Nevschir) : 해발 1260m에 위치하고 있는 네브 쉐히르는 오늘날 카파도키아의 중심지이다. 페르시아어로 ‘신 도시’란 뜻을 가진 이 도시는 언덕 위에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성이 있다.
과거 이곳을 칩입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된 이 성은 이후 셀죽 시대와 오스만 터키 시대에도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 도시에서 남쪽 방향에 위치한 지하 도시인 데린쿠유로 가다 보면 언덕 위에 진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1923년 카파도키아의 성지에 남아서 기도와 명상 생활을 하던 희랍 정교회에 속한 그리스인들이 터키 정부와의 외교 조약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됨으로써 마을 전체가 비게 되었다. 그럼에도 저들이 살던 마을에는 아치 모양으로 된 오래된 교회들과 아담하게 돌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남아 있다.
앙카라에서 네비쉬르를 거쳐 가다보면 ♣괴레메라고 불리는 카파도키아의 마을이 하나 나온다.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찾는 명소이자 제일 기억에 남는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이 곳은 데린구유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으로 나있는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교회들 대부분은 건축시기가 9세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려진 성화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들 성화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괴레메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괴레메 야외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주차장의 왼쪽에 있는 것이 ♣Tokali Kilise(BUCKLE 교회)로, 특히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처음에는 이곳 건물들의 겉모양이 약간 이상하다 생각될지도 모르나 워낙에 부식이 잘 되는 특성을 지닌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서서히 진행되는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공적인 보호막을 입힐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한다면 쉽게 수긍이 될 것이다.
네브 쉐히르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괴뢰메는 파노라마 계곡에서 보면 수천 개의 굴뚝 모양과 조그만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산줄기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조그만 분지 형태로 365개의 수도원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괴뢰메는 1세기에 카파도키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카이세리와 더불어 이 지역의 중심 도시였다.
▶카파도키아 여행의 백미 - 괴뢰메 (GOREME) 야외 박물관
카파도키아 관광의 하일라이트로 손꼽히는 곳으로 빼곡이 뚫려있는 돌 구멍들은 과거 로마인의 박해를 피해 옮겨온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성스런 교회이기도 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괴뢰매 타운 곳곳에 있는 동굴 팬션에서의 일박은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한번쯤 경험 해 볼만한 즐거움이 있다.
이 마을을 등지고 뒤로 돌아 약 1Km만 걸으면 과거 그리스도의 애환과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괴뢰메 야외 박물관이 나온다. 일단 눈에 보여지는 규모와 경관이 압권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성 바르바라 교회가 나온다. 군인들의 수호신인 바르바라를 포함한 붉은 상징과 작은 입상으로 장식되어 있고 옆에는 주요 돔으로 된 지붕의 엘말르 킬레시 (사과교회 )가 있고, 이웃하는 일란르 킬레시 (뱀교회 )의 뱀이 나오는 벽화는 괴뢰메의 다양한 수도원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오른편이 로즈벨리다. 이곳을 스머프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지형에 비해 덜 큰 버섯모양의 기암석이 즐비한 곳으로 석양이 물들 때의 붉은 기운이 꼭 장미의 색을 닮았다고 현지인들은 로즈벨리라 부른다
※여자 수도원(Kizilar Monastri)
괴뢰메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거대한 ♣여자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일반인들에 1, 2층 중 가운데 곡식창고, 부엌과 식당만 공개하고 있으나, 본래 가장 융성했을 당시에는 5층 건물 중 3층에는 예배실이 있었고, 현재 돌로 막아 놓은 4, 5층 안에는 강의실과 기숙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3층으로가는 길목에는 아름다운 성화가 그려져 있는데, 9세기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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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바라 교회(The cuurch of St. Barbara)
이 교회는 중앙에 두 개의 기둥과 세 개의 조그만 성소를 가진 성 바르바라(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이 동정 순교자인 성녀 바르바라임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유력한 어느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은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힌 그녀는 이번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 가서 죽이라고 명하여 그녀는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그녀의 순교지는 안티오키아(Antiochia),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니코메디아(Nicomedia) 그리고 로마(Rome) 등 서로 엇갈린다. 바르바라는 건축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이다.)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교회이다. 바르바라는 기독교의 박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부친의 반대로 감금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녀를 그토록 핍박했던 그녀의 부친은 그 후에 벼락에 맞아 즉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정 중앙에 말을 타고 있는 성인이 두명 보이는데, 이들은 성 그레고리오와 성 테오도르이다. 그리고 이들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 사탄을 상징한 용과 싸우고 잇는 장면이 벽화에 새겨져 있다. 성 테오도르는 로마 군인으로서 흑해 가까운 아마시아에 있는 키벨라 여신전을 불태웠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그려져 있는 새는 악마를 상징하고 잇다.
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성소에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을 축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세 손가락을 펴서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각 벽면에 식물의 나무나 입으로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 다른 교회의 벽화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 memo 성바르바라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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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샌들 교회(carkkll kilise)(여행사)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계곡의 북쪽 끝에 위치, 문 안쪽 바닥에 있는 발자국 때문에 샌들 교회로 이름지어졌다. 내부에 유다의 배신에 관한 그림 외에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괴뢰메 수도원 가운데 가장 많은 성화가 보존된 곳이다. 입구 바로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성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성화 바로 밑에 발자국이 나 있어 이 교회를 일명 ‘샌달’교회라 부른다. 교회의 구조는 정사각형의 면적 위에 두 개의 기둥과 세 개의 성소 그리고 정 중앙의 큰 돔, 벽면의 작은 돔 세 개가 있다.
정 중앙의 큰 돔에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과 천사장들이 있고, 네 귀퉁이에는 사복음의 저자인 마태, 마르꼬, 루카, 그리고 요한이 그려져 잇다. 그리고 입구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정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 왼쪽에 마리아와 오른쪽에 세례 요한과 그리고 아래는 그리스도교의 교부들 가운데 그 유명한 설교가 요한 크리소스토모(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으나,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친구로 후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Diodurus)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Melitius)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어린 간청 때문에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Flavia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90년부터는 신약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황제는 성 요한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난하여 악화되었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성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 후 404년에 황제는 그를 다시 쿠쿠수스(Cucusus, 지금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되자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한은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e)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수도원 원장인 바실리오 그리고 이레네우스(성 이레네우스(또는 이레네오)는 소아시아의 스미르나(Smyrna,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 출신으로 스승인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 주교를 통해 사도적 정통성을 이어받았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130-14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Rome)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이때 성 유스티누스(Justinus, 6월 1일)가 세운 교리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언제 무슨 이유로 프랑스의 리옹으로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에 의하면 성 폴리카르푸스가 그를 프랑스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177년 리옹 교회의 특사로 교황 성 엘레우테루스(Eleutherus, 5월 26일)를 방문하여 몬타누스주의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리옹 지방의 순교자들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가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리옹의 주교 포티누스(Photinus, 6월 2일)가 순교하였으며, 리옹에 돌아온 즉시 그는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리옹 지역의 복음 선포에 열정적이었고, 프랑스 지방의 영지주의자와 피나는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가 쓴 저서가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이다. 그는 이단 사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동시에 초기 교회의 정통 신앙을 확립하였다. 성 이레네우스는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라고 불릴 정도로 2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한 대표적인 교부이다. 그의 저서에는 사도들의 전승이 그대로 담겨 있으며 또 교황 수위권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에 의하면 그는 20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등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앙인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천사들을 정성껏 맞이하는 모습 그리고 성화를 중심으로 벽면 좌우측 위에는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고 타불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가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 그리고 천사들의 안내를 받으시며 승천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초대 교부들을 중심으로 왼편상탄에 있는 성화는 이곳을 찾아온 성지 순례객의 발목을 잡는다. 이 인상적인 성화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나자로를 살려줄 것을 예수께 간곡하게 간청하는 모습과 죽은지 사흘 된 나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예수님과 그 일행 그리고 붕대에 칭칭 감긴 채 죽음에서 나온 나자로와 빈 관을 들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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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암흑교회(karanllk kilise)
프레스코화로 가득 찬 벨리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이 교회는 빛이 많이 들지 않아 11세기 비잔틴 미술이 매우 잘 보전 되었고 Dark Church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11세기 수도원 형태로 지어져 비잔틴 미술의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고 네명의 후원자들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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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뱀 교회(yllanll kilise): 성 오노푸루스 교회 (The church of St. onophrius)
둥근 천장에 11세기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그림이 유명하다. 낮은 천정과 긴 예배당이 있고 예수와 교회를 세운 사람의 초상이 있다.
이 교회는 입구의 좌측에 성 바르바라 교회와 같이 용과 싸우는 두 성인인 성 그레고리오와 성 테오도르의 모습이 벽화에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일명 ‘일란르’(터키어로 뱀의 벽화가 있는)교회라고 부른다. 이어서 새겨진 벽화는 로마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기도의 어머니 헬레나가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입구의 정 중앙에는 삼위 일체를 강조하는 성화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삼위일체를 강조하는 손의 크기가 오히려 얼굴보다 더 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대편 벽면에는 세명의 성인이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으로부터 성 바실리오, 성토마, 그리고 오노푸르스 자신이다. 그런데 오노푸로스의 성화를 보면 매우 아이러니컬한 것을 발견하게된다. 얼굴에는 남성처럼 수염이 있는 가슴은 여성처럼 불룩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오노푸르스는 이집트의 사막에서 한 때 은둔자로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는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어가면 수도 생활을 하였다.그는 본래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났으나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은혜를 입어 죄를 회개하고 난 후, 그는 하느님께 남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늙은 노인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가운데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항상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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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사과 교회(Dlmall kilise)
12세기에 지어진 매우 중요한 교회 중 하나로 잘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인 곳이다. 규모가 작은 편으로 일대의 교회 중 늦은 시기에 지어졌고 십자가 형태로 지어졌다. 바위 속에 돔 모양의 천정과 네 개의 기둥을 만들었다. 최후의 만찬, 십자가 처형, 천사 등을 그린 벽화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그림 속의 가브리엘 천사가 사과를 들고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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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버클 교회(tokali kilise)
버클 교회는 괴레메 박물관 가기 전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수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일생을 받음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성자들의 무덤이었던 홈과 기도를 드린 소경당이 있다. 10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며 이 일대 교회 중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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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색깔을 한 바위들이 물결을 치듯 펼쳐진 데브란트의 별명은 바로 “상상력의 계곡” 울퉁불퉁한 기암 바윗돌덩어리를 보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하는 재미가 있다 악어대가리. ET. 코브라, 성모마리아, 나폴레옹 모자, 그리고 제일로 유명한 것은 바로 보이는 낙타바위다
데브란트란 우리 말로 하면 낙타라고 한다. 낙타 길인데 아마도 두 가지의 뜻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예전의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지나간 길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다른 하나는 낙타바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 데브란트 계곡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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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샤바계곡(여행사)
젤베 (ZELVE) &파샤바 (PASABAG) 계곡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아바노스를 지나 약 3Km 떨어진 곳에 젤베가 있다.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양한 수도원들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파샤바 지역이 백미로 꼽힌다. 이곳의 바위속 동굴 수도원들은 높이가 15-20M로 각기 다른 세 개의 꼭대기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 교회와 수도원들은 대개 성상파괴주의가 성행하던 8-9 세기경에 지어졌으며, 동굴은 그 당시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크리스트교가 함께 살았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회교사원의 첨탑과 상당히 유사한 구조물이 아직까지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종교 문제가 끝난 이후에는 터키인들이 그들의 정착을 위해 집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마저도 오랜 풍상을 견디지 못하고 침식이 되어 결국 1950년 이후로는 거주자가 없고 전체가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퍄샤바 계곡 : 송이버섯을 연상시키는 바위와 3개의 버섯모양바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카파도키아 사람들은 이곳을 요정이 춤추는 바위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바위속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기때문.. 또한 타락하는 종교단체를 떠나서 세상을 등지고 산과 바위로 숨어 들어가 신앙생활을 보냈던 수도사 성 시몬이 거처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수도사의 골짜기라고 부른다
▶ 퍄사바 계곡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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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쿠유(여행사)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인류 문명의 힘 - 데린큐유 (DERINKUYU) 지하도시
데린큐유 지하도시는 1965년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 히타이트 민족, 로마시대 그리고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심지어 원시 히타이트 민족들도 살았다는 증거가 속속 발굴되고 있다. 초창기 히타이트 인들이 지하 1층에 터를 잡았었고 이후 다양한 민족이 시대를 초월해 오면서 살다가 그리스교 박해 때 그 규모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스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동굴로 피하다 못해 급기야 지하에 땅굴을 파고 내려가서 그렇게 수백년을 살았다. 그 규모는 전체 수용인구가 약 7천명에 이르며 지하 8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안에는 학교, 도서관, 시장, 곡식창고, 와인창고에 식당,무기저장고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 Nevsehir에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린구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구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라한 통로 곳곳은 무너져내린 곳도 많지만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 지하 도시는 총 깊이가 55m에 달하는 8층으로 이루어졌다.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이 있다. 십자가 모양의 교회, 지하감옥 및 묘지는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 카파도키아에는 현재 모두 36개의 지하도시가 발견되어 있으며 특히 카이마크리라는 지하도시는 데린쿠유와 9Km나 떨어져 있으면서도 지하 3층의 복도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들 지하도시를 건설하는데 과연 몇 년이, 몇 명이, 그 시대에 과연 이 엄청난 작업을 어떤 기술로 가능했을지, 그들은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 모든게 의문 투성으로 남아있는 데린큐유 지하도시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개장시간 : 매일 오전 8시-오후 5/7시
☞ 입장료 : US$ 2
▶ 데린쿠유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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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도착 후 휴식.
카파토키아에서 하루 동안 순례를 한다. 콘야까지는 직선거리로 180km에 이르기에 버스로 3시간~ 4시간으로 보면 카파토키아를 아침부터 미사하고, 순례를 하고, 점심 먹고 오후 2-3시경에 카파토키아를 떠나지 않을까?
▶ 3일차 memo 카파도키아 - 괴로메 - 샌들교회 - 암흑교회 - 뱀교회 - 사과 교회 - 버클 교회 - 데브란트계곡 - 파샤바 계곡 - 데린쿠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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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 카파도키아에서 콘야까지의 여정이다.
☞카파토키아에서 순례를 마친 후 이고니온, 오늘날 콘야로 이동을 한다.
☞카타도키아에서 konya까지 직선 거리로 180km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