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성지터키,그리스

에페소,쿠샤다시,

월요일은자유인 2007. 4. 2. 16:38
 

▶5일째.


        조식후 다시 라오디게이아를 경유하여 에페소로 이동을 한다.

        라오디게이아가 파묵칼레 지역 서편에 위치하고 있기에, 파묵칼레 온천지역에 숙소가 있는가 보다. 에페소는 파묵칼레 서쪽이다.

        파묵칼레에서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다시 여정에 오른다. 오늘은 파묵칼레에서 에페소까지는 140km에 이른다.  도착을 한 후 에페소에서 하루 종일 순례를 한다. 성모마리아의 집, 셀수스 도서관, 원형극장, 에페소 교회터, 사도요한의 교회, 성모성당을 순례한 후 숙박을 한 후 에페소에서 10km 아래에 있는 쿠사다시로 내려와 숙박을 한다.


♣에페소(여행사:지역)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km 지점으로, 양항(良港)을 끼고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신전(神殿)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를 끌어모았다.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성기(最盛期)로서,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 페르시아전쟁으로 해방이 된 뒤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였다. 1세기 성 바오로는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였으며(54, 55∼57), 또한 로마에서 이 지방 신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의 폐허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데니즐리(파묵칼레)에서 에페소로 순례한 후 조금 내려오면 쿠사다시가 있는데

그곳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 스미르나로 향한다.

☞데니즐리에서 에페소까지 직선 거리로 140km 정도이다.



        ※고대도시 에페소(Efesus)

        에페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Androklos)의 지휘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도시로 이끌것이라고 했다. 어느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바로 그 자리, 즉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소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에페소는 키메르(Cimmerian)인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Croesus)의 지배를 잠시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해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 곳을 정복, 에페소는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리시마쿠스(Lysimachos)는 피온산(Mt.Pion)과 코레쏘스산(Mt.Koressos)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 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이다.
        기원전 88년, 에페소인들은 폰터스(Pontus)와 연합하여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였으나 로마의 세력 팽창이 엄청날 것을 알아차린 에페소인들은 곧 로마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에페소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아시아속주의 수도로 부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거대 항구가 있는 아시아 무역항로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영도 서기 17년에 일어났던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폐허로 변하였다.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바오로 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해지고 있다는 에페소로 오게 되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곳은 가톨릭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

1

신약성경

사도행전

18:19 

그들은 에페소에 도착하였다. 바오로는 그 두 사람을 그곳에 따로 남겨 두고 혼자 회당으로 가서 유다인들과 토론하였다.

2

신약성경

사도행전

18:21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한 뒤, 배를 타고 에페소를 떠났다.

3

신약성경

사도행전

18:24 

아폴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

4

신약성경

사도행전

18: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5

신약성경

사도행전

19:1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

6

신약성경

사도행전

19: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7

신약성경

사도행전

19:17 

이 일이 에페소에 사는 모든 유다인과 그리스인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8

신약성경

사도행전

19:21 

에페소에서 소동이 일어나다

9

신약성경

사도행전

19: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저 바오로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페소만이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 지방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유인하였습니다.

10

신약성경

사도행전

19:35 

마침내 서기관이 군중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하였다. “에페소 시민 여러분, 에페소인들의 도시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와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을 지키는 곳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11

신약성경

사도행전

20:16 

바오로가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페소를 그냥 지나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되도록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에 있으려고 서둘렀다.

12

신약성경

사도행전

20:17 

에페소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13

신약성경

사도행전

20: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4

신약성경

사도행전

21:29 

그들은 전에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가 바오로와 함께 성안에 있는 것을 보고, 바오로가 그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15

신약성경

코린토1서

15:32 

내가 에페소에서 이를테면 맹수와 싸웠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

16

신약성경

코린토1서

16:8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페소에서 지내겠습니다.

17

신약성경

에페소서

1: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18

신약성경

티모테오1서

1:3 

내가 마케도니아로 가면서 당부한 대로, 그대는 에페소에 머무르면서 그곳의 일부 사람들에게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19

신약성경

티모테오2서

1:18 

그날에 주님께서 허락하시어 그가 주님에게서 자비를 얻기 바랍니다. 에페소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는지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20

신약성경

티모테오2서

4: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21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1: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22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2:1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23

신약성경

요한묵시록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1세기 사도 바울이 선교할 당시 에게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던 에페소는 로마 제국 내에서 동야과 서양을 연결하는 최대의무역항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당시 아시아의 수도로 사용하던 베르가모를 포기하고 에페소로 수도를 옮길 정도 였으니 말이다.

        A.D 50년경 , 제 2차 선교 여행에서 코린토를 거쳐 이곳을 방문한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오로는 교통의 요지였던 이 도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코린토에서 만난 브리스킬라와 아귈라 부부를 이곳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제 3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른 전교지보다 오랫동안(약3년) 이곳 에페소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티란노스 학원(사도행전19장 10절)에서 말씀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양육ㅎ고, 지도자로 세워 다른 여러 주변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며 교회를 세워 나갔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로마 제국이 닦아 놓은 길을 타고 나아가 소아시아 각 지역에 복음을 심었고, 이곳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온 사도 요한이 자라나게 하였다. 사도 요한은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갖고 세계를 다니며 선교 하였던 사도 바오로의 활동을 굳게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 (사도행전 19장)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2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7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9 

그러나 몇몇 사람이 회중 앞에서 주님의 길을 헐뜯으며 고집스럽게 믿지 않으려 하자, 바오로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날마다 티란노스 학원에서 토론을 벌였다.

10 

이 일이 두 해 동안 계속되어,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다인 그리스인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memo 에페소

 

 

 

 

 

 


♣성모마리아의 집(여행사)

        신비한 사연을 가진 성모 마리아의 집

        

        에페소 3차 종교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예수가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남은 여생을 위해 산(크레소스 산; Mt. Korssos, 뷰불다; Bülbüldağı) 위에 작은 집(메르예마나 에비)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집은 후에 찾는 이가 없어 잊혀졌다.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이곳 터키 에페소로 피신해 와서 숨어 살았으며 당시 거처는 에페소 인근의 크레소스산 남쪽 기슭이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곳 불불산 남쪽 기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현재 에페소에 가면 실제 뷰불다(크레소스 산)를 구불구불 오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임종을 거둔 기억자형의 토담집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신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상기했듯이 베일 속에 가려진 채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임종 장소는 세상사람들에게 알져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독일 베스트팔렌주의 돌멘이라는 시골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수녀 캐더린

에메리히(Emmerich)가 1878년 환상(Vision)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에 예수 승천 후의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에서의 생애가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점은 에메리히 수녀는 12년이나 병상에서 보낸 사람이었으며 에페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당시 시인 클레멘토 브렌타노는 에메리히 수녀의 환상(Vision)에 기초해서 '안나 캐더린 엠머리히의 비전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자를 펴내게 된다.

        1880년 이 책이 터키 이즈미르에 있었던 라자로 수도회의 신부 줄리앙 구예에게 전해졌고 그는 책에 근거해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아내게 된다. 189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성모

☞에페소 셀주크 도서관에서 성모 마리아집까지의 여정이다. 꾸불꾸불한 것이 멀미가 날만 하다.

  검은 원안이 셀주크 도서관이고 도서관 순례후 성모 마리아 집까지 올라간다.

☞도서관에서 성모마리아집까지는 직선거리로 1km에 불과하지만...


마리아의 집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지금의 장소이며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1967년 교황 바오르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현재 이 곳은 그리스도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매년 8월 15일에 그리스도교인에 의한 기념 제전이 이곳에서 열린다.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에페소! 로마시대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도시. 버스는 고도(古都) 에페소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성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셨다는 곳으로 전해져 오는 빌빌 산으로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성모님이 돌아가신 곳을 두 곳으로 얘기하는데, 한 곳은 예루살렘이고, 다른 한 곳은 바로 터키, 에페소 근처 빌빌 산이 있는 곳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왔고,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성모의 집’으로 가는 길은 마치 미시령을 넘는 것처럼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아돌아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는 산 모통이에는 성모 동상이 서 있었는데, 터키에서, 더구나 공공장소에 성모님 동상을 세운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터키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곳이고, 이슬람교는 종교적으로 모든 형상을 세우는 것을 금한다!)
        헌데 이상한 것 하나. 왜 성모님은 이렇게 인가도 없는 외진 곳에, 그것도 '빌빌 산’꼭대기에 와서 숨어 사신 걸까? 하긴 성모님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 역시 "그렇다더라”전승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memo 성모 마리아의 집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에페소 원형극장에서 사도 바오로의 열정적 삶을 살아가는 바오로딸들인 우리들은 계단을 내려가서 중앙무대에 서서 목청껏 ‘살베레지나’를 합창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청중으로 돌변하여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리들이 부르는 성가를 경청해 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우리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듯했다. 이들 관중은 마치 앵콜!... 앵콜!...을 외치면서 기립박수까지 보내는 것같은  모습이 보였다. 설마 착시현상은 아니었겠지?...


☞에페소 원형극장이다.


        그러나 인접해 있는 성모마리아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기로 한 시간이 임박했기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아쉽지만 세계 무대에 서서 성가를 열창해 본 체험을 간직한 채 발길을 돌렸다

        아담한 동굴을 연상할 만큼 자그마한 집 안으로 들어가니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건물 안에 준비된 봉헌 초에 불을 밝히면서 침묵 중에 잠시 기도를 드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구는 건물 정면인데 출구는 내부의 오른쪽이었다. 아마도 작은 건물에 순례객이 몰려들면 분잡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출구 통로를 따로 만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데 담벼락에 철재로 만든 게시판에 꼬깃꼬깃한 종이쪽지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순례객들이 기도지향과 소망을 적어 꽂아놓은 종이들이었다. 나도 가방을 뒤져 작은 메모지에 기도지향을 적어 꽂아두었다.
        다시 조금 걸어가니 수도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는 샘터가 있었다. 성모님께서 길어다 사용하신 물이다. 뙤약볕에 오래 서 있느라고 몸속의 수분이 많이 증발해서인지 몹시 갈증이 났었는데 물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갈증을 풀기 위해 연거푸 두 잔을 마시고 나서야 이 물은 예사로운 물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다시 한잔을 더 들이키면서 내 안에 있는 불순함을 말끔히 씻어 주시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했다.

 

♣에페소 셀수스도서관(여행사) (Celsus Library)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차례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페소는 사도바오로가 서기 53년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바오로의 방문 이후, 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바오로가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페소서'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오로가 에페소의 티란노스 학원에서 강론을 펼친것으로 나와있어 이 셀수스 도서관이 바로 성경상의 티란노스 학원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이곳이 티란노스 학원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 셀수스 도서관은 사도바오로가 에페소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없는 추측일 뿐이며, 사도바오로가 셀수스 도서관과 같이 도시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곳이 아닌 변두리에서 티란노스라는 사람의 개인 학원에서 강론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memo 셀주크 도서관

 

 

 


♣에페소 원형극장(여행사)

        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원형극장(Efes Theatre)

2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이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 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memo 에페소 원형극장

 

 

 


☞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이곳은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 복원 중에 있다. 이 극장의 특징은 완벽한 에코로 유명했다고 한다. 무대 중앙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산에서 마주치는 바람의 기막힌 조화로움으로 에코를 만들어 맨 꼭대기에 앉은 사람이나 무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이나 같은 음량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멀어졌기에 예전 만큼의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능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에페소 교회(여행사)


        에페소 교회는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에 이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세번째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에페소 교회 공동체는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던 것이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memo 에페소 교회

 

 

 


♣사도요한의 교회(여행사)

        사도 요한의 교회(Church of St.John)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기원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에페소가 아랍민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된 그리스도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그리스도교 성지의 하나로 여겨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memo

 

 

 

 

-family:


☞원안이 사도요한교회가 위치한다.

- 사진의 보이는 않는 서남쪽 방향으로 에페소 유적지가 있다.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세례소’는 대부분의 성당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특이한 구조여서 가이드의 안내와 준비해 간 자료를 유심히 읽어 보았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에게 세례예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십자 모양으로 양쪽에는 몇 개의 계단이 있고 아래에는 웅덩이가 있다. 세례예식을 거행할 때 한쪽 계단으로 내려가 웅덩이에 있는 물속에 잠겼다가 다른 쪽 계단으로 올라간다.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의미이기도 하고, 죄를 씻고 주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뜻한다고 한다

        사도 요한의 무덤이라고 표시된 곳은 네 개의 기둥만이 우뚝 서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화를 통해 떠오르는 사도 성 요한의 모습, 예수님께 응석을 부리듯 고개를 갸우둥하게 기대어 있는 모습이 생각났다.
        내 삶도 오롯이 주님을 향해 귀기울이는 자세를 취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짙게 스며있을 것 같은 기둥에 몸을 감싼 채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회심의 새로운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전해진다


♣성모성당

        성모성당은 431년 제 3차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며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강생(降生)한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두 가지 분리된 인격이 존재한다는 교리.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동시에 신이자 인간이라는 정통교리와 대치되었다. 이 이단설의 발단은 안티오키아 출신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1?)에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그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이단의 기미(아폴리나리스주의)를 띤 것이므로 사용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아나스타시오(Anastasius)의 주장을 두둔하였다. 당시 마리아론의 발달로 이 말은 정통교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특히 알렉산드리아학파치릴로(Cyrillus)의 반발을 샀다. 네스토리우스교리가 실제로 무엇이었으며, 어느 정도 이단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계속 주장하였지만,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다른 본성위격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본질적 일치’라는 말 대신에 ‘의지의 일치’라는 그리스도 양자설(養子說)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정통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네스토리우스파(派)는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를 받았으며,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는 동부 시리아 에데사의 이바스(Ibas) 신학파 주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489년에는 동로마제국의 제논(Zenon)황제에 의해 에데사에서 추방되었으며 페르시아로 이주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교회 및 비잔틴제국의 신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여기서 ‘테오토코스’를 공식적으로 배제하고 두 본성과 한 인격이라는 이단원칙을 세운 612년의 교회회의를 통해 강대해졌으며, 사산왕조의 박해와 터키 및 몽고의 침략을 겪으면서도 아라비아, 터키, 티베트,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로 불렸다
.)는 안디오키아 교회에 있을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약 200명의권위자들이 3개월간 토론 끝에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으며, 이 회의록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에페소에 왔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문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서 사실을 확인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에페소 아카디우스거리(헬레니즘 시대의 쇼핑거리)

        고대에 에페소는 원래 항구도시였다. 하지만 현재 에페소 도시유적을 찾아가보면 바다와는 꽤 떨어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밀려 내려온 토사로 인해 해안이 밀려났기 때문이다.
        원형 대극장에서 저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쪽으로 대로가 뻗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길이 바로 고대 에페소 항구에서 야외 원형극장까지 뻗어 있었던 아카디우스 도로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 길은 아카디우스 황제(395-408 AD.) 시대에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총 길이 530미터, 폭 11미터에 달하는 이 길을 따라 값비싼 물건을 파는 상점들과 화랑들이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도로의 양쪽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이 있는데 그 중간부에는 서기 6세기경 만들어진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이 도로는 항구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구도로"라고도 불린다.

 

☞위쪽원이 사도요한교회가 위치하고

☞아래쪽 원이 에페소 유적지이다.

고대 에페소 항구에서 야외 원형극장까지 뻗어 있었던 아카디우스 도로


▶memo

 

 

 

 


▶참고 자료

        에페소 아르테미스신전. -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아르테미스 신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신전은 현재 발굴된 가장 오래된 건물을 기준으로 볼 때  BC 3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6세기 중엽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때 지어지기 시작해서 120년 동안 지어졌다 한다. 에페소의 풍부한 재정능력에 의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 이상의 규모로 장대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었는데 바닥면의 넒이가 가로 130M, 세로 70M, 높이는 18M로 기둥은 무려 127개였다. 이오니아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BC 356년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했던 헤로스투스라는 사람에 의해 화재로 소실 되었다. 하지만 신전은 바로 재건에 들어갔고 에페소인들은 신전의 복구에 최선을 다해 기둥이 10M에 불과했던 파르테논 신전보다 8M나 높은 18M의 하얀색 최고급 대리석을 사용한 기둥을 127개나 세웠다. 또한 사방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BC 250년 완성된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량 컸으며 전세계에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널리 알려졌다. 에페소는 신전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며 더욱 번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에페소의 영화도 AD 3세기경 동고트인들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동고트인들은 신전을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에 아르테미스 신전은 대파되었고 파괴된 신전에서 대리석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신전은 완벽한 폐허로 변하였다.

        이렇듯 1600년간 페허로 남아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 와트에 의해서 발굴된다. 와트는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 신전을 복원해 나갔으나 현재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에는 외로운 기둥 한 주만 서있다

▶memo

 

 

 

 


※에페소의 그리스도교와 아르테미스 신.

        사도 바울은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아테미 신을 따르는 자신들과 심한 영적인 싸움을 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페소에 소동이 일어나자 그곳을 떠나야만 하였다.(사도행전 19,21 - 20,1)

에페소에서 소동이 일어나다

21 

이런 일들이 끝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협력자들 가운데에서 티모테오와 에라스토스 두 사람을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기는 얼마 동안 아시아에 더 머물렀다.

23 

그 무렵 주님의 길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24 

데메트리오스라는 은장이가 있었는데, 그는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장인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시켜 주고 있었다.

25 

데메트리오스가 그 장인들과 또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직업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저 바오로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페소만이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 지방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유인하였습니다.

27 

그래서 우리의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고, 마침내 온 아시아와 온 세상이 숭배하는 이 여신께서 위엄마저 상실하실 위험에 놓였습니다.”

2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하고 외쳤다.

29 

그래서 온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은 바오로의 동행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를 붙들어, 일제히 극장으로 몰려갔다.

30 

바오로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그를 말렸다.

31 

바오로와 친하게 지내던 몇몇 아시아 지방 장관들도 바오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32 

한편 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외치는 바람에 집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모여들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33 

그때에 유다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앞으로 밀어내자, 군중 가운데에서 몇 사람이 그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 군중에게 설명하려고 하였다.

34 

그러나 군중은 그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알고, 모두 한목소리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하고 외쳐 댔다.

35 

마침내 서기관이 군중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하였다. “에페소 시민 여러분, 에페소인들의 도시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와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을 지키는 곳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36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여러분은 진정하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37 

그런데 여러분은 신전 강도도 아니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은 이 사람들을 끌고 왔습니다.

38 

데메트리오스와 그의 동료 장인들은 누구를 걸어 송사할 일이 있으면, 법정이 열려 있고 지방 총독들도 있으니 당사자들끼리 고소하십시오.

39 

그리고 다른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정식 집회에서 해결하십시오.

40 

사실 우리는 오늘의 일 때문에 소요죄로 고소를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요의 사유가 없으니 우리는 이 난동을 해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집회를 해산시켰다.

        성경에 언급된 아르테미 신은 헬라 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라고 하는 여신으로서 제우스와 레토의 딸이다. 그녀는 태양신인 아폴로와 남매 지간이었고, 아주 어릴 때 부친인 제우시 신에게 평생 처녀로 지내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항상 많은 요정들을 거느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순결를 지켜야만 하였고 순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는  원래 처녀신이 아니라, 선주(先主)민족의 지모신(地母神)이었으며, 에페소에서는 가슴에 24개의 많은 유방을 갖고 다산과 풍요를 주장하며 인간과 동물의 생식을 주관하는 신으로 나타난다.

        또한 아르테미스는 수렵의 여신으로 항상 활과 화살 통을 지니고 나타난다. 그래서 다른 신들은 올림포스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는데 반하여 그녀는 숲이나 산에서 사냥을 하며 보냈다.

        한편 아르테미스는 달의여신이기도 하다. 이는 월신 셀레네, 헤카테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매년 5월이 되면 에페소인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념하는 대축제를 벌였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중심으로 앞에 24명의 여사제가 이끄는 긴 행렬은 에페소로 들어오는 마그네시아의 문을 거쳐 에페소 체육관을 방문한다. 그리고 나서 넓은 정부 종합 시장인 ‘아고라’를 한 바퀴 돌고 야외 음악당을 지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쿠레테스의 길을 지나 넓은 광장이 에페소 시청에 이르게 된다. 그때 이들이 들어오는 시간을 맞추어 아르테미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시장이 나와 인사를 하고, 긴행렬은 계속해서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페소 항구에 이르면 남자 사제들이 준비한 24개의 황소 고환을 아르테미스 목에 걸어주고 군중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기다렸던 무용수들이 춤을 추게 될 때 행사는 절정에 이른다.


▶참고 자료

        에페소 하드리아누스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번째로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어진 이 신전은 에페소스 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AD 117~138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오현제 중 하나로 추앙 받는 현황(賢皇)이었다. 선황의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한 황제였다. 속주들의 안보와 육성에 힘썼으며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행정,관료, 군사 제도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제도들을 다듬고 혁신했으며 학문과 예술 등의 학술적인 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선황처럼 양자를 들여 자신의 양자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안토니누스피우스 황제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 신전은 에페소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이다. 최근에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 담 위에 신과 여신들의 부조가 가득하며 4명의 로마 황제 Diocletianus, Maximianus, Galerius, Chlorus의 상이 꼼꼼이 들어차 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 아치위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은 첫번째 문의 아치위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테티스가 두번째 문의 아치위엔 마찬가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memo

 

 

 

 

▶5일째 순례는 에페소 순례를 마친 후 쿠사다시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쿠사다시에서는 숙박만 한다.

▶memo 5일째 에페소 - 성모 마리아의 집 - 셀수스 도서관 - 원형극장 - 에페소 교회 -

                                                                    사도요한의 교회 -에페소 유적

 

 

 

 

 

파묵칼레에서 에페소까지는 직선 거리로 140km 정도, 3시간 정도 보면 되겠다. 에페소에 도착해서는 에페소를 중심으로 순례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쿠사다시

♣아름다운 항구도시 쿠사다시(Kusadasi)

☞위성에서 본 쿠사다시의 모습

        쿠사다시는 아이든(Aydin)시의 해안선에 있는 작은 항구의 이름이다. 쿠사다시항이 있는 아이든 시는 예전부터 질좋은 무화과 산지로 유명했다. 고대에는 트랄레이스로 알려졌었으며 유명한 조각학교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때의 유적이다. 1186년 이후 도시는 셀주크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곳의 박물관에는 각 시대의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에게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쿠사다시는 가면새의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계단상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해가 한눈에 들어와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사고 있다. 쿠사다시에는 수 많은 방갈로와 펜션 그리고 호텔 등이 있어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또한 쿠사다시는 에게해 섬들을 유람하는 크루즈의 중요 기항지로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근처의 칼레이치 지방의 쿠쉬쇼핑 센터는 항상 활기찬 곳이어서 하루 종일 쇼핑을 즐겨도 지루하지 않다. 요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현대적인 마리나도 있다. 쿠샤다스의 북쪽은 맑고 깨끗한 투산-쿠쉬투르 해변이 있으며 남쪽으로 23km만 가면 휴양지 규젤차므르가 있다.

        호수 동쪽에는 베쉬파르마크 산의 다섯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과 교회 예배당이 정교회 사제들에 의해 베쉬파르마크 산기슭과 호수 안에 있는 섬에 세워졌다. 호수 가까이에는 고대도시 헤라클리아의 유적이 있고 산 동쪽에는 알린다 유적이 있다.
        이 계곡은 프리에네, 밀레토스, 디딤(디디마), 아프로디시아스, 히에라폴리스 등 많은 도시문명의 흥망을 지켜 봐 왔다. 이 고요한 국가 보호지역은 버드 워칭과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 자연 애호가, 사진작가들에게 최고의 장소이다.
        이 중 디딤(디디마)은 오로지 하나의 유적밖에 없지만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나다. 이 하나뿐인 유적인 ▶아폴로 신전은 이 지역 고대 유산 중에서 가장 신성한 신전으로 여기지고 있다. 디딤은 도시가 아닌 밀레투스에 속한 성지였다. 즉 신전과 신전을 지키는 성직자들이 살았던 곳이었던 것이다. 이런 디딤은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에 알렉산더대왕이 이곳을 정복하여 페르시아에 디딤을 바친 성직자들의 마을을 파괴하고 아폴론 신전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이렇듯 수 없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던 신전이지만 두 줄로 나란히 선 신전 기둥들이 거대한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하고 우아한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