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성지터키,그리스

필리피,암피폴리스,네아폴리스,데살로니카,메테오라

월요일은자유인 2007. 4. 2. 16:48
 

▶8일 째

☞8일째 일정은 카발라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에 필립피로 이동을 한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필리피가 위치해 있다. 필리피 알파성당, 로마식 도시 유적지, 사도 바오로 감옥, 리디아 기념성당, 세례터를 순례한 후, 약 60km 떨어진 아폴로니아로 이동을 한다. 아폴로니아에서 사도 바오로 기념성당을 순례한 후, 테살로니카로 이동을 한다. 아폴로니아에서 직선 거리로 65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테살로니카에서는 화이트 타워와 성디미트리우스 성당을 순례한다. 테살로니카를 순례한 후에는 다시 숙박을 위해서 메테오라까지 가야 하루 일정이 마감된다. 테살로니카에서 메테오라까지는 직선 거리로 170km에 이른다.  아침부터 순례를 시작해서 오늘 하루 이동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조식 후 필리피로 이동을 한다.  화살표 끝부분이 필리피다.

☞카발라에서 필리피까지는 직선거리로 16km 정도.


♣필리피(여행사:지역)


        필리피는 네아폴리스에서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 산을 중심으로 위치한 도시이다. 서쪽으로 해발 1956m인  Pangeo 산이 있는데 금광지로 유명한 곳으로 필립 왕은 이곳에서 1년에 1천탈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했다. 본래 이름은 ‘샘’이라는 뜻의 크리니데스였는데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가 B.C 358~357년에 이곳에 대 이민단에 보내고 도시 지명을 필립보로 개명하였다. 필립2세가 파우사니아스의 반역으로 후처의 딸의 결혼식 피로연 중 에게에서 B.C 336년에는 살해 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왕위에 등극한 후에는 화려하게 도시를 개축하고 더 많은 이민단을 보냈다.

        B.C 167년에 마케도니아가 로마에게 패한 후, 필립보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로마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지방의수도는 암비볼리가 되었다. 그후 B.C 146년에 재편제 되어 수도가 테살로니까로 바뀌었다.

        B.C 42년의 필리피 전쟁 이후 로마의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이민단에 의해 그 도시는 또다시 확장 되기도 하였다.

        A.D 330년 콘스탄티노플이 동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 필리피는 그리스인들에게 비잔틴 제국의 매우 소중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나, 473년 고트 족이 그리고 7~8세기 동안에는 슬라브족이 9세기에는 불가리아 인들이 또한 15세기에는 무라드 1세라는 터키 왕이 지배하였다.

        사도 바울은 A.D 49년 가을에 드로아에서 네아폴리스를 통해 필리피에 다달았다. 이곳에 일정한 장소를 정해놓고 날마다 기도하는 곳을 다니다가 귀신들인 여종을 보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방시켜 주기도 하였으며, 문 밖 강가에서 전도 중 루디아를 만나 필리피 교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또는 애매하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도 받았으나 오히려 간수와 그 주변 인물들까지 구원해낸 전화 위복의 역동적인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3

신약성경

사도행전

16:11 

필리피에서 리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이다

4

신약성경

사도행전

16: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5

신약성경

사도행전

20:6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뒤에 필리피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트로아스에 있는 그들과 합류하여, 그곳에서 이레 동안 지냈다.

6

신약성경

필리피서

1: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오로와 티모테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필리피의 모든 성도에게, 그리고 주교들과 봉사자들에게 인사합니다.

7

신약성경

필리피서

1:3 

필리피 신자들을 위한 기도

8

신약성경

필리피서

4:15 

필리피 신자 여러분, 복음 선포를 시작할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여러분 외에는 나와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여러분도 알고 있다.

9

신약성경

테살로니카

1 서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전에 필리피에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우리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오로와 필리피교회
        여행 기간 중에 바오로와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일하도록 특별히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사도행전 16:9-11). 그 선교사들은 유럽 땅에서 일을 시작할 때 자신들이 로마세계라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1. 필리피 교회의 설립과 구성원
        필리피 교회는 사도행전 16:12-40의 목격자 진술(우리 단원)에서 기록되고 있는 바대로 이른바 바오로의 2차 전도여행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구분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얻은 개종자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루카의 기술은 몇 명의 대표적인 개종자들-즉 장사하는 여인 리디아와 귀신들린 여종(그녀의 개종이 실제적으로 주장되고 있지는 않다) 및 로마 간수-에만 집중되고 있다. 리디아와 간수의 경우 그들의 가족까지 개종자들의 수에 포함된다.
        에우오디아와 신디케뿐 아니라 클레멘스도 이때 개종한 사람들인지는 분명치 않다(필리피 4:2,3). 개종자들은 그 신분이 아주 다양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다. 필리피에는 회당을 형성할 만큼 충분한 유대인들이 없었다. 처음에는 필리피교회에 여자들이 두드러졌던 것은 마케도니아 지방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상황과 일치되는 현상이다.
        루카는 이 새로 시작한 교회를 돕기 위해 필리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필리피 선교에 대한 그의 기술이 종결됨과 동시에 「우리 」단원이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다. 바오로와 그의 개종자들 사이에 강력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서신의 내용들로부터 뿐 아니라 바오로가 데살로니가와 코린토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이 바오로에게 급전적인 도움을 보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4:15 이하; 고후 11:9)

        2. 바오로와 필리피 교회와의 관계
        바오로 자신이 필리피 교회의 헌신과 열심에 대해서 직접 밝히고 있다. 바오로가 필리피를 떠나 잠시 데살로니가에 가 있던 동안(사도행전 17:1-9) 필리피 교회는 그의 쓸 것을 위해 선물을 적어도 두 번 보내었다(필리피4:16). 필리피 교인들은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궁핍 중에 있을 때에도 그러한 선한 일을 계속 하였다. 곧 바오로가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의 쓸 것을 처음으로 공급했던 것은 코린토 교회가 아니라 필리피 교회였다(2코 11:9; 필리 4:15).

        결코 모든 교회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몇몇 교회가 그 후 필리피 교회의 그러한 본보기를 추종하였다. 바오로는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2코 11:8)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필리피 신자 여러분, 복음 선포를 시작할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여러분 외에는 나와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 4:15).
        그러나 바오로에 의한 교회들 중 어느 교회도 행위 면에서 필리피 교회만큼 전적으로 헌신적이지 않았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화한 자들과 (비선교적이거나 완고한 요소의)바리새적인 사람들의 협소한 편견을 초월해 있는 것을 자체의 영광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비록 안티오키아 교회가 필리피 교회의 그러한 일에 호의를 보였다는 것 외에 무엇을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선교 활동을 환영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헬라 교회였으며 이러한 세계적인 캠페인에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필리피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로마 제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려는 바오로의 전도 운동의 실제적인 지지를 위해 열의를 갖고 끊임없이 합심하였다. 필리피 교인들은 모든 시간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려는데 힘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행위가 자발적이며 지속적이었다는데 있다.

        안티오키아의 헬라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호소에 응하여 자신들의 개종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기부금을 보내기는 하였으나(사도행전 11:29) 처음에는 바오로의 위대한 선교 사업에 있어 실제로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바오로의 위대한 선교 사업에 있어 처음부터 그와 협력했던 영광은 바오로의 “기쁨의 면류관”(필리피4:1)이 된 필리피 교회에 속한다. 필리피 교회는 복음 사업에 있어 바오로와 참으로 ‘협력’하였다. 필리피 교회만이 처음부터 바오로와 ‘교제’하였다. 왜냐하면 교제란 말이 본문 단어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이다(필리피 1:5; 4:14). 필리피 교인들만이 세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은혜에 있어 처음부터 바오로와 “은총에 동참한자”(필리피1:7)이었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에 대해, 아마 그가 그의 서신들에게 말한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하였을 것이다. 필리피 교인들이 바오로를 직접 접할 “기회가 없던”(필리피 4:10) 동안 그들과 바오로 간의 마지막 “친교”의 실례는, 그들의 사자와 사절이었던 에파브로티토스와 티모테오를 바오로의 쓸 것을 위해(필리피 2:25) 보냈던 그때, 즉 바오로가 로마에 있었던 때였다. 그 당시 그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바오로에게 극진했었으며 그들의 선물은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것 ”(필리피 4:18) 이었다. 그들은 에파브로티토스와 티모테오 편으로 바오로에게 편지를 보내었을 것이며 이에 대해 바오로는 그들에게 또 다른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내었을 것이다(필리피 3:1).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갈라디아, 아시아,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야 교회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모음에 있어 필리피 교회에 크게 의지하였다. 아카이야에 있는 교회들은 현대의 어떤 교회들처럼 약속하는 데는 민첩하였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데는 더디었다. 그들은 티모테오의  격려 하에 만 일년 전에 약속을 하였으며(고후 8:10) 바오로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을 분발시켜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아카이야 교인들의 즉각적인 서약을 상기시켰다(고후 9:2). 그러나 바오로가 이번에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후함과 즉각적인 헌납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약속 이행을 위해 아카이야 교회들을 분발시켜야만 했다(고후 8:1-15; 9:1-5).

        바오로는 만일 자기가 아카이야 교회들의 후한 약속들을 자랑했던 마케도니아 형제들 중 몇몇 사람과 함께 아카이야 교회로 간다 하더라도 그들(마케도니아 교회들)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 않기를 원했다. 이것은 바오로가 직면했던 실제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는 습관을 오랫동안 발휘했던 것은, 곧 마케도니아 교회들과 아카이야 교회들에 대해 보조를 설정한 것은 분명, 가난하면서도 후했던 필리피 교회였다.

        오늘날 필리피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리피 교회의 초기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해 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우스(초창기의 교부이자 순교자로 일명 ‘테오포로스’(Theophoros, bearer of God)라고도 불리는 성 이냐시오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는 시리아 출신인 듯하며,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였음이 분명하고 개종자이다. 그는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하여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혹은 제3대 주교로 임명되어 축성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이냐시오는 40년 동안 교회를 다스리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로마(Rome)로 이송되었다. 그를 호송하던 배는 소아시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를 통과하여 마침내 로마에 당도하였다. 그의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호송 책임자는 그를 아주 잔인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어느 공식 경기의 마지막 날인 12월 20일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는 로마로 끌려오는 동안에 여러 통의 편지를 썼고, 스미르나(Smyrna,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서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게도 서한을 보내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전하라고 권고하였다. 또 교회, 결혼, 삼위일체, 강생, 구속 그리고 성체성사에 관한 그의 교육적인 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서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문헌들이다)
는 2세기 초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죄되어 맹수들에게 내던져졌던 로마로 가는 도중 필리피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필리피 그리스도인들은 이그나티우스를 친절히 대하였으며 안티오키아에 있는 그의 고향 교회에게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에게 동조의 편지를 써 보내어, 바오로 서신의 유포에 관한 간접적인 정보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그나티우스의 어떤 편지의 사본들을 자신들에게 보내도록 그(폴리카르포)에게 요청하였다. 폴리카르포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로와 격려의 말로 가득한 편지를 필리피 교회에 써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와 깊은 교제를 가졌으며 그 이후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진정으로 헌신했던 교회를 말하라면 당연히 필리피 교회를 꼽을 수 있겠다.


        필리피는 기원전 35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만든 요새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성 밑에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군대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카시우스 군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는 8,000명의 병사를 잃고 패전하여 자살했으며,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는 1만 6,000명의 병사를 잃고 승전했다.
        이후 필리피는 ‘중동의 작은 로마’로 불리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 통치하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누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고 스스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 칭하였다.

        필리피가 발굴된 것은 1862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였다.
산 위에는 아크로폴리스 산성의 잔해가 남아 있고 평야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도로 옆에 디오니소스 신전과 바오로가 갇혔던 감옥이 있다. 필리피에 도착한 바오로와 실라는 성문 밖 강가에서 몇 명의 여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리디아였다. 리디아는 소아시아의 티아디라(티아디라) 출신의 옷감 장수로 티아디라에서 자색 옷감을 가져와 필리피에서 파는 활동적인 여인이었다. 평소에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던 리디아는 바오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가족까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이로써 리디아 일가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륙에서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가족으로 기록되었다.

        바오로가 필리피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지각티스 강은 폭이 좁아 큰 개천 정도로 보이는데  강가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리디아 교회가 있다. 리디아가 옷감장수였음을 의식해서인지 내부 전면을 채색유리로 단장했다. 지각티스 강에서 리디아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온다.

        필리피에서 바오로와 실라는 이상한 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다 (사도행전 16장 16 - 34)

16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17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8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19 

그 여자의 주인들은 돈벌이할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오로와 실라스를 붙잡아 광장으로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20 

그리고 그들을 행정관들 앞에 데려다 놓고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유다인인데 우리 도시에 소동을 일으키면서,

21 

우리 로마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에도 지키기에도 부당한 관습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22 

군중도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필리피 신자들을 위한 기도 (필리 1,3-4)

3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가 고초를 겪고 세운 교회라서 바오로는 어디를 가나 필리피 교회를 생각했다. 그가 이 교회를 세운 것은 2차 전도여행 때였다.

        교인들로는 리디아를 수반으로 한 경건한 사람들과, 바오로를 석방했던 간수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바오로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한 에바프로티모테오가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사도행전 17:1) 현재 필리피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오로가 갇혔던 감옥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memo

 

 

 



♣필리피 알파 성당(여행사)

▶memo

 

 

 



♣로마식 도시 유적지(여행사)

▶memo

 

 

 



♣사도 바오로 감옥(여행사)

        바오로의 감옥
        필리피의 유적들은 거의 다 로마시대 또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필리피산 동남쪽 기슭에 3세기 반원형 노천극장이 복원되어 있다. 거기서 서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역시 산 기슭에 5세기 대성당터가 있고 그 끝 국도변에 사도 바오로가 갇혔다는 바오로의 감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감옥이 아니고 로마 시대의 저수지였다고 한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여기서 전도하다가 잠시 옥고를 치렀고 그 기회에 간수 가족을 입교시키게 된다.

        바오로와 실라의 감옥터는 바실리카 A의 입구 Propylaea의 계단 오른쪽 옆에 위치하고 잇는데 5세기부터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필리피의 최고 명소이다.

        사도 바오로는 당신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시켰다는 황당한 죄목으로 옷을 찢기고 매맞고 재판 과정도 없이 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 깊은 옥에 갇혔다. 그날 밤 바오로와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하며, 이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죄수들의 차꼬가 풀어지고 옥문이 다 열렸다. 열심히 졸던 간수는 죄수들이 단체 행동 했을 것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자결하려던 중 바오로의 큰 소리에 놀라 정신을 가다듬고 두려움 속에 무릎 꿇고 구원을 요청 했다.

 

▶memo

 

 

 

♣리디아 기념 성당 (여행사)


        필리피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북쪽으로 2㎞떨어진 곳에 리디아 기념교회가 있다. 리디아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필리피에서 처음 입교한 자주장사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곳의 특징은 필리피의 옛이름이 왜 샘이라는 뜻의 “크레미데스”였는지를 처음방문한 사람 누구라도 알만큼 물이 많은 지역이다. 간기테스(Gangites)강가인것도 그 이유에 속할 것이다.
        
리디아 기념교회는 1972년도 새워졌고, 물이 많아서인지 리디아 기념교회에 20~30m 조금 떨어진 곳에 강물이라고 말하기에는 협소하지만 한겨울에도 물이 흐르는 개울 한 중앙에 ♣세례터가 있다. 이 세례터를 리디아 당시의 빨래터라고들 하지만 근거 자료는 없다. <세례터>
        이 곳에 관한 자료는 필리피 시 밖에 위치한 아치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이 시에 승인되지 않은 종교를 갖고 들어오는 것을 금지함”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오로가 필리피에 발을 딛고 필리피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기도처를 찾았다. 그런데 그 기도처가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사도행전 16장 13절).
        .필리피에 유대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회당이 있을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문에 적인대로 종교적 제약이 있어기에 이곳의 유대인들은 간기테스(Gangites)강가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회는 흐르는 물이 있는 야회에서 갖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바오로가 찾은 기도회와 기도처는 바로 도시밖 강가인 이곳 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리디아의 고향은 티아디라 (사도행전 16장 14절)이며 리디아라는 이름은 티아디라의 리디아(Lydia)에서 비롯되어진다 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충청도 출신의 부인이 새로 이주해오면 이름 보다는 충청댁이라고 불렷던 것처럼 리디아도 이렇게 불렸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유물인 편지가 1972년에 필리피에서 발굴 되었다. 그 내용에는 두아디 태생의 자주색 염색업자 안티오쿠스에게 필리피 시의 후원자라는 명예를 준다는 것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안티오쿠스가 리디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 리디아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유물이라 여겨진다.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도바오로와 필리피 지역의 그리스도형제들에게 자신의 집까지 개방 (사도행전 16장 40절)할 정도의 헌신적인 리디아의 생활 태도와 그보다 더 그녀의 가정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역사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1972년도에 세워진 리디아 기념교회당 내부 정면에는 간결하게 사도바오로와 리디아가 스테인 글라스로 그려져있다.


▶memo

 

 

 


♣세례터.(여행사)

리디아 성당 옆에 있다.

▶memo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바오로 사도가 리디아 부인을 만났다는 지각티스 강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짐작했던 대로 지각티스 강은 폭 1.5미터 정도나 될까 싶은 그냥 개울이었다. 개울물은 제법 콸콸 흘렀다. 여름에는 멱도 감을 수 있을 수 있을 만큼 물이 많았다.
        개울가엔 리디아 세례 기념으로 자그마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2-30미터 떨어진 곳엔 아담한 기념경당이 세워져 있었다. 경당 구조는 제단 중심이 아니라 세례대 중심이었다. 성당 한가운데 커다란 침례예식을 할 수 있는 세례당이 있는데 아주 멋졌다. 가끔 이곳에서 세례예식이 거행된다고 한다.
        우리는 지각티스 개울가에서 미사를 드리고 다시 테살로니키를 향해 길을 떠났다


♣암피볼리(암피폴리스)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 

바오로 일행은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바오로가 걸었던 ✯에그나티아 가도는 현재 포장도로 좌측에 일부만 남아 있었다. 암비볼리(Amphipolis)는 필리피에서 남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스트리몬(Sterimon) 강 유역에 있으며 에게해부터는 약 4.8㎞ 지점이다.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가도에 있던 이곳은 마케도니아 첫번째 지방의 수도였다.

☞카발라에서 필리피를 거쳐 화살표 끝이 아폴로니아 여정.

☞직선거리로 필리피에서 아폴로니아까지는 50km

        드라게 지방의 성읍이자 무역의중심지로 원래는 스트리몬 강의 동쪽 유역에 위치했던 엔네아 호디(아홀 길)라고 알려진 드라게 성읍 중 하나 였다. 이곳은 BC 480년 파사(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을 받았는데 그는 이때 이곳에 다리를 놓고 강을 건넜다.

        암피볼리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B.C 436년 경 하그논 치하 때의 아테네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B.C 423년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에게 넘어가기도 했으나 B.C 421년 니시아스의 강화로 다신 아테네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암비볼리는 BC 497년에 다리오로부터 도주해온 밀레도 출신 아리스타고라스가 살해된 곳이다. 그리고 32년 후에 아테네인들은 1만명을 보냈으나 그들도 멸절되었다. 마침내 BC 437년에 니키아스의 아들 하그논이 또 다른 아테네인들을 데리고 와서 애도니족을 몰아내고 성읍의 이름을 암비볼리(성읍의 둘레)라고 불렀으며 동편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았다.

        BC 167년 마케도니아가 로마인에 의해 4개 지방으로 분할될 때 암비볼리는 스트리몬 강에서부터 네스토스까지 해당하는 첫번째 지역의 주요 도시로 선정되었다. 암비볼리에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의 초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공회당과 마차 경주장까지 갖추었던 큰 도시였다. A.D 168년 이시동안 마케도니아의수도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곳은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자유 성읍의혜택을 누리기도 했는데 암피볼리 지역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피볼리의 지명은 암피포스와 포필리아의 합성어라고도하며, 또는 이 성읍이 굴곡진 지형으로 거의 완전히 스트리몬 강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강과 강 사이의 도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오로는 49년 말 경에 필리피에서 데살로니카로 가는 도중에  에그나티아 길을 통해 이곳 암피볼리를 지나갔다.

        성경에는 이곳에서의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그의 복음 전파로 인해 이 도시는 A.D 692년까지 주교가 거주는 관할구역이 되었다. 암피볼리에서 발견된 유적 가운데 네 개의 성당과 대리석 강단으로 장식된 경당, 그리고 궁궐같은 주교관을 볼 때 두드러진 그리스도교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8~9세기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되어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비잔틴 시대인 13 ~ 14세기에 새로운 거주자가 몰려와 스트리몬 강변과 성벽에 2개의 큰 망대를 세우고 도시 재건에 힘을 모았지만,  현재는 인구 1천명 내외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지금도 암피볼리는 그리스, 로마, 그리고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코린토 양식의 원주 기둥의 주랑들과 채색 모자이크, 목욕탕, 공회당, 전차 경기장, 마케도니야 병사들의 묘지, 비잔틴 성벽과 망대, 시장터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memo 암피볼리

 

 

 

 


♣아폴로니아(여행사:지역)

1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 

바오로 일행은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아폴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로부터 48㎞, 데살로니키로부터 61㎞ 정도 떨어져 있는 볼레(Borle) 호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에그나티아 가도에 접해 있는 이곳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도시와 구별하기 위하여 믹도니스의 아폴로니아라고 불린다. 동일 지명으로 ♣2개의 아폴로니아가 6k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우측이 암피폴리스지역, 좌측 원이 아폴로니아 지역


        지명 유래는 그리스 신화와 등장하는 아폴로 신(예언과 신탁을 통해 인간에게 미래의 일과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뜻을 전달했다는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 암피 볼리보다 더 작은 마을로 500명 내외가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감이 마을 주민에게 가득히 배여 있다.

        바오로와 실라(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성 실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 공동체로 진출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마르코(Marcus, 9월 27일)라는 요한 문제로 언쟁했을 때, 그는 바오로를 수행하여 그의 제2차 전교 여행지인 시리아(Syria), 실리시아(Cilicia) 그리고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순회하였다(사도 15,38-40). 성 실라는 필립비(Philippi)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고발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사도 16,19 이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는 유대인들의 폭동에 직면하였으나 교우들이 그날 밤으로 베레아(Berea)로 떠나게 주선해 주었다(사도 17,5-10). 사도 바오로가 실바누스(Silvanus)라고 언급한 사람(2고린 1,19)은 실라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또한 베드로 1서 5장 12절에 언급된 실바누스라는 인물 역시 사도 바오로가 알던 실라와 동인 인물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코린토스(Corinthos) 교회의 초대주교였고 마케도니아에서 운명하였다.)는 필리피에서 테살로니카로 가는 길에 이 마을을 통과했으며 그로 인해 마을 입구에는 ♣바울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고, 마을 중앙에는 가장 오래된 고목 앞 ♣샘터에 바오로 강단과 그가 들러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대리석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오로는 암비볼리를 떠나 데살로니키로 가던 도중 이곳에 잠시 들렀다. 조금은 찾기 어려운 아폴로니아에 도착하자 별다른 유적은 없고 작은 바위에는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폴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키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라는 사도행전 17장 1절 말씀이 새겨진 ♣비마(강단의 일종)가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로마시대 목욕탕이었다고 전해지는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필립비에서 테살로니카로 가는 중간에 암피폴리스를 지나는데(지진으로 유적지는 없어짐) 그 길가에 기원전 4세기에 만들었다는 거대한 사자상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포효하며 달려들 듯한 쩍 벌린 돌사자 입 속엔 새가 둥지를 튼 듯 조그마한 새들이 겁도 없이 포롱포롱 날며 드나들고 있었다. 귀여운 것들, 사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버스가 언덕에 멈춰섰다. 그래도 원형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에그냐티아 국도였다. 지금은 다 붕괴되어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터키에서 북유럽까지 이어진 대로였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닥에 깐 돌은 로마 아피아 가도처럼 커다란 돌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돌들이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분명 이 길을 지나셨을 텐데, 어디를 딛고 지나셨을까?

▶memo

 

 

 



참고 자료(로마의 도로)

        성서의 지리적배경이된 도시들을 방문하면 성서배경당시의 건축물들은 극소수로 남아있고 대부분이 로마시대의 것이나 아니면 중세기 때의 것들이 남아 있다. 이 도시들에서 대부분의 고대 도시들은 로마의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고대도시들에 남아 있는 로마의 건축물에는 원형극장, 공회당등 많은 것이 있지만 문화제국 그리스와 구별되는 것은 ✯도로이다.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지리지"를 쓴 스트라보는“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3가지를 제공했다. 길, 수도, 하수도가 그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로마의 도로는 로마지배당시 무척이나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듯 한 나라의 특징이 되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도로에 대해 알아보고 성서와 관련된 로마도로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의 도로는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로마가 자국을 방어하며 국력을 키워 나간 것이 아니라 개방적으로 타국을 공격하며 국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선택한 국가방침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는 통일된 특정 지역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보다 속도전 개념에 입각한 신속이동 배치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는 제국의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변환 배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을 네트워킹하고 이것을 시스템으로 완성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방침에 입각해 군사적 용도로 도로가 만들어 지고 사용되었다. 또한 로마의 도로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신도로 개통은 해외전쟁에서의 승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뒤지지 않는 공적으로 평가되었고, 이러한 도로에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처럼 제국을 휩쓸었다는 점이다. 또한 진압한 반란군 (기원전 71년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와 그의 동료 6천명)을 로마제국의 1번 도로라 할 수 있는 ‘비아 아피아’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으로 선전하면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정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용도 외에 로마의 도로는 동맹도시와의 연결을 용이하게 하여 단순히 영토적 의미에서의 통합이 아닌 문자와 종교, 로마법, 통화, 건축술, 과학, 예술, 의술, 패션, 사상, 발명품 등 최고급의 문명이 거의 그대로 전 지역에 동일하게 전파되어 사회문화 정치경제적으로 통합을 가져왔다. 이러한 통합은 훗날 로마제국 붕괴 뒤 형성되어지는 유럽에 동일한 정체성을 가져다 주었으며 문명적 동질성이 유지하여 갖가지 요소가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경합하여 서구문명의 발전 단계를 제공하는 역활을 하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로마의 도로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졌는데 이는 도로를 따라 고대 신을 모시는 갖가지 시설물이 들어선 것이라든지, 묘지가 늘어선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렇게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어진 로마의 도로는 그 제작방법이 독특하고 견고하여 오늘날 까지 남아 성서고고학과 성서지리학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독특한 로마의 도로의 제작 방법은 우선 도로가 될 곳의 땅을 1~1.5m 깊이로 파고 큰 돌을 가지런히 놓는다. 그 위에 석괴(石塊) 또는 쇄석(碎石)을 올놓은 다음 다시 자갈이나 일정한 크기의 사암(砂岩)을 깐 후 이를 화산회(火山灰)로 굳혔다.  판석(板石)을 깔아놓은 돌을 잘라서 서로 물리게 하여 움직이지 않도록 짜맞추되 가운데를 볼록하게 만들었고 직선을 이룬 길 양쪽에 배수구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도로의 폭은 보통 5∼10m, 산악지대인 경우는 2∼2.5m 정도인데, 군용도로의 목적상 대량수송을 위해 개발한 사륜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가로수는 심지 않았다.
        이와같이 독특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지고 수많은 용도로 사용되어진 로마 도로에는

로마와 동부 아드리아해의 염전도시를 연결하는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가 있으며

그리스를 향한 타렌툼에서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그리스인 식민자들에 의해 건설된 비아 아피아(Via Appia)가 있고,

알프스-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이베리아반도까지 이어지는‘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가 있다.

④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관통하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있다.
        처음에는 군사적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로마도로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무역의 교류를 담당)으로 되어 도로가 지나는 수많은 도시들에게 팽창과 발달을 가져다 주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주로‘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언급되어진다. 신약성서에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 가 경유되는 도시들 중 종종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점인 아폴로니아와 혼동되는 아볼로니아가 있다.

        사도바오로가 제2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마케도니아이고 이 마케도이아에 있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이용하여 다녔다. 이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는 기원전 130년 무렵 건설되었고 브룬디시움에서 배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항구도시 아폴로니아에서 바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이어진다. 이 도로는 디라키움을 거쳐 마케도니아를 종단해 그리스 북부 항구 데살로니카를 경유하며 암피폴리 필리피를 거쳐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가면 마침내 비잔틴(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이르게 된다.
        성서 사도행전 17장 1절에 나오는 도시들 중 아볼로니아는 아폴로니아를 말하는데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점인 아폴로니아와 동명의 도시이다. 여기뿐만 아니고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들은 또 있다.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경유하는 도시들은 오늘 날 많은 유적지와 유물을 제공해주고 있고 현재에도 번성한 도시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달리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의 시작도시와 동명인, ‘파괴, 아볼로에 속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역사의 흔적을 깊은 전원의 고요함에 묻어두고 있다. 이 도시는 암피폴리(암비볼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데살로니카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반경 6km내외에 인접한 곳에 신 아폴로니아가 있어 성서의 기록과 그들의 전승으로 겨우 사도바오로가 다녀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옛 과거의 도시명성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곳이다.

        또한 이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다른 성읍들과 구별되는 지명이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주장의 내용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미그도니아(Mygdonia)에 있는 한 촌락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발견되었던 동전들로 근거를 삼아 마을의 기원을 B.C. 432경으로 추정하며 위의 주장에 더욱 힘을 주고 있다.
        로마의 신들 가운데 태양의 신인 아폴로의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만들어 졌을 당시 로마도로가 관통하는 다른 도시처럼 번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암피볼리스보다 더 작은 마을로 5백명 내외가 살고 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시끌벅적한 로마 군사들의 칼과 발자국소리가 듣기싫어 귀를 막고 흥청망청 흐느적거리는 춤사위가 싫어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모든 로마 도로의 혜택을 무색하게 만든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는 성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역사속에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가 관통했다는 사실조차도 상실하였을 것이다고 생각되어진다.
        아폴로니아(아볼로니아)의 사도바오로가 필리피에서 데살로니카로 가는 길에 이 마을을 통과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교회와 마을 중앙의 오래된 고목 앞 샘터에는 바오로로의 강단과 그가 들러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의 대리석 안내판만이 스산한 겨울추위와 싸우고 오는 순례단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아폴로니아 사도 바오로 기념 성당 유적 순례(여행사)

▶memo

 

 

 


♣데살로니카(여행사:지역)

☞아폴로니아에서 테살로니카까지는 직선 거리로 65km 정도이다.

데살로니카의 역사

1. 데살로니가의 위치와 도시적인 특징
        데살로니가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가까운 테르마이코스 만에 위치한 중요한 국제 항구 도시로서,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춘 항구였다. 사도 바오로 당시 데살로니아는 로마 령이었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이 도시는 매우 중요한 항구 도시였으며, 많은 이교도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아카이야와,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코린토, 그리고 에베소와 함께 큰 항구로 각광받고 있었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에그나티안 도로에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주변의 중요한 도시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바오로 당시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 중에 하나였으며, 행정상으로나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도시는 바오로 선교 활동을 위한 훌륭한 본거지가 되었다.

        바오로와 실라는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추방당한 후에(사도행전 16:11-40) ♣에그나티아 도로를 따라 ♣암비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경유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 여행은 대략 160km에 달하는 긴 여행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 도시의 인구는 어림잡아 20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의 대부분은 헬라인들이었으며, 상당수의 로마인과 동방인과 유대인도 살고 있었다(유대인은 약 2만 명이었다). 고대에 상업이 번창한 곳에는 대부분 유대 상인들이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유대인 회당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바오로가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다(사도행전 17:4). 데살로니가에는 수많은 헬라의 종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도덕적으로 매우 문란한 일들을 했다. 이로 인해 환멸을 느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대교에 매료되어 회당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2. 데살로니가의 역사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데살로니가는 B. C. 315년에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이었던 카산더에 의해 세워졌다. 카산더는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자매였던 아내(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이 곳을 "데살로니가"로 부르게 하였다. 이 신설 도시에 식민된 자들은 카산더에 의해 파괴된 지역 내의 약 26개 성의 거민들이었다. 그 성읍들 중에는 데살로니가로부터 동남방 11.2km 가량 떨어진 곳의 데르마도 들어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데살로니가의 이전 명칭이 데르마였다는 스트라보의 대충적인 진술을 분명히 설명해준다.
        주전 167년 마케도니아가 네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스트리온강에서 악시우스강까지 이르는 제2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주전 148년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데살로니가는 주의 수도가 되었고 주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주전 42년에 데살로니가는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를 도운 일로 인해 "자유 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통치했으며, 로마 총독이 부임해 있기는 했지만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는 다른 헬라 도시들처럼 몇 명의 관원들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 등을 통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곳은 세계 1차 대전 중에 연합군이 주둔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나치가 이 곳에 있는 6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또는 추방하기도 했다. 현재 데살로니가는 약 3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살로니카(Salonica)또는 데살로니키(Thessaoniki)라고 부르고 있다.

3. 현존 건물
        데살로니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북쪽과 동쪽 성벽은 현재도 남아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비잔틴시대의 것이지만 적어도 일부는 보다 고대에 축조된 것이다. 비아 에그티나(Via Egnatia)는 데살로니가를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이 길은 나중에 ♣바르다르강(막시우스강)의 명칭을 따서 바르다르가도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다시 고대 명칭을 되찾았다.
        비아 에그나티아에는 두 개의 ♣로마식 아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그 도시의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1879년 파괴당할 때까지 ♣바르다르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주후 297년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친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이다. 후자의 북쪽에 있는 둥근 로마식 건물은 아마 그와 동시대에 건축된 것 같은데 후에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로 바뀌었다. 광장은 아마 비아 에그나티아의 북쪽, 즉 이 도시 한복판에 있었을 것이다. 경기장은 동남쪽 성벽 가까이에 있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는 바르다르문에서 채취한 비문과 데살로니가에서 발견된 수개의 다른 비문에는 폴리타르크(Politarch: 도시의 최고 행정관)로 불리는 관리들이 언급되고 있다.
바르다문에 새겨진 글의 연대는 아마 주전 30에서 주후 143년 사이일 것이다. 다른 비문중의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치세시의 것이다. 멀리 떨어진 촌락에서 데살로니가로 운반된 또 다른 비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비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17:6에서는 폴리타르크 라는 칭호가 데살로니가 성의 통치권자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 비문 발견 이전에는 그 단어를 달리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최근 고고학적 연구
        데살로니가에서는 고고학적 조사로 ♣로마시대의 공중집회소가 나타났는데, 그 집회소에는 적어도 가로 100m, 세로 64m 이상 되는 넓은 광장이 딸려 있고 바닥은 포장이 되어 있었다. 집회소 동쪽 끝에는 2중으로 된 주랑이 있으며 그 주랑에는 코린토식의 원들이 있고 기하학적으로 도안된 모자이크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다. 집회소의 남쪽 경계에도 한 주랑이 있는데, 그 주랑은 많은 방들을 숨기고 있는 지하복도가 떠받치고 있으며 그 방들에는 그리스도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집회소 건물의 연대는 1세기나 2 세기 초쯤 된다. 그 후 3세기 말경 집회소 동쪽 주랑 가까이에는 로마식 극장이 세워졌다. 여섯 줄이 좌석이 현재도 반월형을 그리며 남아 있고, 그 좌석들 아래에는 궁형 천장의 휴게실들이 있으며 이 휴게실 가까이 가려면 거대한 출입구를 거쳐 극장으로부터 내려가야 한다.
        동편으로 더 가면 주후 298-311년간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한 갈레리우스 황제의 궁전터가 말끔히 청소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열주랑이 도열한 대형 정원과 그에 인접한 8각 건물이 나타난다. 각 면마다 후진이 달린 이 팔각건물은 얼마 안 가서 교회가 되었고 거기에는 세례용 부속실이 있다.
        또 그 도시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와 중심부에 있는 여러 가지 건물자리에서 다른 여러 가지 물건이 발견되었다. 구약과 히브리 문구를 희랍어로 번역함과 더불어 최근에 연구된 비문은 데살로니가에 사마리아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대적인 도시이자 역사의 숨결이 숨어깃든 도시,  테살로니케는 인구 100만명 정도의 그리스 제2의 도시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이다. 또한 철도를 이용하여 그리스로 출입국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게 되며, 북부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통로와 같은 구실을 한다.
        전체적인 테살로니케의 지형은 그릇모양의 형태로 12km에 걸쳐 뻗쳐있고 한쪽이 쎄르마이코스 만(Thermaikos Gulf)으로 열려있는 모양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316년에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인 카산드라에 의해 기원전 2300년전의 선사시대 유적지에 위에 건설되어졌으며, 카산드라 왕 부인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케(알렉산더 대왕의 누이동생)'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때 이후로 테살로니케는 마케도니아의 주도(主都)가 되었고 주요한 항구도시로 발전해갔다.
        종교적 역사측면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첫번째로 그리스도교를 선교한 장소이며(기원후 50년) 로마관리였던 드미드리우스(Demetrius)가 이곳에서 순교하여 영원히 이 도시의 성인이 된 곳이기도 하다. 테살로니케는 비잔틴 제국시대에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었고 비잔틴 예술양식의 다양하고 웅대하며 멋진 건축물 작품들이 도시를 뒤덮었었다.
        현재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 여유롭다. 상공업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삭막한 분위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거리에서 나무와 꽃을 자주 볼 수 있고 현대적인 건물에 섞여 고대 비잔틴 시대의 건물이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테살로니케는 터키의 이스탄불만큼이나 동서양의 교차지점에 있는 도시로 1921년 그리스에 통합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역사의 파란을 겪었다.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315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대왕의 누이동생이며, 지기 아내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당시 데살로니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이스인이었고, 상당수의 유대인,로마인, 그 외 다른 민족들이 있었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와 로마의 교차지이며, 군사 지역, 상업도시, 그리고 그리이스 철학이 뿌리를 깊게 내린 곳이다.
        7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은 후 데살로니카는 동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다음가는 대도시로 번창했다.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이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이스 제2의 도시이다. 사도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에 간 것은 50-51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였다. 그는 필리피에서 설교를 하다가 투옥을 당하고 해당 당국에서 그 도시를 떠나 달라고 종용하자 그 곳을 떠나는 참이었다.

1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 

테살로니카에서 선교하다

2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 

바오로 일행은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3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1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4

신약성경

사도행전

17:13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베로이아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을 알고, 그곳까지 가서 군중을 선동하고 자극하였다.

5

신약성경

사도행전

20:4 

베로이아 사람 피로스의 아들 소파테르, 테살로니카 사람 아리스타르코스와 세쿤두스, 데르베 사람 가이오스, 티모테오, 아시아 사람 티키코스와 트로피모스가 바오로와 동행하였다.

6

신약성경

사도행전

27:2 

그리하여 우리는 아시아의 여러 항구로 가는 아드라미티움 배를 타고 떠났다. 테살로니카 출신인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타르코스도 우리와 함께 있었다.

7

신약성경

필리피서

4:16 

내가 테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8

신약성경

테살로니카1서

1: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9

신약성경

테살로니카1서

1:2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

10

신약성경

테살로니카1서

2:1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선교

11

신약성경

테살로니카1서

2:17 

테살로니카로 다시 가려는 바오로

12

신약성경

테살로니카2서

1: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13

신약성경

티모테오2서

4: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테살로니카에서 선교하다 (사도행전 17,1 -9)

1 

바오로 일행은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2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3 

그는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신 다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음을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감복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그렇게 하였다.

5 

그러자 유다인들이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데려다가 군중을 선동하게 하여 그 도시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면서 야손의 집으로 몰려가 바오로 일행을 백성 앞으로 끌어내려고 그들을 찾았다.

6 

그러나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자 야손과 몇몇 형제를 시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서 외쳐 댔다. “온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7 

야손이 그자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법령들을 어기고 있습니다.”

8 

이렇게 그들은 군중과 또 이 말을 듣는 시 당국자들을 자극하였다.

9 

그러나 시 당국자들은 야손과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풀어 주었다.


        바오로는 이곳에서 적어도 몇달을 머물렀으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돌리자 하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몇몇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 들은 바오로가 유대교를 배신한 변절자로 단죄하고 바오로를 고소하여 내 쫓을 기회만 노리다가 바오로가 유숙하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때 바오로는 실라와 같이 간신히 탈출하여 베레아로 갔다.

        데살로니카서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신자 생활을 성실히 이행하는 그곳 신자들이 처음 신앙 생활할 때를 회상하며 계속 열성으로 정진할 것과 그 중에서도 종말을 떳떳이 맞이 할 수 있는 건전한 생활 (데살로니카전서 5:6, 4:3, 2:12-13) 을 하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서 였다. 동시에 신설교회에 목자로서의 끊임없는 배려와 종말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믿는 그곳 이방인 신자들이 제기한 죽은 자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처신에 관한 문의 (데살로니카전서 4:13)에 답하기 위해서 였다.
        데살로니카에서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에 온 바오로는 지모데를 다시 데살로니카로 보내 그곳 사정을 알아 보게 했다. 디모데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바오로는 이미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와 있었으며 (데살로니카전서 3:6-10) 여기서 그는 디모데와 실라를 난나 데살로니카 교회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다.
        데살로니카전서는 사도 바오로의 첫 서간일 뿐 아니라 신약성서 중에서도 제일 먼저 씌어진 것이다. 이 서간은 어렵고 까다로운 신학적 논제가 없으며 부지지간이나 사제지간에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다정한 대화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전서를 발송하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카 교회의 신자들이 종말이 왔다고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또 개종자들이 겪고 있는 핍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님의 재림 때 하느님의 공의로서 심판에 의해 핍박자들에게 내릴 무서운 형벌을 강조했다.


        이 서간의 목적은 다음 3가지로 볼 수 있다.

1. 박해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신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2. 재림에 선행되어야 할 사건들이 아직 성취 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 주의 날이 임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정정 시키기 위함이다.

3. 절제 없는 난잡한 생활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엄한 훈계로 교회를 충고하기 위한 것이 이 서간의 목적이다.

▶memo :

 

 

 

 

▶성지순례의 이해를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키에는 성서 유적지가 없었다. 사실 유적이라는 게 한 고대 도시 혹은 국가 지진이나 전쟁이 나서 폐허가 되어버리거나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되면 무인지경이 된 채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후대에 발굴되어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건데 오늘날의 테살로니키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발굴이 되었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이고 고대 테살로니카는 아직도 땅 밑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성디미트리오스성당(여행사)

        디미트리오스(데메트리우스(또는 데메트리오)는 시르미움(Sirmium,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에서 순교할 당시 부제였으며, 살로니카 지방에서는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다가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전설은 데메트리우스가 유명한 전사였다는 쪽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과히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순교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묘사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서방보다는 동방교회에서 더욱 유명하다. 서방교회에서는 라틴식 발음인 Demetrius 라고 적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Dimitros라고 적는다. 본 자료에서는 그리스 정교회발음을 따른다.)는 285년 데살로니카 귀족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학업을마치고 로마 군인으로 복무한 적도 있는 그는 지적인 능력과 하느님을 향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동시에 그의 자비심과 청빈한 생활 그리고 전도열정은 모든 이웃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디오 클레티아누스의 대 박해 기간에 그는 로마 공중 목욕탕 앞에서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 갔다. 그리고 막시미아누스 왕때 결국 그와 친구 네스터는 함께 신성한 순교자의 피를 테살로니카 땅에 쏟았다.

        바로 이 땅에 그를 축복하며 기념하는 디미트리우스 성당이 세워졌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테살로니카 사람들은 그의 용맹했던 순교적 믿음을 추억하며 더 이상의 두려움과 박해가 없어진 5세기경에 그의 무덤이 있던 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

        ①이 성당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치유와 기적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②412~413년 레오니티우스 시장이 그의 불치병을 고침받고 감사해서 더 크고 멋있는 성당으로 증축했다. 그러나 583년 화재로 불타버렸다.

        ③7세기 경에 또 다시 테살로니카 시민들이 교회를 세웠으나 15세기 터키의 침략으로 교회의 보물과 귀중품을 약탈 당하고 성화는 불타고, 1493년부터 1912년까지는 교회가 회교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터키에서 독립한 후 이후 1948년 초에 건축비 마련 목적으로 특별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다각적인 모금 활동으로

        ④1948년 10월 16일 테살로니카 대주교인 제나디우스와 다른 주교들의 축복 속에 성당을 재 헌당 하게 되었다.

        디미트리우스 성당은 위의 번호처럼 4번에 걸쳐 재건되었다.


☞좌측 사진은 위성에서 본 성당. 우측은 디미트리우스성당 정면모습.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오로와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일 것이다.

        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로마식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유적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 위에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제자 네스토( 성 네스토르(Nestor)는 비록 그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 세세한 점에서 의심스러운 점은 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네스토 역시 축일이 10월 8일로 데메트리오스와 같다.)가 이교도 리아에우스와 싸웠다가 패전했던 AD 303년에 이 곳에 묻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전은 밀라노칙령에 관한 포고가 있었던 313년 후에 작은 기도처소로 처음에는 설립되었었다. 백년이 지난후에 레온티우스, 일라리쿰의 주교 때에 큰 세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성전으로 같은 장소에 더 크게 지어지게 된다. 이 당시 성전 제단 밑으로 성 디미트리우스가 순교했던 장소와 동일한 세례욕조가 있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10월 8일로 지내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축일을 같이 지내는지 확인 할 수 없으나, 성인의 축일이 되면 성단에서 성인 유해(정교회에서는 성인 유해를 성해로 표기한다)를 공개하는 등 데살로니카에서는 큰 축일로 지내고 있다.

<건축양식>
        교회는 나르텍스((Narthex)
옛날 교회당 안에서 신도를 배열할 때 미세례자나 속죄자는 성찬의 전례에 참가할 수 없어 나르텍스에서 보게 하기도 하였다)와 십자형교회의 뒷 좌석이 높은 바실리카풍으로 다섯 개의 측랑이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한 개의 안뜰만 갖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르텍스가 있는 입구는 안마당 안에 있는 두 개의 문으로 통과하게 되어있다. 두 개문을 통과하여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교회의 서쪽벽을 따라 북과 남으로 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보다 좁고 짧은 폭으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북쪽구역이 계단으로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네줄로 된 열주들은 하나의 중심을 두고 회중석사이로 양쪽에 두 개씩 나있는 다섯 개의 통로를 나누어주고 있다. 그 원주기둥들은 바실리카 고유양식을 기초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어 장식되었다. 교회측면 넘어 교차랑
(transept: 성당 건축 용어로서 성당 좌우 날개부를 가리킨다. 십자형 성당에서 교차되는 부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설계는 두 개의 날개처럼 되어있는 모양이다. 중앙의 지성소로 측면은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
        지성소는 크고 밝은 다섯 개 창문을 통해 밝게 비추어주고. 묘지와는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의 중앙에는 성찬대가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움푹팬 바로 아래, 엔카니온, 석관 형태의 대리석 궤로 이루어진다. 건조된 혈액의 작은 유리병이 이 대리석 궤 안에서 발견되었다.

        독특한 점은 회중석과 나르텍스부분에 대리석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5세기의 바실리카 성전의 형태에 속하는 모습으로 동쪽 벽에는 스카이로스 석판장식이 북쪽에는 트라이빌론 장식이 되어있으며 각각 그들의 틈에 한 줄로 기도손모양 장식이 되어있다.
        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로마건축양식과 5세기 바실리카풍 양식을 한쌍으로 잘 어울리도록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누가 스판티누스의 무덤>
        성당 본당 회중석의 북서쪽 모퉁이, 문설주와 열주의 첫 번째 기둥사이, 이탈리아에서 고안 되어진 듯한 기념묘가 존재한다. 이것은 1481년 교회에 사적으로 안치하도록 허가를 받은 부요한 데살로니가 귀족 누가 스판티누스의 것이다.

<♣회화장식>
        이 교회에 유명한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작은 북쪽 열주에 서쪽면을 장식했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는 무덤에서는 단지11개의 모자이크가 나왔고 5세기-9세기의 연대에 속한다.
        그들은 노아와 두 개의 지성소 문설주, 홀과 나뉜 동쪽 파샤드의 벽에서 붙여진 것이다. 남쪽  통로 내부의 서쪽 벽의 상단에 성 디미트리오스가 기도하는 형태를 낮은 받침대 위에 초상화를 새겨져 있다.
        그의 손바닥은 금 모자이크 세공으로 덮여있고 화가가 오래된 독실한 성인의 아이콘을 모방하는 것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아이를 그에게 건네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의 발이 왼쪽에 보이는 동안에 무대는 문 한쌍과 성 디미트리오스에게 아이들의 헌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5세기의 것이다. 북쪽 통로에 유사하게 위치해 있는 다른 모자이크는 성 디미트리오스를 향하여 트럼펫을 구부리고 있는 천사의 초상화로 이 초상화는 원래대로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스판티누스의 무덤 곁에 본당 회중석의 서쪽 벽의 다른 모자이크는 7세기의 것으로 도시벽 흉벽 앞 두 목사 사이에 서있는 성 디미트리오스를 보여준다.

<♣남동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북면 문설주의 성 디미트리오스는 도시 벽의 정면인 주교와 주교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림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여기 당신은 미래한 사람들의 흐름과 남겨진 도시의 난잡한 섞임을 막은 그 유명한 집의 창시자 디미트리오스를 보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반에 노예의 입장이던 데살로니가의 세 번째 포위기간을 언급한 것이다.
        동쪽 면 문지방의 모자이크 성 디미트리오스와 성인이 그의 오른팔로 끌어안은 두드러진 얼굴의 특징을 지닌 디미트리오스를 보여준다. 그 그림 밑에 한 구절이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순교자. 도시의 친구. 시민과 객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성직자는 629-34년에 붕괴된 이후 교회의 재건축의 의무를 맡은 집사이다. 서편 문설주의 성 세르기우스는 담 정면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어진다.

<♣북서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이 문설주의 서면은 두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성인의 모자이크로 그들의 손은 헌금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면에는 소원을 담은 모자이크를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성인과 함께 있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으로써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 삶에 가장 큰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감사함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이 그림의 상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흉상으로 축복하시는 그림이다. 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속한다.

<♣벽화>
        성 디미트리오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벽화는 교회의 남쪽 벽에 있다. 이것의 대부분은 현재 큰 아치형의 개막으로 인해 파괴되어져 있다. 초상의 왼손부분에서 한 임금이 그의 군대의 호위아래 말 등에서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뒷 배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도시 경기장 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왼손부분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의 실내현관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꽃과 연기가 보이는 지붕위이다. 땅에서 창을 가진 형상이 홀로 걷는다. 반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는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내려와 복종하고 있다. 현관 위에서 두려워하는 여성은 그들뒤에 군인과 함께 묘사되어 진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진다. (경기장에 의한 거룩한 교회)도시 경기장 가운데 서 있어온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8세기 초반에 속한다.
        본당 회중석의 남쪽 통로에 있는 서면의 최서단 문설주는 성 요셉의 벽화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져 있고 그의 오른 손에는 더블 십자가를 잡고 그의 왼손은 미세화에서 한 조상을 보호하고 있다. 미세화에서 성경과 향로를 들고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가 되어 요셉의 이름을 가졌던 황제 존 4세 칸타쿠네를 다룬 것이다. 같은 열주에서 남면의 두 번째 최서단 문설주에는 수도사 복장과 모자 달린  옷의 성 누가 스테리어트스의 초상이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속한다. 트빌로의 남쪽 붙임기둥은 알레고리컬한 장면으로 한 남자가 유니콘에게 쫓기고 북쪽 기둥은 유월절로 1474-93년의 것이다.

<♣성당지하실>
        이것은 교차랑 아래 지하 동굴이며 남향 날개쪽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왼쪽에서 아래로 작은 예배실로 가게 되는데 두 방 은 순교자의 몸을 즉시 넣어두었던 칸막이로 된 성도의 전형적인 납골당이다. 아칸서스와 월계수 나뭇잎과 야자나무무늬의 대리석으로 아치를 장식했다. 성합의 기본 앞면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 세면대가 있었다.
지하실의 중앙은 나무로 둘러싸여있다.

▶memo

 

 

 


▶성지순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정교회 성당 건축은 돔(Dom)과 바실리카(Basilica), 두 가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떤 형식으로 지어진 교회이든 제대 앞쪽 정중앙에는 '아름다운 문’(혹은 '천국의 문’이라고도 한다.)이 있어 평상시에는 커튼이 쳐 있고, 그 양옆에는 앞쪽에서 볼 때 오른편에는 스승 예수와 요한 세자,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 교회의 주보성인 순으로 이콘이 있다.
        그리고 돔일 경우 천장에는 반드시 심판자이신 예수께서 지엄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콘이 그려져 있다. 커튼을 친 '아름다운 문’안쪽엔 작은 제대가 있는데 그곳은 성변화 예식이 거행되는 곳으로 오로지 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제대 위에는 십자가 이콘과 꽃 그리고 미사경본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는 곳이기에 평상시에는 커튼을 처 둔다고 했다. 잘 모르긴 하지만 성체를 모셔두는 감실은 없는 것 같았다.

 

☞위쪽 원안이 디미트리우스성당, 아래원이 화이트타워이다.


♣데살로니까 화이트 타워.(여행사)


        수도 아테네 다음 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는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심지인 ♣데살로니카이다. 데살로니카는 철도를 이용하여 그리스로 출입국하는 사람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며, 북부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카발라나 터키 국경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현재의 인구는 교외까지 포함하면 약 70만 명이며 쎄르마이코스 만이라는 좋은 항구가 있어 상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정말 여유롭다. 상공업 도시에 있을 법한 삭막한 분위기는 조금도 없다. 거리에서 나무와 꽃을 자주 볼 수 있고, 현대적인 건물에 섞여 고대 비잔틴 시대의 건물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데살로니카는 1921년, 그리스에 통합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역사의 파란을 겪었었는데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역사적 아픔을 품고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 ♣화이트타워라 할 수 있다. 화이트타워는 데살로니케의 상징이 될 만큼 규모로나 역사적 의미로나 중요한 건물이다.
        ♣니끼스 거리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나아가면 높이 30미터 정도의 화이트 타워에 도착한다. 15세기에 베네치아인이 세운 방벽의 일부로, 눈에 띄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다. 18-19세기의 터키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서 ‘피로 물든 탑’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후에 탑의 표면은 하얗게 칠해지고, 주위가 공원으로 정비되어 과거를 묻어 둔 채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 공원에는 거대한 ♣기마상이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을 모델로 한 것이다. 탑에서 비스듬히 건너편에 있는 ♣에쓰니끼스 아미니스 거리 Ethnikis Aminis와 게르마누 거리 N. Germanou 모퉁이에 ♣북그리스 국립 극장이 있다. 매년 9월에는 이곳에서 대중 음악제가 열린다.

memo : 테살로니카 화이트타워

 

 

 

 


▶memo 필립피 - 필립피 알파성당 - 로마식 도시 유적지 - 사도 바오로 감옥 - 리디아 기념성당, 세례터 - 암피폴리스 - 아폴로니아 - 사도 바오로 기념성당 - 테살로니카 - 성디미트리오스성당 - 화이트 타워

 

 

 

 

 

 

▶8일은 메테오라로 이동을 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일정을 마친다.


 

☞데살로니카에서 메테오라까지 여정이다. 화살표 끝부분이 메테오라이다.

☞데살로니카에서 Trikala까지 직선 거리로 150km 정도이고,

☞Karabaka까지 20km 거리이다. Karbaka가 메테오라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