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성지터키,그리스

콘야,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

월요일은자유인 2007. 4. 2. 16:35
 

▶4 일째

♣이고니온(콘야)(지역:여행사: 숙박)   

        <일정표상 이곳에서는 숙박만 하므로 다음 지역 이동 중 이고니온 유적지 한 곳 정도>


☞오늘 일정은 직선거리로 110km 떨어진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로 이동을 한다. 바오로기념 교회를 순례한 후 히에라 폴리스로 이동을 한다.  히에라 폴리스는 Denizli 위쪽에 있는 파묵칼레와 같은위치에 있다. 파묵칼레까지는 170km에 이른다.  인근에 있는 라오디 게이아를 순례하고, 파묵칼레에서 숙박을 한다.

        

☞사진은 바울 기념 성당이다.

        카이세리처럼 콘야도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인들에 의해 이코니움이란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현재 콘야의 인구는 1백만에 가까운 대 도시로 앙카라에 이어 중부 아나툴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콘야는 아나톨리아 셀축의 수도였으므로, 셀축 초기의 훌륭한 터키-이슬람 건축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16 세기에 술탄 셀림 2세 때 건축가 시난에 의해서 지어진 사원 옆에 있다.

        훨링더비쉬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더비시(세마)의 명성 때문에 일 년에도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오는 곳이며, 콘야에서는 꼭 방문해야 할 장소이다. 메블라나와 술탄 베례드의 무덤이 박물관 옆에 있다. 이 박물관에는 메블라나의 숙소에서 사용되었던 많은 흥미있는 물건들과 신비한 악기들, 그리고 손으로 짠 양탄자들이 진열되어 있다. 당신은 또한 더비쉬의 방들과 민속학 부문도 방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콘야에서 방문할 만한 곳들은 다음과 같다. 셀축 시대에 지어진 관심을 끄는 건축물과, 아름다운 타일,그리고 석공 예술이 뛰어난 세 개의 신학교-박물관, 카라타이, 인제 미나렛(첨탑)과 시르잘리, 셀축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트에 의해 지어진 알라딘 사원, 고고학 박물관과 오래된 밀 시장 등 니데 도시 근처에 있는 고대의 실버 수도원은 바위를 파서 만든 특별한 곳이다.        13세기에 세워진 대 무역상들이 묵는 아나툴리아에서 가장 큰 카라반 사라이 술탄 한은 악사라이와 콘야를 잇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아으즈카라한은 악사라이와 네브쉐히르 도로 변에 위치한 무역상들을 위한 또 하나의 거대한 여관이다.

        카이셰리 근처에 있는 조류 보호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새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투스굘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금 호수이며, 터키에서도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콘야 평야에 위치한 중앙 아나톨리아의 오브룩 호수도 볼 만하다.


1

신약성경

사도행전

13: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2

신약성경

사도행전

14:1 

이코니온에서 선교하다

3

신약성경

사도행전

14: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코니온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믿게 되었다.

4

신약성경

사도행전

14:19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5

신약성경

사도행전

14: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6

신약성경

사도행전

16:2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7

신약성경

티모테오2서

3: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해발 1016m에 위치한 이고니온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대 평원과 그 지평선 끝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곡창지대이다. 헬라시대에는 이 도시가 브루기아 지역과 루가오니아 지역에 속해 있다가 로마시대인 글라디우스 황제 때에는 갈라디아 지역에 속한 도시가 되었다. 또한 도시는 성화가 유명하여 이고니온 이란 지명이 ‘성화의 도시’란 뜻에서 기인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일행이 제 1 차 선교 여행시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를 지나 이곳 이고니온에 와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그 후 제 2, 제3차 선교 시에도 바오로 일행은이곳을 방문하여 교회를 더 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복음이 전해지자 이곳에 있는 사탄의 세력이 그들을 괴롭히고 바오로 일행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이야기는 사도 바오로가 믿음의 아들인 티모테오에게 쓴 서신 가운데 잘 언급되어 있다.(2티모 3, 11)

        외경 가운데 하나인 바오로 행전과 테즐라서를 보게 되면 이곳에 복음이 얼마나 널리 전달 되었는지 그리고 핍박 또한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기록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 콘야에 26개의 크고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인적이 드문 이곳 가난한  산골 마을에 단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콘야시내 전경, 원 안이 메블라나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 "콘야(Konya)"

        예전에 이고니온이라 불렸던 콘야는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520,000명의 주민이 사는 터키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는 500KM,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콘야는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다. 하지만 2002년 현재에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터키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 "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useum)"

        메블라나교단은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메블라나 루우미(Mevelana Jelaleddin Alromi: 1207-1273)가 13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수피교단의 한 교파이다. 지금도 푸른 원추형의 탑이 아름다운 메블라나 박물관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교파를 세운 이래 1923년까지 메블라나교에서 성당과 사원등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1923년 터키에서 반종교정책이 채택되어 왕정의 절대지지 세력이었던 메블레냐 교단은 철퇴를 맞게 되어 교단은 헤체되고 메블라나 사원은 폐쇄되었다.
        6,500평방미터의 부지내에 성당과 사원,수행장소등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은 1927년이 되어서야 성당으로 쓰였던 장소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된다.이런 상황은 1950년까지 이어지다가 1950년에 행해진 메블라나 추모행사로 부활을 맞게된다.하지만 아직도 메블라나 박물관은 메블라나의 생활상과 교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쓰일 뿐 사원으로서의 기능은 하고 있지 않다.
        메블라나 교단은 창시자 메블라나의 뜻을 받들어 신비주의적이며 참선중심의 대중적인 교리를 이어가고 있다. 메블라나가 새로운 종파를 세운 이유는 어렵고 형식에 치우친 코란의 율법이 대중들과의 격리감을 가중한다는 판단에서였다.이에 그는 이론적이고 현학적인 교리를 뛰어넘고자 가장 단순한 참선의 형태를 제시한다. 이것이 '사마춤'(Sama Dance)이다. 이 춤은 한 손은 하늘로 하고 다른 손은 땅을 향하여 계속해서 원을 도는 매우 단순한 춤이다. 이 춤은 원래는 "데쉬비"라는 사제들이 추는 춤이었으나 지금은 마블레나 교의 교인이라면 누구나 추는 춤이다. 이 춤은 이 단순한 원형돌기를 3시간 가까이 반복하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각성과 믿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에 가면 메블라나가 남긴 말이 있다.
"알라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함께'(Beraber)가 아니다. 금전의 노예가 되지 말라. 부자가 되지 말라. 꾀를 부려 세상을 살아가지 말라. 성인의 말은 성인만이 알 수 있다"는 구절이다.

        이런 메블라나의 교리를 담은 '사마춤'(Sama Dance)은 지금은 터키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어 매해 12월 첫째 주에는 대규모 사마춤 축제가 콘야에서 벌어진다.

▶memo

 

 

 

 


터키에서 가장 우아한 건축물! 인제 미나레 신학교(Ince Misare Medresesi)

        셀주크시대의 작은 모스크인 인제 마니레 신학교는 돔형의 지붕과 포치을 가지고 있는 기도의 장소였다. 콘야에는 이런 모스크들이 10개가 있다.
        이런 대부분의 모스크들은 내부 건축물들이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몇몇 예외가 있었으니 13세기에 지어진 인제 미나레 신학교라 불리는 이 모스크가 그러한 유형이다. 이렇듯 연관된 구조로 건축된 인세 미나레 신학교의 아름다운 첨탑은 가늘고 길었으나 많은 부분이 무너져 현재는 1/3정도만 남아있다. 타일로 아름답게 장식된 첨탑의 외관은 예전에 두개의 발코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신학교의 기숙사로 쓰였던 건물의 입구부분은 아름다운 매듭 디자인이 기묘하게 얽혀 있어 그 섬세함이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 이 건물은 셀주크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유명해졌다.
        이 건물들은 과거에 학교와 법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학교에서는 법과 의학 그리고 천문학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조각과 부조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memo

 

 

 

 


▶4일째 일정 시작.


이고니온에서 알바츠로 이동해서 순례가 시작된다.

▶이고니온에는 1911년에 프랑스 근로자를 위해서 세운 성 바오로 성당이 하나 있다.


♣알바츠(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여행사:지역) :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 여행지.


☞콘야에서 얄바체까지는 직선 거리로 110km 정도이다.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2시간 이상의 거리가 되지 않을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역사>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는 실루쿠스 1세(BC 321-281)가 자신의 아버지 안디오쿠스의 이름을 따라 세운 도시이다. 비시디아 지방의 안티오키아를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BC 25년에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가 로마제국의 갈라디아 주에 편입되었으며 갈라디아 인들이 이 지역에 많이 살았다. 갈라디아서는 이 지역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 유대인들의 미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오로가 기록한 것이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는 소아시아 남쪽에서 로마 식민지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당시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가이사리아 식민지 (‘Colonia Caesarea')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당시에 이곳에 새로운 도로를 닦고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아시아 통치를 위한 제2의 수도로 정하고 이태리로부터 로마의 정예 부대 3,000 명을 데리고 와서 여기에 주둔시켰다. 아시아의 모든 도시 가운데서 가장 로마화 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당시 주민들은 그리스어를 말했지만 이곳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다. 안티오키아는 로마와 자매도시가 되었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도 로마처럼 7개의 언덕으로 둘려 쌓여 있었다.

        3세기에 안티오키아는 비시디아 주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틴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에서 셀죽 터키가 비잔틴 군사를 이기면서 터키의 공습을 받게 되었다. 1097년에는 첫 십자군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 원정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12세기에 와서 터키가 지배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 당시 1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던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는 13세기 초에 얄바체(Yalvac) 도시가 생기면서 고대 도시 안티오키아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유적지로 남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50평생을 바친 람제이(W. M. Ramsay)는 1911년에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 와서 프린스턴 대학의 도움으로 발굴을 시작하여 많은 건물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터키 독립 전쟁으로 1923년에 돌아갔다. 1924년 미시간 대학의 지원으로 로빈슨의 지도아래 람제이를 포함해서 대규모 발굴단이 다시 발굴을 시작했다. 디베리우스 광장, 신전 문, 서쪽 성문 등을 발굴해 내는 큰 성과가 있었으나 람제이와 로빈슨 간의 의견 충돌로 발굴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미시간 대학은 철수하고 말았으며 안티오키아의 많은 유적은 여전히 땅 속에 묻혀 있다. 20년 이상 안티오키아의 박물관장으로 있었던 메멭(Mehmet Taslialan)의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사도 바오로 교회로 알려진 바실리카 연구 논문은 안티오키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오늘 우리에게 준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발굴된 유적으로는 안티오키아 도시로 들어가는 서쪽문과 중앙 도로, 극장과 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극장에서 건너편으로 보면 사도바오로를 기념하는 큰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여 세운 큰 신전이 도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져 있으며 이 신전은 소아시아에서 하나의 바위를 깎아서 만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신전 앞에는 큰 디베리우스 광장이 있으며 이 광장 앞에 중앙교회 터(바우스 교회와 비잔틴 교회 터)가 남아있다. 람제이는 이 교회들은 사도 바오로가 설교했던 회당 터 위에 지어졌다고 생각했다. 로마시대 도시의 구조는 규모가 비슷한 다른 도시를 살펴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도 버가나 에페소와 같이 로마시대의 여느 도시처럼 삼중으로 된 도시의 문(Triple Gate)을 따라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문밖에 스타디움이 있고, 도시 안에는 신전들과 바실리카(회의 장), 아고라(시장), 극장, 목욕탕, 주거지, 큰 거리, 가게들, 광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의 생긴 모습이 어느 도시나 다 비슷했으며 도시의 크기에 따라서 규모의 차이가 있었다.

☞현재는 Yalvac이다.


▶성경에 나오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위성 사진으로 본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전경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6: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신약성경

사도행전

11:19 

안티오키아에 교회를 세우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27 

안티오키아 교회가 유다 지방의 신자들을 돕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1:27 

그 무렵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2:24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3:13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하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3: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4:19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4:21 

선교를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4: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4: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22 

사도 회의에서 안티오키아로 편지를 보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22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5:35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8:18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8:22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

신약성경

갈라티아서

2: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티모테오2서

3: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3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하다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17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8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9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20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1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2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3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4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5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6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이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이다.‘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34 

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시어 다시는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 것을,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것들을 너희에게 주겠다.’

35 

그래서 다른 시편에서는 ‘당신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가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36 

다윗은 일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나서 잠든 다음, 조상들 곁에 묻혀 죽음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37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그분께서는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38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39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40 

그러니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41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

42 

그들이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

43 

회중이 흩어진 뒤에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본 바오로 설교 4가지의 유형
         ①사도행전 13장,17절부터 22절까지를 보면 바오로가 구약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다. 가만히 보니까 에집트땅에서 나온 사건, 광야에서 40년간 살았던 사건, 그리고 사사를 주었던 사건, 그리고 사울 왕을 세웠던 일, 그리고 하느님에게 합한 왕 다윗을 세운 일까지 나온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오로는 구약을 아주 잘 알았다는 것이다.

        ②그 다음 두 번 째 메시지 23절에서 25절까지이다.
        사도바오로의 관심은 메시야이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약속된 메시아. 그 메시아가 지금 바로 여러분들 앞에 있다는 것이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바오로의 메시지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초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기호만 다면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감옥에 있던지, 어디에 있든지..
        ③세 번째 메시지는 26절부터 37절까지이다.
        다윗은 썩었지만 예수는 썩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의 씨에서 메시아가 나오고 그 메시아가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이 세 번째의 이야기의 주제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다.
        ④네 번째 메시지는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난 바오로는 그 결론을 38절에서 41절까지 말하고 있다.
        결론은 두 가지이다. 이 사람.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런데 이것도 다 구약에서 예언이 되었던 것이고, 무덤에 묻혔다가 너희를 위하여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시고, 이것도 역시 구약에 예언이 된 것인데, 다윗의 육체는 다 썩어버렸지만 이분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이분이 계시는데 이 사람을 힘입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으면 죄 사함을 얻을 것이다.

        38절의 메시지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다윗은 썩었지만 이분은 썩지 않았다. 이분을 믿으면 너는 죄사함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그분의 설교이다. 또한 가지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지 않느냐.

        39절의 메세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것이 결론이다.

        예수를 믿어라. 그분은 죽은 분이 아니다. 그분은 메시아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인데 이분은 죽었지만 죽지 않으셨고 다시 살으셨으며, 이분을 믿으면 구속 곧 죄사함을 얻을 것이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 곧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의 설교이다.

▶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memo

 

 

 

 

 

 


♣바오로 기념 교회 순례(여행사)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이곳만 순례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제 1차 전도 여행 때(45-49년경) 베드게에서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


        미시간 대학에서 제 1차 세계 대전 전에 이곳 유적 발굴 작업을 시작해서 1924년에 일단 끝마쳤다.  도심에는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 초석이 남아 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작은 성당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Optimos, 357-381년경 재직)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작은 성당은 본디 유대교 회장 자리였음이 판명되었다. 터키에서 유대교 회당터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유일하다. 바로 이 회당에서 사도 바오로가 두 안식일에 걸쳐 유대교 동포에게 전도한 것으로 추정된다.(사도 13,13 - 52)


▶ 바오로 기념 교회  memo

 

 

 





☞우측 원부분이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좌측 원 부분이 데니즐리이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데니즐리까지는 직선 거리가 170km에 이르나.....

  데니즐리 위쪽에 히에라 폴리스, 파묵칼레가 있다.


♣히에라 폴리스(여행사:지역)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이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원형극장은 최대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에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과 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신약성경

콜로새서

4:13 

나는 그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또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쪽 원이 히에라 폴리스 지역이고, 아래쪽 흰 부분이 파묵칼레 온천지역이다.

☞아래 데니즐리에서 윗부분 파묵칼레까지는 18km정도인데 지도상으로는 안티오키아에서 파묵칼레로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번영을 누려왔던 히에라폴리스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를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하였고 이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198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백의 솜의 성,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했다. 히에라 폴리스의 유적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이에 아래의 코스를 추천한다.
        번화한 거리를 구경한 후 팔각형의 필립사도의 기념교회를 보고 야외 원형극장으로 가서 아폴로의 부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아폴로 신전 옆에는 '신성한 장소'가 있다. 이 곳에서는 지면에 생긴 깊은 구멍으로 부터 유독한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데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자신들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내용은 '신성한 장소'의 옆에 있는 분수에 기록되어 있다.
        파묵깔레 모텔의 수영장에는 로마 시대의 목욕탕에 있었던 거대한 대리석 석판이 있다. 이를 본 다음에 파실리카로 향해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길을 통해서 비잔틴 시대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기념문을 지나 서쪽에 위치한 로마식 목욕탕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공동묘지를 보면 된다. 이 공동묘지는 2km에 달하며 이 곳에서는 특징적인 몇몇의 묘석 모양을 볼 수 있으며 아나톨리아 전 지역에서도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공동묘지이다.


▶ 히에라 폴리스 memo

 

 

 


♣라오디게이아(여행사)

        라오디게이아는 안테오쿠스 왕의 부인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ALAHSEHIR로 불리는 라오디게이아는 예전에는 에페소와 수리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길이 관통하는 도시였다. 파묵깔레에서 서쪽으로 6.5km, 필라델피아에서 동남쪽으로 72km, 에페소에서 남동쪽으로 16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최고의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이아는 몇번의 대지진을 격게 된다. 현재의 유적지도 대지진으로 인해 모두 땅속으로 함몰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대지진인 AD 17년에도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라오디게이아가 모두 파괴되자 로마에서 도와주고자 했다. 하지만 라오디게이아는 이를 거절하고 순수 라오디게이아인들의 힘만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 정도로 라오디게이아는 엄청난 부를 갖춘 도시였다.

        이런 부의 근본이 된 것은 물론 무역과 통신이었지만 기간 산업인 양모와 목화 또한 주축이 되었다. 이 지역의 양모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양모로서 가격이 높았으며 인기가 좋았다. 이들의 부는 로마의 키케로가 거액의 신용장을 라오디게이아에서 현금화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이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이 곳의 눈병 치료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브루기아가루'라 불린 이 안약은 라오디게이아를 의료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해 준다. 이렇게 발전한 의학은 유명한 의학교가 뒷받침을 해 줬으며 치료의 신 멘카루의 신전 주의에의 거의 모든 약품둘이 거래 되었다.
        이렇듯 엄청난 부를 가진 라디오게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종교적 핍박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으면 경재적 궁핍도 없는 상황에서 포교활동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경제적인 부유함은 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느님을 간구할 필요성을 못느끼게 해 하느님에게 덥지도 차지도 않다하여 질타 받게 된다. 이 질타는 라디오게아에서 6.5KM 정도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가져오면서 식은 미즈근한 물에 비유하여 라디오게아인들을 질타했다고도 풀이된다.
        이렇듯 부유했던 라오디게이아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 교회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1

신약성경

콜로새서

2:1 

사실 여러분과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이들, 그리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

신약성경

콜로새서

4:13 

나는 그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또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신약성경

콜로새서

4:15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또 님파와 그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4

신약성경

콜로새서

4:16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고 난 뒤에 라오디케이아 교회에서도 읽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라오디케이아에서 가는 편지를 여러분도 읽으십시오.

5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1: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6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3:14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7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3: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요한은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면서 먼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파묵칼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시냇물이 되어 라오디게이아까지 내려온다.
        온천수가 흘러내려오는 동안 식어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기 때문에 요한은 온천수에 비유해서 라오디게이아 사람들을 책망한 것이다.
        라오디게이아는 60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근처에 새로 건설한 도시는 데니즐리(Denizli)라고 부른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페허가 된 빈 터에 간판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바오로에게는 에바프라라고 하는 골로사이 사람 동역자가 있었는데 그는 라오디게이아, 골로사이, 히에라폴리스를 두루 다니면서 포교에 힘썼다.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 4:12-13】

12 

여러분의 동향인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인 에파프라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완전한 사람으로, 또 하느님의 모든 뜻에 확신을 가진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도록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3 

나는 그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또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 흰 부분 파묵칼레의 좌측 어느 부분이 라오디게이아 지역이 있어야 하는데, 잘 검색이 되지 않는다.


▶memo 라오디게이아

 

 

 



▶참고 자료

        필리피 사도의 순교교회(Martyrium of St. Philip )

        필리피 사도는 포교 활동 중 로마의 황제에게 핍박 받아 돌에 맞고 감옥에 갖혀 죽었다고 전한다. 그에 그가 죽은 자리에 기념교회를 세운 것이 이곳이다.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비잔틴 양식의 주요 건물은 성 빌립보의 순교자 교회이다. 필리피 사도(St. Philip)의 순교 교회는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 뒷편 언덕에 있다. 언덕에 경사가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지만 경치가 좋으며 원형 보존율도 높다. 이 사도는 프리기엔에서 설교를 하고 1세기 중반쯤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모호하지만, 5세기 초에 빌립보를 추모해서 중심이 8각형인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아 히에라폴리스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양모 염색공, 카펫 직조공, 동 제련공과 같은 직업명이 묘비에 기록된 히에라폴리스의 일반 거주민들은 모두 북문 앞에 놓인 도시의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이곳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고대의 공동묘지이다. 그 옆에는 석관 묘총과 가족묘 같은 여러 형태의 무덤들이 잘 보존돼 있다

       파묵칼레 온천 바로 뒤에 있는 무려 1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하드리안 황제 시절의 원형극장이 이를 증명한다.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리게 된 것은 신전이 많았기 때문. 히에라폴리스는 미시아의 텔레포스왕의 아내 히에라에게 바쳐진 도시라는 뜻도 있지만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도 있다.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은 이곳을 아폴로는 물론 아르테미스와 아폴로의 어머니 레토 외에 지진을 관장하는 포세이돈과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플루토 신이 살았다고 믿었다. 특히 플루토가 살고 있다고 믿은 곳은 화산활동으로 인해 유독가스가 끊임없이 새어나왔던 굴 속이었다. 신탁을 받기 위해 수많은 사제들이 어리석게도 이곳에 고개를 들이밀었고, 들어가면 결코 나오지 못했다. 지금은 굴 입구를 막아놓았다.

        그리스 로마인들이 이렇게 성스럽다고 생각한 곳에서 기독교를 퍼뜨리다 순교한 사람이 바로 필리피서의 주인공 필리피. 돌에 맞아 순교한 그를 위해 나중에 산꼭대기에 빌립을 기념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의 목욕탕까지 교회로 변했다.


▶memo

 

 

 

 


☞파묵칼레 온천 지구 뒤편이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이 위치하고,

 이 극장 뒤편에 원안이 필리피 순교 교회의 터로 추정된다.

순례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으나, 조그만 발품을 팔면 갈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파묵칼레(여행사)

        HOT SPRING &SPAS

        파묵깔레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파묵깔레의 노천온천은 수천년동안 깊은 지하수에서 미네랄워터를 쏟아내었다. 이 지하 온천수들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원형의 욕탕을 형성하였고, 희고 풍부한 미네랄 내용물들이 석회질 바위와 융화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곳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으며, 근처에 순례객들을 위해 히에라폴리스가

☞윗쪽 원안이 히에라폴리스 유적지이고, 중간 흰부분이 파묵칼레 지역이다.


세워졌다. 이 온천에 기적을 바라는 순례객들은 아픈 몸을 담그고 치료를 받곤하였다.
        파묵깔레는 이즈미르에서 250km, 데니즐리에서는 20km가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호텔은 파묵깔레 북쪽의 카라하잇(Karahayit)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의 온천수의 온도는 42~56C 정도이며, 파묵깔레와 비슷한 pH 5.98의 알칼리성이고, 파묵깔레보다는 철분성분이 많다.
        파묵깔레의 온천은 초당 400리터의 물을 쏟아내고 있고, 이곳에는 하루 6000명의 관광객이 수용가능한 숙박시설과 온천수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미네랄 온천수에는 풍부한 칼슘과 마그네슘, 황산, 중탄산염 등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심장질환, 소화기 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능으로 로마시대의 황제들까지 요양을 했을 정도라고 전해져 온다.

        목화성(Cotton Castle)이라 불리는 파묵칼레의 석회붕은 칼슘과 중탄산염이 함유된 온천수가 수세기에 걸쳐 산봉우리부터 흘러내리며 계단식의 자연 수영장 모습이 되었는데, 이 모양이 솜을 쌓아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터어키의 절경 중의 하나. 멀리서 보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것 같기도 하고, 목화송이로 뒤덮인 것 같기도 하고, 목화송이로 뒤덮인 것 같기도 한데 현재는 과도한 개발로 인해 온천수가 줄어들어 무미건조한 하얀 석회봉만 자리하고 있다. 물이 없어 지금은 수용복 차림으로 온천욕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 로마시대로부터 온천물은 류머티스, 심장병,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위의 어느 곳이나 목화밭을 볼 수 있듯이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모직 산업에 종사하였고, 섬유 산업의 중심지 이기도하는데, 오늘날 세계적 관광지답게 민박,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석회봉 위쪽으로 로마시대에 세워진 야외 원형극장을 비롯하여 교회, 공중목욕탕, 신전 등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이 있다.

        언덕 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은 기원전 190년에 시작된 도시의 유적으로 이 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내륙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성한 도시' 란 의미의 히에라폴리스는 비잔틴움의 스테파누스가 사원의 수가 많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수세기 동안 고원으로 흘러나온 석회수에 의해 형성된 솜 같은 순백의 평원은 감탄을 자아낼 만한 장관으로 4곳에서 염화칼슘과 이산화탄소가 함유된 35℃의 온천수가 솟아나오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원형극장으로 1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둥근 관객석위에서 내려다보는 파묵칼레의 전망은 정말 압권이다. 이밖에 터어키식 증기 목욕탕이나 돌을 쌓아 만든 벽 등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출토품들은 히에라폴리스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석회붕(Travertines) 및 히에라폴리스 입장료 : 3,250,000TL
(입장권으로 이틀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입장시간 : 8:00 ~ 21:00
(석회붕은 실제로 24시간 OPEN 이다. 하지만 늦은 저녁은 미끄럽고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오전일찍 가는게 더 좋다)

화장실 : 100,000TL

온천 수영장 : 3,000,000TL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는 직선 거리로 17km 정도이다.

▶memo 파묵칼레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우리 일행은 노상온천을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흐르는 온천수에 손을 담궜다. 물에 함류된 미네랄 성분이 몸속으로 스며들겠지?... 신기한 모양새를 갖춘 지면을 살금살금 걸으면서 잠시 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좀더 머물고 싶었지만 다음 순례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올 때는 잠이 들깬 상태로 비몽사몽 오느라고 주변이 보이지 않았는데 떠나는 버스에 올라 창밖을 내다보니 주변에는 많은 석관묘가 있었다.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로 병을 고치기 위해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 기거하다가 죽으면 묻혔던 공동묘지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 들었으면 수많은 사람이 병을 치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1,200 기 정도의 석관이 있는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동묘지(네크로폴리-necropolis) 중의 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콸콸 흐르는 온천수와 더불어 주변이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터키 국내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휴양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때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다행히 한산한 때이어서 온천수에 손이라도 담궈 볼 수 있었지만 휴양객이 많이 몰려 있을 때는 가까이 갈 수도 없었을 것만 같았다.
        석관묘를 보면서 지상에서 겪었던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을 이들에게 세상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전구해 주십사고 화살기도를 쏘아 올렸다.


▶4일째 일정은 파묵칼레에서 도착 후 순례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다

▶memo 4일째 이고니온 -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 바오로 기념교회 - 히에라 폴리스 - 라오디게이아 - 파묵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