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르나,사르디스,필라델피아,티아디라,베르가모
☞6일째 여정이 시작된다. 6일째는 소아시아 교회를 중점으로 순례를 한다.
☞쿠사다시에서 이즈미르까지 직선거리가 70km 정도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올라가서 이즈미르에 다다른다. 스미르나 교회를 순례하고, 스미르나(이즈밀)에서 사르디스(sart)로 이동한다. 사르디스까지는 직선 거리로 75km이다. 사르디스에서 필라델피아교회로 이동, 필라델피아까지는 30km 이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티아디라교회로 이동한다. 티다디라까지는 직선거리로 78k에 이른다. 티아디라에서 페르가몬 교회로 이동을 한다. 페르가몬까지는 직선거리로 50km. 페르가몬 교회순례를 마친후 숙박을 위해 아이발릭으로 이동을 한다. 아이발릭까지는 4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즈미르(여행사): 스미르나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에게해(海)에 면한 터키 제3의 대도시로 예전에는 스미르나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이며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BC 3세기에 재건되어 로마시대까지 번영하였다. 중세 비잔틴·십자군·아랍·투르크 간에 쟁탈이 거듭되었으나 그리스 문화의 한 중심으로 그리스상인에 의하여 무역이 성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軍)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리스령이 되었으나 1923년 터키에게 반환되었다. 주변일대에 곡물·목화·올리브·야채·잎담배·과실과, 견직·양탄자를 생산하는 배후지(背後地)를 끼고 있는데다가 비누·면직물·염색공업이 활발하여 상공업 중심지이다.
또한,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항공이 통하고 있으며 아테네로 연장 서비스도 하고 있다. 고대의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列柱),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국립도서관·에게대학 등이 있고,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르나의 역사와 특징들
에페소가 첫째 되는 도시 였다면 스미르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역사가들은 스미르나 도시의 아름다움을 아시아의왕관이요 꽃이라고 비유하였다. 당시 스미르나의 기후는 온화하여 서쪽 에게 바다를 타고 오는 미풍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감돌고, 생기를 불어 넣어 마침내 가로수에 전달되어 도시의 신선한 공기를 유지하게 했다.
지리적으로 리디아와 브루기아의 경계선 상에 위치하였고, 풍부한 헤르무스 계곡의 무역로와 만난다. 또한 항구는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여 해상을 통해 활발한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이곳에서 만든 동전들 가운데는 스미르나에서 물건을 실은 상선들이 바다로 향해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도시의 구조는 항구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도시 뒤편에는 조그만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파고스 언덕이었다. 이 언덕에는 여러 신전들과 스미르나의 왕관이라 불리워진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스미르나의 탑 모양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왕관을 쓴 여왕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스미르나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3천년 경에 에게 연안의 항구 도시로 시작되었다. 그 후 그리스에게 약 4백년간(B.C 100`0~600) 지배를 받다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리디아 왕국의 쿠에르수스 왕에 의해 도시가 점령되고 파괴되었다.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 황제가 소아시아에서 물러간 후 그의 부하 장수인 리시마쿠스가 다시 이 도시를 통치하게 되는데, 그는 스미르나 시를 옛모습 그대로 다시 재건하였다. 그는 도시의 건물들을 웅장하게 짓고 도로를 넓고 반듯하게 만들었다. 역사가 스트라보는 도시의 건물들이 포장된 도로와 함께 바둑판처럼 잘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였다고 극찬하였다.
한편 스미르나시는 로마 제국이 사랑하는 도시였는데, 그들은 당시 로마의 정권과 야합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군사들이 전쟁에 나가 추위와 배고픔을 당할 때 스미르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옷을 기꺼이 벗어 그들에게 보내었다. 당시 스미르나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이곳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1만데나리온을 내놓을 정도였으며, 이 도시에서 세력을 얻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다. 따라서 스미르나 지역에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이곳 성도들은 다른 어는 지역보다 더 많은 순교자를 내며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려야만 하였다.
주후 156년 2월 23일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 폴립갑이 스미르나에 있는 교인들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최후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했다는 이유로 두 손이 묶인 채 광장에 끌려 나왔다. 그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사랑받던 제자였다.
당시 스미르나의 총독은 그를 회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는 당신의 고귀한 인격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죽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시저가 주님이라고 한번 고백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그때 그는 그를 심문하던 총독과 광장에 운집한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나이 86세, 사랑하는 주님은 내 일생동안 나를 한번도 해롭게 한 일이 없소, 어찌 내가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께 불명예를 돌릴 수 있단 말이오?” 폴리카르포의 당당한 어조에 총독은 당황하였고, 그를 화형에 처형토록 하였다. 그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긴다. “사랑하는 주님, 내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감사하나이다.” 폴리카르포을 비롯한 스미르나 교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았으나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1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1:11 |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
2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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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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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신약성서 |
요한묵시록 |
1:11 |
그 음성은 나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여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5 |
신약성서 |
요한묵시록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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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신약성서 |
요한묵시록 |
2:8 |
또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
♣ 스미르나 교회(여행사)
이 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다. 그들은 유대아 전쟁(66-74년)으로 인해 갈릴레아나 유대아로부터 이민온 사람들이었으므로 가난하였다. 이 교회는 신도들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악령의 무리에게 비방도 당하였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을 받아 그들 중 몇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악령은 중상하는 자로서 사탄과 동일한 인물이며 반대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사도 성 요한의 추종자들을 반대하는 자들 배후에 있는 악령들의 두목으로서 마지막 세력이자 조종자이다.
그는 악과 죄로서 일시적 승리할 것이나 그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모범이신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므로 그분께 충성을 다하면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월계관을 받는다. 어둠의 세력이 거두고 있는 현재의 승리, 하느님께 대한 고집스러운 배척, 하느님 사랑의 법에 대한 반역, 불신앙으로 거두는 승리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충성심이다. 충(忠)은 마음이 한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언제나 주님께만 마음을 두는 자는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이다. 주님을 따르고 섬기되 충성을 다해 따르고 섬긴다.
이런 자는 확실히 생명의 월계관을 받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든 위에서 언급된영성적인 조건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네가 장차 당할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주겠다. 【요한 묵시록 2:10】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위의 내용은 스미르나(Smrna)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다.
스미르나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
8 |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
9 |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
10 |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이제 악마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 |
11 |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스미르나의 초대교회는 유다인 개종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초대 주교는 요한의 제자 폴리카르포(Policarp)이었다. 폴리카르포은 필라델피아 교인 열한 명과 함께 스미르나에서 화형당해 순교했다.
폴리카르포 교회는 4세기에 건립되어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90년에 중수되었고, 19세기에 개수되어 현재 가톨릭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안에 수도원도 있는 교회는 그리 크지 않으며 내부는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폴리카르포의 생애도 있다. 프랑스의 화가 레이몽 페레는 성화와 폴리카르포의 생애를 그리면서 자신도 순교하였다.
▶memo 스미르나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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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성지순례 소아시아 7대교회 "폴리카르포 기념교회(스미르나 교회)"
“성령의 불멸성 안에서 영과 육이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모든 것을 찬양하나이다 ” 폴리카르포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기도문이다. 이 폴리카르포 기념교회(스미르나 교회)는 AD 156년 경에 순교한 사도 바오로의 직전제자이자 스미르나 교회의 초대주교이었던 폴리카르포을 기리기위해 17세기에 지어진 교회이다.
과거에 이즈밀은 스미르나로 불려졌으며 교역의 중심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다. 그래서 사도바오로의 명에 의해 스미르나로 파견되어 온 폴리카르포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으며 교회를 일으켰다. 그러다 AD 156년 경부터 황제숭배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스미르나(현재 이즈밀)의 원형경기장에서는 야수들의 이빨에 11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이 때 폴리카르포도 잡혀 많은 회유를 당했으나.끝내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순교하여 스미르나 교회(현 폴리카르포 기념교회)는 성서에서 칭송받는 교회가 된다.
현재 폴리카르포 기념교회는 이즈밀 시내 중심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교회는 외관은 단순하고 검약해 보이지만 내부는 채색된 성화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들에게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우리는 페르가모에서 이즈밀로 향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도대체 이즈밀이 어딘데 성지순례에 들어가는 거지?” 라고 생각했던 곳이 바로 스미르나이다. 이곳엔 옛날부터 사람들이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할 수 없어 여느 도시와 같았다. 이즈밀은 터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라서 그런지 아주 깨끗하고 현대적이면서도 녹지대 형성이 잘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냥 “이곳이 옛 스미르나입니다” 하고 지나치기가 아쉬워 이 도시에 있는 유일한 가톨릭 성당에 들렀다. 폴리카르포 순교 기념성당이었다. 설명을 듣기 전엔 그 성당이 옛 스미르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 보다 했으나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90년에 지어졌다는데 벽에 붙어 있는 성화도, 세워놓은 성상도 조잡하기 그지없어서 그냥 휘돌아 나왔다
☞ 폴리카르포은 어떤 인물인가?
1) 폴리카르포(Polycarp)
① A.D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86세로 순교한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이다.
② 신약시대 이후 널리 알려진 첫 순교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③ 사도들에 의해 아시아의 서머나(Smyrna)교회의 주교으로 임명받았다.
④ 폴리카르포은 사랑의 사도 요한의 수하에서 공부했기에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만난 사람과 그 후 세대를 연결해주는 사람이다.
⑤ 그가 어떻게,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2세기경 그는 스미르나에서 열심히 목회하고 있었으며 노예들과, 지방 호족들, 총독의 관리들이 한 데로 잘 조화되어 구성된 교회였다.
⑥ 약 50년 동안 주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온유하였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겸손의 귀감이 되었다.”
⑦ 그는 비록 요한의 제자였지만 자신을 사도들과 동등시 하지 않았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 편지를 자랑함으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요청했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처럼 진리의 말씀을 능력 있고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못 했습니다.”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또는 폴리카르포)는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의 주교가 되었다. 성 폴리카르푸스는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였고 특히 이단인 발렌티누스주의(Valentinianism)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 1서 4장 3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사탄의 맏이'라고 부른 마르키온의 거짓 가르침을 반대하도록 역설하였다.
그는 로마(Rome)로 가서 교황 성 아니케투스(Anicetus, 4월 17일)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짓지 못하였다. 이에 그대로 스미르나로 돌아온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하여 체포되었으며, 이교도의 신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함으로써 화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서 2세기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사도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저술가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스미르나 교회 이름으로 기록된 "폴리카르푸스 순교록"(Martyrium Ploycarpi)는 목격증인의 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사르디스교회(여행사)
1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1:11 |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
2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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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3:1 |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
4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3:4 |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원안이 사르디스지역이다.
☞이즈미르에서 직선 거리로 75km정도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사르디스(Sardis)교회
사르디스 교회는 성경에서 라오디게이아와 함께 하느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이다. 그런 사르디스 교회가 있었던 이곳은 예전에 샤르디스(Sardis)라 불렸으며 현재는 샤르트(Sart)라 불린다. 이 샤르트 유적은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몇 몇 유적들이 있는데 아르테미스 신전과 체육관, 공공 화장실 등이다. 이 유적들이 지어진 pactolos계곡은 앙카라와 이즈미르를 연결하는 현대적인 도로와 수 많은 리디안의 묘가 있는 천의 언덕 사이에 있다. 이곳은 리디아(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소아시아 서부지방에서 번성하였던 왕국 학예(學藝) 및 염직(染織)·야금(冶金)·채광(採鑛)이 발달하였고,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에게 멸망하였다.) (Lydia)의 수도였다. 이곳을 지배했던 리디아인들은 상업, 경제적으로 훌륭하고 창조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이 도시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크로소스왕(King Croesus)은 그 시대 가장 유복한 왕이었다. 아테네의 현명하고 유명했던 개혁자 솔론도 이 부유한 왕과 도시를 보기 위해서 방문했을 정도였다. 이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금의 손을 가졌다는 왕의 이야기의 초석이 되는 것으로 이솝(Aesop)은 코로소스 왕의 통치기간 동안 사르디스에 살았던 푸리지아 사람(Phrygian)이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세계에서 최초로 동전을 만든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B.C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B.C 2세기 때에 다시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앙카라와 이즈미르를 연결하는 현대도로의 북쪽에 위치한 유적지에는 공공화장실과 체육관 그리고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유태인들의 예배당이 남아 있다.
유태인 예배당의 남쪽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던 도시의 중요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한 때 왕도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했다. 현재의 이곳의 유적지는 AD.4세기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중 유대인 예배당은 AD 3세기에 체육관의 일부분으로 쓰이던 것을 예배당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현재 체육관 유적의 메인 건물만 복원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거대한 복합단지였다.
▶사르디스(Sardis)는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 산성은 기원전 12세기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성채로서 450m의 높은 산에 세워졌는데 산이 무너져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 관광도로가 만들어져 있지 않아 산을 오를 수가 없다. 기원전 6세기에 사르디스는 아주 부강한 도시였다.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 크로이수스(Croesus)가 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을 통치했다.
고레스(Cyrus, 사이러스 또는 큐로스로 발음한다) 왕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석방한 왕이며 사르디스로부터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까지 3,000km를 대리석으로 포장한 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리디아 왕국 때 사르디스 성은 아래 평야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성벽을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남아 있는 본래의 성벽에 최근 미국 대학생 팀이 와서 중수했다. 성 안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단순한 도리아 양식, 둥근 이오니아 양식, 그리고 둥글둥글한 코린트 양식의 돌기둥들이 섞여 건립되었고, 어떤 기둥들은 맷돌처럼 포개어 세워졌는데 기둥의 둘레가 여섯 아름들이 굵기이다. 기둥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고, 세운 후에 납 물을 끓여 부어서 고정시켰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에 건축된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잔틴 시대에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르디스의 수호신은 시벨리(Cybele)였는데, 사람들은 시벨리 신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
1 |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
2 |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
3 |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4 |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5 |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
6 |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요한이 사르디스의 수호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은 신실한 몇 사람을 칭찬한 적이 있다.【요한 묵시록 3:4-5】
4 |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5 |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석방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할 야훼의 목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성서에 있다.【역대기하 36:22-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 | |
22 |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
23 |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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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현재 지나가고 있는 마을의 집 지붕을 쳐다 보란다. 아담하고 소박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새가 마치 우리 나라의 서민들이 사는 동네와 유사하게 보였다. 그런데 몇몇 집들 지붕의 중앙에 빈병이 꽂혀 있었다. 가이드님은 왜 병을 지붕 중앙에 꽂아 두었을까요? 라고 질문을 던진다. 몇 명의 수녀들이 갖가지로 답을 했고, 나도 ‘비가 오면 물을 받아서 밑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요...’ 라고 답했지만 틀린 답이었다. 맨 뒷좌석에 앉아 계신 신부님께서 ‘처녀 있어요...’ 라는 뜻이란다. 너무나도 엉뚱한 말씀을 내밷으시는 것 같아 우리 일행은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이드님은 ‘네, 맞습니다’ 라고 하기에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보였다. 이구동성으로 네? 뭐라구요?... 하하하...
가이드님은 조곤조곤 ‘지붕 위의 유리병(코카 콜라병 모양)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처녀 있어요’ 라는 표시라니? 정말 흥미로웠다. 이 지방에서는 15세에서 18세 정도의 혼인 적령기 처녀가 있는 집에는 이런 표시를 한단다. 이 표시를 보고 구혼자가 찾아오거나 중매쟁이가 중개를 한다는 것이다.
처녀의 집을 방문한 총각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들면 처녀의 부모님은 따끈한 홍차 같은 것으로 대접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차가운 냉수를 내놓으면 거절의 표현이라고 한다. 처녀의 부모나 식구들, 중매쟁이들이 처녀를 소개할 때 음식솜씨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구혼자을 사로잡는 첫 번째 조건이란다.
가장 선호하는 적임자는 4촌인데 종족 보존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들이 각양각색의 문화적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면서 흥미로운 이 나라의 풍습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버스의 회전이 심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무사히 통과하여 사르디스 교회가 있던 곳에 잠시 머물고 다시 베르가모 교회로 향했다.
♣필라델피아교회(여행사) : (현지명 Alasehir)
☞사르디스 교회에서 직선 거리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 교회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30KM정도에 떨어진 위치에 있다. 필라델피아는 "형제의 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Pergamum(159-138 BC)의 Attalos II Philadelphos에 의해 세워졌다. 도시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1:11 |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
2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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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3:7 |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
B.C 481년에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Xerxes는 그리스에 가는 길에 사르디스쪽으로 여행을 했었었다. 이를 기억한 알탈로스 2세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프리지아(Phrygia)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이 도시의 위치는 매우 절묘하다. 페르시아의 왕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과 Hermuz와 Meander(Menderes)라 불리는 중요한 골짜기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AD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폐허로 변했다. 그래서 현재도 별다른 유적이 남아있지 않으며 주변에 이미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어려운 형편이다. 하지만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 교회가 있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벽돌을 재료로 해서 지어진 건물로 6개의 기둥이 있는 직사각형의 건물이었다. 이 6개의 기둥 중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은 단 3개의 기둥이다. 4번째 기둥은 땅에 반이 파묻혀 있으며 가장 서쪽의 기둥은 근처에 지어진 현대건물의 아래에 있다. 기둥 위에는 11세기에 그려진 그림을 어렵게 확인할 수 있다.
필라델피아는 역사가 바뀌어 오스만 터키 족이 아나톨리아를 점령하여 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 때도 건재 하였고, 14세기 까지 희랍 정교회 교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
7 |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
8 |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보라, 나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 너는 힘이 약한데도, 내 말을 굳게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
9 |
보라, 나는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이렇게 하겠다. 그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보라, 나는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
10 |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땅의 주민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올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
11 |
내가 곧 간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아무도 네 화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
12 |
승리하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 그리고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
13 |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필라델피아 도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던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였다. 이 도시는 베르가모 왕 아탈로스 2세(B.C159~138)에 의해 지배를 받았는데, 도시의 이름은 아탈로스와 그의 동생 유메네스와의 형제 우애가 두터웠음을 알리기 위해 헬라어로 필라델피아 ‘형제 사랑’이란 도시로 명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지리적으로 필라델피아는 비시디아, 리디아 그리고 브루기아와 만나는 교통의 요지 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헬라 시대에는 이 도시를 통해 헬라의 문화와 언어를 주변 지역인 리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에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A.D19년 리디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잃어버리고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은 필라델피아 지역 교회에게 인근 각처에 이 도시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사랑의 복음을 전하하고자 ‘열린 문’을 두셨던 것이다.
요한은 ‘필라델피아 교회’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앞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 힘은 비록 미약하지만 너는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사탄의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나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으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요한 묵시록 3:8-9】
필라델피아 교회’는 일곱 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요한에게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언제부터 그곳에 교회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찍부터 순교자가 발생했던 곳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의 교인들 열한 명은 폴리카르포과 함께 스미르나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네 앞에 열린 문”은 프리기아를 향한 전도의 전초기지를 가리킨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터만 남아 있고 간판만이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주로 포도주를 생산했는데 지금도 광막한 평야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그들은 농산물들을 이웃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했으며, 지금도 소아시아에 산재해 있는 300군데 교회에 성만찬에 사용하는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고 있다.
☞사진 salihli 좌측에 사르디스교회가 있고, 사진 Alasehir에 필라델피아교회가 있다.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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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디라교회(여행사)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티아디라(Thyatira) 교회
티아디라(Thyatira)는 이즈미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는 Akhisar라 불린다. 티아디라는 알렉산더의 대장 중 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페르가문의 지배자가 되는 셀레우코스 니카도르(Selucus Nicator)가 B.C. 3세기경 도시를 재 건립하기까지는 대수롭지 않
☞윗쪽 원이 티아디라교회, 가운데 원이 사르디스교회, 우측 원이 필라델피아교회이다.
이즈밀에서 sart를 거쳐 Alasehir을 거쳐 Akhisar로 향한다.
은 곳이었다. 이 도시는 군사도시로 성채도시였다. 평지에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운 도시였지만 지정학적 위치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건립할 때의 군사적인 목적은 서서히 잊혀져 갔으며 도시는 상업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어갔다.
1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6:14 |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
2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1:11 |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
3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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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18 |
“티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
5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24 |
☞Akhisar(티아디라)지역모습이다.
그래서 아래의 요한 묵시록에서 보이듯이 예수님은 이단의 득세와 교인들의 변절을 질책하였다. 묵시록에서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다(2장20절)"로 보아 예수님은 신자들의 종교적 순결을 질책하신 듯하다.
현재 티아디라에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아폴론 신전과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에 남아 있는 커다란 기둥들만이 있다.
티아티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요한 묵시록 2장 | |
18 |
“티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
19 |
나는 네가 한 일을,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안다. 또 요즈음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도 안다. |
20 |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다. |
21 |
내가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지만, 그는 자기 불륜을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
22 |
보라, 내가 그를 병상에 던져 버리겠다. 그와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 함께 저지르는 소행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속으로 던져 버리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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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겠다. 그리하여 내가 사람의 속과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모든 교회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한 일에 따라 각자에게 갚아 주겠다. |
24 |
그러나 티아티라에 있는 너희 나머지 사람들, 곧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너희에게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
25 |
다만 내가 갈 때까지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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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사람,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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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옹기그릇들을 바수듯이 그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
28 |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그 사람도 나에게서 받는 것이다. 나는 또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 |
29 |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사도 바오로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는 티아디라 출신의 포목상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사도행전 16:14】
티아디라 교회는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로 선행과 자비와 믿음과 인내로 칭찬은 받았지만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는 이세벨의 미혹케 하는 말을 따라 교인들이 간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으므로 책망을 받았다.
티아디라는 “티아의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의 악히살(Akhisar)을 가리킨다.
티아디라는 소아시아 서쪽 루카스 강변에 있던 성으로 동남쪽의 사르디스와 서쪽의 페르가몬을 잇는 길 사이에 위치해 있다.
리디아 왕국 때부터 페르가몬,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로 상업도시였으며, 기원전 3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식민지였다. 예로부터 직조, 염색, 모직물, 제혁, 철공으로 유명했다.
염색 가운데 특히 풀뿌리로 염색한 빨강색 천이 유명했는데 그것을 터키 레드라고 부른다.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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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교회(여행사)
페르가몬은 BC 3세기 전반 트라키아왕에게 복속하고 있었으나 필레타이로스가 독립을 쟁취하고 아탈로스 1세에 이르러 사실상의 왕국이 되었다. 에우메네스 2세(재위 BC 197∼BC 160) 때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여 로마제국의 대(對)시리아전 때 협력해서 전공을 세워 소아시아의 서반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나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따라 왕국을 로마에 양여하였다.
로마는 이를 소아시아라 이름하여 그 속주(屬州)로 삼았는데 수도 페르가몬은 그 후에도 오래 번영하였다. 건축으로서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 ·왕궁 ·도서관, 조각으로서는 《빈사(瀕死)의 갈리아인》 등 헬레니즘 미술의 걸작품을 남겼다.
☞원안이 베르가모 교회터가 있다. bergamo는 도시 근처에 교회가 있다.
1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1:11 |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
2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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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요한묵시록 |
2:12 |
페르가몬 교회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요한묵시록2장 | |
12 |
“페르가몬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가 이렇게 말한다. |
13 |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안다. 곧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지키고 있다.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희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
14 |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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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는 또한 니콜라오스파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도 있다. |
16 |
그러므로 회개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곧 너에게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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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이 교회의 신도들은 지방 관리들을 이용하여 자행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강건한 믿음을 보인 충성스러운 성도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사탄의 왕좌란 여러 가지로 해석 할 수 있다. 페르가몬 성채 위의 제우스에게 봉헌된 제단이나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성전 또는 로마 통치자의 좌석을 의미할 수 있다.
주님의 진실한 증인이었던 안티파스가 처형된 것은 사탄의 왕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스미르나 교회에서 본 것처럼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지방 관리들이나 박해를 가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왕좌란 로마 지방장관의 재판석으로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사도 성 요한의 기대에 페르가몬은 비록중심 도시는 아니었으나 지방장관은 그 곳에서 정기적으로 재판을 하여 판결을 내렸다. 그는 칼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지신 분'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하여 참수형을 내린 로마의 지방장관과 대조를 이룬다. 그분은 나중에 그들을 벌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들어 높이실 것이다.
따라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높은 좌석에 앉아 심판할 권한을 받게 된다(참조. 묵시 20,4).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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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Izmir), 베르가모(Bergama), 티아디라(Akhisar), 사르디스(Sart), 필라델피아(Alasehir)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페르가모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당대의 세계 최고의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페르가뭄 왕국의 유메네스 2세와 아타루스 2세가 대단한 편찬사업을 펼치는 바람에 알렉산드리아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집트는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했다. 그러자 페르가뭄 왕국에서는 양피지를 만들어 많은 양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양피지라는 말인 Parchment(영), Pergamena(이)는 바로 페르가모(Pergamo)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훗날 양피지는 파피루스를 능가하며 종이가 등장할 때까지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페르가뭄의 도서관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곳에 있던 수많은 장서들은 훗날 이슬람 침입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베르가모 교회 자리에서 미사와 함께 [속죄의 날] 전례를 거행했다. 비록 온전한 건물이나 제단, 제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지만 건물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한쪽 모퉁이 조금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미사를 시작하며 참회예절 부분에서 각자 침묵 중에 지은 죄를 고백한 후 공동 사죄경으로 죄사함을 받았다.
이어지는 말씀의 전례 때에는 일곱교회에서 선포되었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요한 묵시록의 일곱교회에 대한 부분을 독서로 낭독했다. 에페소 교회(2장 1-5절), 스미르나 교회(2장 9-10절), 베르가모 교회(2장 16-17절), 티아디라 교회(2장 19. 25절), 사르디스 교회(3장1b-3절), 필라델피아 교회(3장 8-11절), 라오디게이아 교회(3장15-16.20절)
이 성경 구절들을 각 교회를 대표하는 의미로 이태리 로마에서 생활하는 자매가 한 곳을, 이태리의 알바노에서 선교사로 생활하는 자매가 한 곳을, 러시아의 선교사로 생활하는 자매가 한 곳을, 그리고 한국의 각 분원 자매들이 각각 한 곳씩을, 일곱교회에 해당하는 성경구절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읽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신앙의 선조들이 깊숙이 뿌리내린 터전에서 느끼는 감회는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이 벅차 올랐다.
봉헌 예절 부분에서는 거룩한 순례를 할 수 있도록 큰 축복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좀더 새로워진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표현으로 촛불을 밝혔다. 봉헌된 이 초는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부터 지향을 두고 애지중지 가지고 온 것인데, 이곳에서 밝혀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었다.
▶베르가모에서 아이발릭으로
☞베르가모에서 아이발릭까지는 직선 거리로 50km 정도 이른다.
♣아이발릭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한다.
이날 하루 일정은 쿠사다시에서 이즈밀까지 70km 이즈밀에서 사르디스까지 75km, 사르디스에서 필라델피아까지 30km, 필라델피아에서 티아디라까지 95km, 티아디라에서 페르가몬까지 50km, 페르가몬에서 아이발릭까지 42km에 이른다.
오늘 하루 움직이는 거리만 직선거리로 360km에 이르는데, 오늘은 얼마나 차를 타고 가야 할지 모른다. 쿠사다시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오늘 하루 일정이 순조롭다.
▶memo 6일자 쿠사다시 - 스미르나 - 사르디스 - 필라델피아 - 티아디라 - 페르가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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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발릭항구모습과 아이발릭전경이다.
▶참고 자료 소아시아 요한 묵시록의 7대 교회(자료가 중복되지만, 한곳에 모아서 비교하기 위해서 편집함)
요한 묵시록은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시아누스(81-96년) 치세 말기에 씌어진 것 같다. 도미시아누스 황제는 치세 말기에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으로 자처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배척하는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특히 로마와 에페소에는 웅장한 황제 신전을 짓고 참배를 강요했다. 베르가모에 있던 "사탄의 권좌"(묵시 2,13)도 황제 신전을 가르키는 것 같다. 이런 박해 상황에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로 편지를 보내어 그리스도 신앙을 온전히, 그리고 굳세게 지키라고 촉구했다. 일곱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공동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교회를 뜻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일곱'은 전부를 가리키는 '충만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본디 바오로와 그의 제자들은 아시아 속주에서 전교했다. 바오로가 제3차 전도여행중 에페소에서 무려 27개월 동안 대대적으로 전교했는가 하면, 그의 제자 에바프라가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450여 리 떨어진 라오디게이아에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서, 요한 1-3서, 요한 묵시록 등 요한계 문헌이 씌어질 무렵에는 바오로계 종파는 현저히 약화되고 요한계 종파가 매우 득세했다. 비잔틴 시대에 아시아 속주에 세원진 교회들이 요한 성당으로 불린 사례는 흔한 반면(에페소, 베르가모, 필라델피아) 바오로 성당은 하나도 없다.
■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 에페소 (Ephesus)
[사도 요한 기념 교회]
에페소는 스미르나(오늘날 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올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는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로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자, 로마의 실라(Sylla) 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 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년-서기 14년 치세)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에페소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노고로 발굴된 것이다. 4세기경에 에페소는 소아시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Council of Ephesus)에는 200여명의 주교들이 모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관한 중대한 결졍을 내려 Nestorian 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이 에페소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는 "Mother of God"으로 확인되었고 정통교리인 니케아신경이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였던 네스토리아파는 파문을 당하였다)
■ 스미르나 (Smyrna)
[스미르나 교회 내부(폴리카르포 기념교회)]
사도 요한의 수제자 폴리카르포 주교가 시무(施務)한 곳으로 폴리카르포 교회라고도 한다. 160년 교회를 핍박하던 박해자들이 폴리카르포 주교에게 예수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을때 그는 "예수님을 믿은지 86년 동안 주님은 한번도 나에게 잘못하신 일이 없는데, 어찌 주님을 모른다고 하리오"라고 대답하여 화형에 처해졌는데, 화염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였다.
지금 이즈미르라고 하는 이 도시는 이스탄불 약631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다. B.C 3,000년부터 형성된 이 항구도시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명을 받들어 라시마쿠스 장군이 파고스 산에는 요새를, 해안에는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스미르나는 기원 전27년 로마와 합병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곳은 항구 상업도시였으며 Diaspora Jew들이 이곳에 살았다. 묵시록의 저자는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고하면서, 그럴 때 일수록 신앙에 충실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훈계를 했다(묵시 2,8-11).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 69-155년 생존)의 순교록에 보면 2세기에 실지로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가 있었다. 폴리카르푸스는 예수의 직제자들과 교부들 사이에 연결고리 구실을 한 중요한 교부이다(이레니우스 "반이단론" 3.3.4). 그는 마르치온계 밀 발렌티누스계 영지 주의자들과 설전을 벌이곤 했다. 순교록에 보면 총독이 주교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주겠노라고 하자 주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을 섬긴지가 86년이나 되었소. 그분이 제게 단 한가지도 잘못하신 일이 없었소. 그러니 저를 구원하신 제 임금님을 어떵게 저주할 수 있겠소"
이즈미르에는 주교님의 순교 기념 대주교좌성당이 있다.
■ 베르가모 (Pergamos)
묵시록 2장 12-17절에 나오는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막료 러시마쿠스(Lysimachus) 장군이 베르가모 일대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러시마쿠스의 부하 필레타리우스가 베르가모를 수도로 삼아 베르가모 왕국을 세웠다. 베르가모는 독립된 왕국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앗달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공화국에 헌납하게되고, 베르가모는 아시아 속주에 편입하게 되었다.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천년요세(Acropolis)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궁,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Enmenes 2세 (197 - 159 B.C.)가 지은 큰 도서관이 있고, 가파른 언덕빼기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을 볼수 있다. 또 이곳 시가지 서쪽 외곽지대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년 재위)때 지은 방대한 종합의료시설(Asclepieum)이 있다. 이곳은 BC 4세기부터, 그후 A.D 400년대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황제 Caracalla (A.D. 211 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원형극장을 세워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걷기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이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밑으로 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본래 희랍-이집트 신인 Serapis를 위한 신전이었는데. 비쟌틴 시대에 내벽을 쌓아성당으로 개조하여 사도 요한성당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비쟌틴 시대에 사도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곳의 부의근거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parchment)였다.
■ 티아디라 (Thyatira)
이즈미르(스미르나) 북동쪽으로 105km 악세르 호수 남쪽에 있는 교회터에는 석축 기둥과 담장만 남아 있다. 베르가모에서 동남쪽으로 85키로미터 떨어진 평원 한 가운데 현대도시 아키사르가 있다, 일부러 찾아가봐야 유적이라고는 도심에 자리잡은 비쟌틴 시대 성당 페허가 고작이다.
사도행전 16:11-15에 의하면 사도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비에서 맨 먼저 입교한 사람이 바로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사 리디아라는 여인 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티아디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 했다. 이 비단은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가품이어서 부호들이나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 인들이 티아디라와 사르티스 일대에 리디아 왕국을 건설하여 위세를 떨첬으나 기원전 190년 베르가모 왕국이 이곳을 통치하기까지 여러 왕국들이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 했다. 사도 바올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입교 시킨 사람이 이곳출신이고, 특히 옛 조상의 왕국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물욕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교우들로 부터의 어떤 물질적 도움을 거부하던 바올로 일행이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과 묵시록의 7교회에 보낸 편지중 티아디라에 보낸 편지가 가장 길다 (묵시 2:18-29)는 것
은, 많은 것을 묵상케 한다.
■ 사르디스 (Sardis)
둥근담과 아치형 창문이 교회, 뒷쪽에 거대한 돌기둥만 남아 있는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폐허이다. 사르디스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사르디스교회의 성도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다.
아키사르(티아디라)에서 남쪽으로 70키로미터 지점에 리디아 왕국(기원전 680-546년경)의 수도였던 사르티스 페허가 있다. 티아디라에서 62키로미터 지점에 있는 살리흘리(salihli) 읍내를 거쳐 사르디스에 도착하면 국도 오른편애 웅장한 체육관이 보인다. 서기 193-235년에 세운 체육관인데 다 무너진 것을 하버드대학과 코넬대학 고고학 팀이 1985년-1973년 사이에 발굴 복원했다. 체육관 옆에있는 4세기 말엽의 유대교 회당은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역시 같은 팀들이 복원 했다. 무었 보다도 트몰루스(해발 2,137미터) 산아래 자리잡은 아르데미스 신전이 장관이다.
에페소의 아르메데스 신전이 더 크다고 하지만 초석은 늪 속에 묻혀 있고, 형체는 거의 살아져버린 데 비해 이곳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으로 짓기 시작하여 끝내 마치지 못한 미완성 신전이다. 큰 돌 기둥 78개가 숲을 이루는 이 엄청난 석조물들 오른쪽 귀퉁이에 비쟌틴 시대에 세운 작은 성당이 붙어 있다.
사르디스 주교로 가장 알려진 주교는 부활론을 집필한 엘리토(190년경 사망)이다. 그는 유대월력에 따라 나산달 15일에 부활 축일을 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요일에 예수 부활 축일지낸 서방교회와 오랫동안 전례상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멜리토는 예수께서 "본성으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시다"(Physei thcos on anthropos)라는 정통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멜리토 성인의 축일은 4월1일 이다. 관련 성서 구절은 요한 묵시록 3장 1-6절이다.
■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화산으로 인해 두개의 육중한 돌기둥과 주초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필라델피아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시대에 살고 있었다. 폴리카르포이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신자 10명이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신자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마을)에서 동남쪽으로 45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옛날의 필라델피아. 지금의 알라쉐히르 읍내가 있다.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 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시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 하셨다.
14세기경 주변이 죄다 오스만 부르크군에게 점령 당했으나 필라델피아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자체방어를 하더니1379년 비쟌틴 황제 요한 5세와 오스만 브르크 슘탄 뮤라트1세 간에 정치적 거레로 오스만 제국에 편입 되었다.
B.C 159-138년 버가모(Pergamum)의 왕 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 이 도시가 세워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는 Philadelphia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Sardis)와 베르가모(Pergamum)그리고 라오디게아(Laodicoa)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었다.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로마황제 디베리우수(Tiberius)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크게 도와주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며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그 크기는 약 100m×50m 이고. 신전 둘레는 56개의 석주가 들어있다. 이 신전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로마황제 숭배의 도시에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비잔틴시대에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신전의 후면에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 라우디게이아 (Laodikeia)
십자가와 기둥 등 퇴락한 벽체가 흩어져 있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물이 9km가 떨어진 라우디게이아까지 흘러 오면서 물이 식어 미지근하게 된다.
에페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7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구 20여만명의 테니즐리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8키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리오디게이아 페허인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 임금 안티오쿠스 2세 (기원전 261-252년 재위)가 이 지역의 전략적 요소 때문에 도시를 창건하고 왕비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이아라고 명명했다.
사도 바올로가 제3차 전도 여행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때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는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450여리 떨어진 곳에 골로사이 교회(골로1,6-7)와, 히에라폴리스와 리오디게이아 교회도 세운 것 같다(골로 4,12-16).
요한 묵시록의 작가는 이 교회를 호되게 꾸짖었다(묵시 3,14-22). 이곳의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비쟌틴 제국은 13세기까지 이고을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루크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710년과 1899년에 지진으로 심하게 파괴된 이곳을 1961-1963년 케나다 퀘백시의 라빌대학교 고고학팀이 발굴작업으로 . 로마식 야외 운동장(Stadium)과 두 개의 큰 야외 원형극장 터가 발견 되었다. 아직도 유적 대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발릭에서는 휴식만 취한다. ☞아이발릭 해변이 좋다는데?
♣아이발릭
에게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 숲 가운데 있는 매력적인 항구도시이자 에게해의 인기있는 휴양도시이다.
나무와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들은 도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한다. 아이발릭 해변의 물은 한여름에도 맑고 시원하며 해변의 모래는 금빛으로 빛난다. 아이발릭 근교에는 많은 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Cunda섬은 가장 유명하다. 쿤다섬은 아이발릭에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일몰이 유명하다.
Cunda섬의 이른 아침은 작지만 유명한 그리스 지방의 음식점들이 해산물 음식을 만드는 냄새로 생기가 가득 넘친다. 또한 근처의 Seytan Sofrasi(The Devil's Table)에서는 아이발릭만 안의 22개의 아름다운 섬들이 펼치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이 곳은 용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언덕 위에 테이블 모양으로 보이는 암석이 있는데 이것을 악마의 테이블이라 부른다. 악마의 테이블 근처에는 발자국이 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그 발자국을 악마의 발자국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