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
▶10일째
아테네에서 휴식을 취하고 조식 후 고린토로 이동을 한다.
오늘은 코린토를 순례한다. 성경에도 나오고, 바오로 사도의 중요한 곳인 코린도이다. 코린토운하, 바오로 기념 성당, 고린토 박물관, 고린토 고대 유적지를 순례한 후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서 아테나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한 후 하루 일정을 마친다.
♣고린토(여행사:지역)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코린토스’라는 지명으로도 불리우는 코린트는 고대로부터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충지며,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크게 번영한 도시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코린토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새 코린트시는 구(舊)코린트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트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트의 건포도라는 뜻) ·올리브유 ·견직물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따라서 코린트 관광의 핵심은 ‘구 코린트’ 즉 ‘코린트 고대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이다.
1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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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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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8:8 |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4 |
신약성경 |
사도행전 |
19:1 |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
5 |
신약성경 |
코린토1서 |
1:2 |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
6 |
신약성경 |
코린토1서 |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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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신약성경 |
코린토2서 |
1:1 |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
8 |
신약성경 |
코린토2서 |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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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신약성경 |
코린토2서 |
1:23 |
나는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아직도 코린토에 가지 않은 것이다. |
10 |
신약성경 |
코린토2서 |
6:11 |
코린토 신자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다. |
11 |
신약성경 |
코린토2서 |
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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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신약성경 |
티모테오2서 |
4:20 |
병이 나서 내가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습니다. |
※코린토 교회에서의 바오로
▶ 코린토 교회
사도행전 18장에 바오로가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쳤다(사도행전 18:1-3).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게도니아로부터 내려와서 바오로 일행과 합세했을 때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훼방하므로 티티우스 유스투스라 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God-fearer,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유스투스집은 회당 옆인데 회당장 크리스포스가 온 식구들과 함께 예수를 믿었고 많은 코린토인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바오로는 밤에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말씀을 전했다(18:5-11).
5 |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
6 |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
7 |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
8 |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
9 |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바오로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
10 |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
11 |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
갈리오가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고소했으나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언어, 명칭, 법)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법정에서 추방햇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으나 갈리오 총독은 상관하지 않았다.(18:12-17). 바오로는 여러 날 더 체류하다가 코린토를 떠났다(18:18). 이것이 코린토 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이다.
12 |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
13 |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14 |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
15 |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
16 |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
17 |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
여기서 바오로가 코린토에 도착한 때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얼마 후(당시로 보면 최근)였다는 것과 코린토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의 전교 결과로 많은 코린토인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유스투스도 믿었으며 회당장과 그 가족도 믿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코린토 교회의 설립 당시 구성원들은 이미 다수의 이방인들(코린토인들)과 소수의 유대인들(회당장 가족)과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
또한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복음 사역을 한 기간이 갈리오가 로마 식민지 아카이야의 총독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과 그 당시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코린토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한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A.D. 14-37)도 유능한 유대인들을 사르디니아(Sardinia)로 추방했고 나머지 유대인들도 로마를 떠나게 했다.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상당한 자유를 누렸으나 얼마 후에 글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그의 「클라우디우스의 생애」(Life of Claudius)에서 “크레스토스(Chrestos)라는 사람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항상 소란을 피워서 그는 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고 기록했다. 5세기의 스페인 역사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에 의하면 이 추방 사건은 글라우디오 9년에 이루어졌는데 글라우디오 9년은 A.D. 49년 1월 25일부터 50년 1월24일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만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는 이 기간에 로마로부터 추방되어 코린토에 도착했을 것이다.
(2)유대인 회당과 코린토 교회 초기 교인들
코린토 회당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레가이론로(Lechaion Road)로부터 아고라(시장)로 들어오는 길 입구 계단 밑에서 출입문 상인방(가로대)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길고 무거운 블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일부 파손된 헬라어 7개 대문자로 ‘유대인들의 회당’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의 연대는 아마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코린토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미국 고고학자들은 또한 종려나무 잎들과 함께 3개의 7가지 촛대(menorah)가 새겨진 대리석 받침대를 발견했다. 그 대리석 받침대 역시 5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회당”이란 간판과 7가지 금촛대도 당시 코린토 회당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코린토 교회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 종들과 자유인들이 있어서(고전 12:13) 코린토시의 거울과 같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코린토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들 중에 스데바나 가정, 아가이고, 에라스도, 글로에의 가정 등은 헬라인들이었고, 브드나도(Fortunatus), 더디오(Tertius), 구아도(Quartus), 바오로가 그 다음 방문 때 머물렀던 집 주인 가이오 등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다(고전 16:15, 17;로마 16:23). 코린토 교회 초기 교인들 중에는 아굴라(Aquila), 브리스길라(Priscilla), 그리스보(Crispus), 누기오(Lucius), 야손(Jason), 소시바더( Sosipater)등 유대인들도 있었다. 바오로가 코린토전서에서 코린토 교회 안에 유대인들이 있는 것을 전제했다는 근거가 있다.
코린토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할례를 행했고(7:18) 바오로가 모세 율법에 호소했으며 (9:8-10; 14:34) 일부 신자들은 구약의 해석과 적용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암시를 주었던 것이다(10:1-13). 코린토 교회에 이렇게 일부 유대인들이 있었으나 주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즉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이 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특성으로 과거에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6:10-11;8:7; 12:2), 신전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8:1-10:22). 독신과 결혼(7장), 일반법정에 고소하는 사건(6:1-11), 창녀들에게 가는 것(6:12-20), 육체적 부활의 부인(15장)등이 코린토전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코린토 교회의 이방인 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면서 헬라적 세계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코린토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코린토’가 아직 많이 들어 있어서 ‘환자’를 살리기 위한 과감한 수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 대부분은 철학자들이나 귀족들이나 세력가들이 아니었고 노예들도 있었으나(1:26; 7:20-24) 스데바나(1:16) 와 에라스도(Erastus)는 예외였다. 코린토 교회에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11:17-34). 극장을 지나가는 거리의 북쪽 끝 작은 광장에 보도를 수리하는데 사용되었던 블록에 “에라스도는 자신의 재무관직에 대한 보답으로 사비로 이 보도를 놓았다”는 글귀(ERASTUS PRO AEDILITATE S〔UA〕P〔ECUNIA〕 STRAVIT)가 발견되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 문안에서 코린토 교회 교인 중에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를 언급했다(로마 16:23). 에라스도는 코린토 성의 재무로서 상당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정치적인 엘리트였던 것 같다. 바오로가 설립한 코린토 교회에는 이렇게 유력한 이방인 교인들이 있었지만, 유력한 유대인 회당장 가이오와 그 일가와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티모테오 유스투스도 있었다. 코린토에서 바오로를 반대한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렸을 때 바오로를 변호한 사람은 소스데네라는 회당장이었는데, 그는 아마 그리스보의 후임이었거나 아니면 다른 회당의 회당장이었을 것이다. 소스데네는 바오로가 1장 1절에서 언급한 소스데네의 형제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갈리오 총독
바오로가 코린토에 체류한 기간이 갈리오가 아카이야 총독으로 재임하던 기간과 겹친다는 것을 보았다. 갈리오는 네로(Nero)의 가정교사인 로마 철학자 세네카(Annaeus Seneca)의 형제로서 아카이야 총독이었다. 갈리오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이며 유명한 수사학자인 갈리오(Junius Gallio)에게 입양되었다. 세네카는 자신의 형제 갈리오를 높이 평가해서 그의 책 두 권(De Ira, De Vita Beata)을 갈리오에게 헌정했다. 갈리오는 성격이 명랑하고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선동사건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플리니(Pliny)에 의하면 갈리오는 총독이 된 후 중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기 위해 바다 여행을 했다고 한다.
2. 코린토교회에 서신을 쓴 계기
바오로가 A.D.50년경(49-51년)에 코린토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코린토 교회를 창설하였다(사도행전 18장).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18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 코린토전서 ‘이전의 편지’(Previous Letter)를 코린토에 보냈던 것 같다(고전 5:9). 바오로가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편지는 탐욕과 강도와 우상숭배와 아울러 특별히 신자들 중에 성적인 부도덕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바오로는 그 후에 A.D. 53-54년경 에베소에서 코린토전서를 써서 코린토에 보냈다(16:8). 그렇다면 바오로가 왜 코린토전서를 써서 보냈을까?
바오로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로 부터 코린토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1). 코린토 교회에는 바오로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이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또한 코린토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코린토 교회의 분열 | |
10 |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
11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
12 |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
13 |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
14 |
나는 여러분 가운데 크리스포스와 가이오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일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15 |
그러니 아무도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16 |
내가 스테파나스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주기는 하였습니다.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세례를 준 기억이 없습니다. |
17 |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
결혼과 독신에 대한 질문(7장 1- 18 )
혼인 문제 | |
1 |
이제 여러분이 써 보낸 것들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
2 |
불륜의 위험이 있으니 모든 남자는 아내를 두고 모든 여자는 남편을 두십시오. |
3 |
남편은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하고,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
4 |
아내의 몸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의 것이고, 마찬가지로 남편의 몸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의 것입니다. |
5 |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려고 얼마 동안 합의한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 뒤에 다시 합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6 |
그러나 그렇게 합의하여도 괜찮다는 뜻이지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
7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 |
8 |
혼자 사는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
9 |
그러나 자제할 수 없으면 혼인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
10 |
혼인한 이들에게 분부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
11 |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
12 |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
13 |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
14 |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도 더러울 터이지만, 사실은 그들도 거룩합니다. |
15 |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
16 |
아내 된 이여, 그대가 남편을 구원할 수 있을지 혹시 압니까? 그리고 남편 된 이여, 그대가 아내를 구원할 수 있을지 혹시 압니까? |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이 그 편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8:1- ).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 | |
1 |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
2 |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
3 |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
4 |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5 |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
6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
7 |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
8 |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먹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
9 |
다만 여러분의 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10 |
지식이 있다는 그대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본다면, 그의 약한 양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수 있게끔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 |
11 |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
12 |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13 |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
코린토 교회의 편지는 에베소에 있는 바오로를 방문한 코린토 교회의 스테나나스와 포르투나투스와 아카이코스를 통해서 바오로에게 전달된 것 같다(16:17).
코린토전서에서 바오로가 다룬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말로 들은 것에 대한 편지이고 어느 부분이 코린토에서 온 편지에 대한 회신인지 1-4장의 내용, 즉 클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내용과 편지로 문의한 7-10장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어쨌건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편지로 받은 내용은
코린토 교회의 분파 문제(1-4),
간통 문제(5장),
세상법정 고소 문제(6장),
결혼과 독신 문제(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8-10장),
공적예배와 성찬식 문제(11장),
영적인 은사 문제(12-14장),
육체적인 부활 문제(15장)등이었다.
바오로는 이러한 사회적, 윤리적, 교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을 코린토전서에 기록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볼 때 코린토전서는 분파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함으로 시작해서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육체적인 부활을 증언하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끝나는 서신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3. 코린토의 바오로 반대자들
코린토후서 2장 1절에서 바오로는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바오로가 코린토후서를 보내기 전에 코린토 교회에 ‘근심의 방문(Painful visit)'을 한 것을 암시해 준다. 바오로가 ’근심의 방문‘을 한 것을 통해 그 방문 이전에 이미 코린토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코린토후서 10-13장에서 언급된 대로 코린토 교회에 외부인들이 침입해 들어와서 바오로를 대적하고 코린토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증거가 코린토전서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오로가 코린토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권한을 언급하다가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했다.
여기서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을 “너희”라고 하고 바오로와 바나바 등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코린토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했다. 코린토 교회에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외부인들이 바오로를 대적하고 코린토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코린토전서에서는 코린토 교회 자체 내에서 바오로를 대적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오로가 4장 18절에서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코린토 교회 안에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바오로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오로는 15장 1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바오로가 분명히 코린토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15:1-4)코린토 교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오로가 전한 복음에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4장 18절(그런데 어떤 이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지 않을 것으로 여겨 우쭐거리고 있습니다.) 과 15장 12절(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을 보면 코린토 교회 안에 사도인 바오로 자신과 바오로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린토전서에서는 코린토의 바오로 대적자들이 코린토후서에서처럼 바오로를 공개적으로 대적한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오로에 대한 적대관계는 소수에 의해서 시작되어 점차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2;4:3,6,18-20;9:3;10:29-30;14:37;15:12)
코린토 교회에서 바오로의 사도적 권위와 복음에 도전한 자들은 코린토의 헬라 -로마 문화권과 바오로가 전한 복음 진리 간의 괴리 때문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코린토 교회는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종래와 같이 중시한 결과 십자가의 복음, 즉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로고스’를 경시했던 것 같다(1:18-2:9).
코린토 교회는 “모든 구변”(‘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는데(1:5-7), 그것을 십자가의 복음과 통합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웅변화 지식 면에서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코린토 교인들이 헬라적 웅변과 지혜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바오로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2:1-5). 그들이 헬라-로마 문화에서 자랑하는 지도자의 웅변과 지혜와 명예 면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와 “세상의 구경거리”같은 십자가와 이에 걸맞는 십자가의 복음 사역자 바오로는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4:6-13). 그들은 스스로 이미 성령을 받아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 상태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4:8)(“과도실현”종말론, “영화 종말론”)바오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바오로와 바오로가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사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와 ‘프뉴마’(성령)가 교만과 자랑의 요인과(4:6, 18;5:2;8:1) 코린토 교회안에 분파와 분쟁의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오로와 바오로가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오로가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호한 것도 “바오로를 힐문하는”, 즉 재판자리에 앉아 바오로를 재판하는(9:3)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의 사도권을 무시한 대적자들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하느님만 계시고 우상들은 없다는 ‘그노시스’(지식)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전에서 제사과정 중 하나로 우상제물을 먹는 잔치 행사에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 같다(8-10장).
바오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도권이 무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 같다. 바오로는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신의 사도권을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누리고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오로가 9장에서 언급한 사도권,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때 어쩌면 코린토 교회의 부자 신자들의 후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코린토 교회의 일부 부유한 신자들은 코린토 교회를 후원할 뿐 아니라 바오로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 형성의 배후에도 후원자들로 있었을 것이다. 코린토 교회 안에 라이벌 가정교회들이 따로 있고 그런 후원자들이 각 분파의 가정교회를 후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교인들을 후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후원자들이 볼 때 바오로는 자신들의 후원을 거부하기 때문에(고후 11:7-11) 그들 속에 반(反) 바오로적 심리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코린토교회에서 바오로에게 도전한 자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성령’ 문제에 있어서도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바오로는 14장 36-37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 코린토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이 신령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심지어 바오로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는 그렇게 교만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이다. 코린토 교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마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 완성된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고 각 신자에게 분배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12-14장).
▶ 바오로가 방문한 코린토
바오로가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이후 마케도니아 지방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바로 이웃 아테네를 거쳐 복음을 들고 갔던 코린토는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두 번째 신흥도시였다. 그 때의 코린토는 옛 코린토와는 주민의 민족적 배경에서나 생업에서 매우 달랐다. 새롭게 번창한 항구도시의 주님들은 로마의 관리, 상인, 교역인, 군인, 선원,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식민지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해 온 하층 계급 출신의 자유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퇴역장교들은 다른 곳에서보다는 우대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가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또한 여러 이유로 로마 제국 각처에서 유입되어 온 새로운 이주민들 때문에 코린토의 인구는 급증했다. 코린토에서 발굴된 비명들 중에 라틴계 이름이 더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준다.
코린토 시민들은 그 당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반면, 제국 동쪽 지방에서는 여전히 소요가 끊이지 않고 있어서 이를 피해 코린토로 유입된 많은 사람들 중에는 생활력이 강한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있었다. 1세기에 이미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회당을 세울 정도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고대 코린토 박물관 마당에 보존된 한 기둥의 문설주 위에 ‘히브리인의 시나고그’라고 씌어 있는 글자를 판독할 수 있으나, 이것의 연대는 기원후 2,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바오로가 그 곳에 갔을 때, 유대인들의 회방이 이미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생활력과 기동력이 강한 그들이 팔레스타인은 물론 소아시아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 제국 내의 다른 지방으로부터 코린토를 찾아옴으로써 팔레스타인읜 유대교는 물론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로 코린토의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코린토 서신들에서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헬라적 유대교의 지혜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 코린토의 지정학적 특징
코린토의 지정학적 위치는 이 도시가 고대 문헌들 속에서 ‘죄악의 도시’로 불리게 된 자연스러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대 문헌들 속에서 ‘코린토인처럼 산다’는 말은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코린토 소녀’는 매춘부와 동의어로 이해될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고리도에도 이러한 경향은 크게 개선된 것 같지 않다. 코린토가 이처럼 성적 타락과 같은 부도덕한 생활에 오염된 것은, 항구도시라는 지정학적인 이유 외에도 주민들 상당수가 노예 계층 출신으로 자유방임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자유인들이었다는 사실과 제국 안에서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나 로마의 혼합주의적 종교 상황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상업 조건과 교통이나 지연관계 또는 인적 관계로 새로 이주해 온 여러 민족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인구 10만 가운데 노예가 3분의 1을 차지했고,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주민이 혼합해 살았다는 것과 관련하여 코린토인들의 다양한 종교의식들을 간과할 수 없다. 주민들은 그리스의 전통적 수호신인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Pandemons), 이집트의 남신과 여신인 이시스세라피스 신, 그리고 신들의 어머니인 아시안을 섬겼다. 신들 중 여신들의 신전에는 수천 명의 직업적인 창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랑과 정욕의 여신들을 섬기는 일종의 여성 사제들이었다. 참배자들이 때때로 신전에서 숙박하면서 이런 여사제들과 갖는 성행위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부여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코린토인들에게 성적 타락과 같은 부도덕성을 야기 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코린토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는 아니었으나, 디오게네스의 무덤이 있다는 것과 함께 견유학파의 활약지였음을 고려한다면, 헬라 철학이 크게 유행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주요 유적
▶ 참고 자료
1) 아폴론 신전과 로마시대의 화장실
구 코린토의 유적에는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기원전 6세기경의 ♣아폴론 신전이 있다. 이것은 목조 신전에서 석조로 바뀐 초기의 것이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도리스식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이때까지 기술이 미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는 ♣로마 시대의 화장실도 있다. 입구 바로 왼쪽, ♣에우리클레스 목욕탕에 부설되어 있던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 판에 구멍만 뚫려 있지만 거기에 앉으면 눈앞에 물을 흘려보내는 홈이 있다. 이 무렵부터 이미 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돌이 깔린 레케온 거리가 끝나는 곳에 계단이 있다. 이곳이 정문이 있던 곳이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 옆에 넓은 광장이 나온다. 정면에는 남쪽 스토아가 있는데 기원전 4세기에 상점 거리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마 시대의 것이다.
정문의 동쪽으로는 ♣피레네의 샘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건물이 있다. 현재도 자연적으로 물이 나오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저수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샘’이라기보다는 단지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광장을 둘러싸이듯이 아고라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예전에는 ♣광장 중앙에 연단이 있었고 사람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오로도 이 연단에서 그리스도교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한 광장은 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남쪽 끝에는 출발선이 남아 있다.
박물관이 있는 방향은 아고라의 서쪽으로 거기에도 상점이 들어가 있었던 스토아와 로마 시대의 작은 신전이 몇 곳 있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박물관 오른쪽으로 ♣‘글라우케의 샘’이 있다. 이 샘에도 피레네의 샘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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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2) 유적 박물관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곳에서 발굴, 발견된 것과 이 지방 일대에서 출토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각 시대의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코린토 항아리가 많이 있어서 흥미롭다. 항아리와 동시에 검은 색조의 그림이나 붉은 색조의 그림이 그려진 토기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박물관의 북쪽에 주차장과 유적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다. 주차장 옆에는 기원전 5세기의 ✯극장터와 로마 시대의 ✯음악당 터를 볼 수 있다. 유적의 남서쪽에는 해발 575m의 ✯아크로코린도 산이 정상에 요새를 갖추고 우뚝 서 있다. 이 요새 터는 고대의 것이 아니라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 산 정상에도 샘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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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의 지협지형인 이오니아 해의 코린티아코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폭 24m, 길이 6343m의 운하로 프랑스 자본의 민간회사에 의해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수위(水位)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鐵道橋)는 폐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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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 기념 성당(여행사)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오늘날의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 네 개의 교회
를 세웠다. 우선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 속주에 필리피 교회, 테살로니카 교회, 베레아교회를 창설했다.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두고 베레아 교우 일행과 더불어 뱃길로 510km를 남하하여 문화 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했으나 실패하여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사도행전17,14-30) 실라와 티모테오를 테살로니가로 파견하고 바오로 자신은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 코린토로 내려갔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9km 떨어진 코린토로 내려가 무려 18개월간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
바오로는 51-52년경 코린토를 떠난 다음 3차 전도 여행에 올라 54년경 에페소에서 활발히 전도하던 중(1코린 16,8-9) 코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발송한 바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약 성서에 들어있는 코린토 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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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고린토에 있는 바오로 기념교회는 1920년에 지은 것으로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아담하고 깨끗한 교회였다. 우리는 잠시 들어가 기도를 하고 기념촬영을 한 다음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시간은 잘도 흘러 아침 8시쯤 호텔에서 나왔는데 고린토 운하 있는 곳에서 30분 가량 지체했다고 해도 이곳까지 오는데 이동시간이 3시간 30분쯤 걸렸다는 얘기다.
점심은 허름한 음식점에서 먹게 되었다. 메뉴는 밥에다 돼지고기 케밥. 그야말로 돼지밥 같기도 하고 냄새도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애꿎은 포크로 손목 운동만 하다 그만두었다.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여기저기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렸다.
포장도 안 된 길을 두고 한쪽은 유적지인지 철망을 쳐놓은 데가 있었고, 한쪽은 그냥 솔밭이었다. 그리스엔 워낙 발굴 중인 데가 많다니까 거기도 아마 그런 곳인가 보다 하고 일행을 기다리는데 마침 일행이 나왔다.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버스를 향해 가는데 바로 그 철조망이 쳐진 곳이 우리가 가는 고린토 유적이라는 거다. 고린토 유적지 멀리 우람하고 높은 산이 떡 버티고 서 있고 그 위에 가물가물 성 같은 것이 보였다. 고린토의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575m. 산 위의 요새는 고린토인들이 잦은 지진과 외부의 침입으로 산으로 피해 가 지은 것이라 한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산 서쪽에서 들어갈 수 있는데, 삼각면의 돌 벽과 3개의 문으로 연결된 길이 있다고 한다. 고대에는 이 산 비탈에 많은 사당과 신전이 있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신전이 아프로디테 신전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윗 페이레네 샘(Upper Peirene Fountain)이 있었는데 이 샘은 고린토 유적지에 있는 아래 페이레네 샘(Lower Peirene Fountain)과 쌍을 이루는 샘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페이레네는 여자였는데, 아르테미스(Artemis)가 살해된 아들을 위하여 눈물로 마술을 걸어 페이레네를 샘으로 변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가 본 고린토 유적지에 있는 아래 페이레네 수조에는 아직도 샘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각품, 항아리 등 여러 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당시 유대인 회당의 현판도 볼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에 머물 때 안식일마다 나가 설교하곤 했을 그 회당의 현판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고린토 박물관(여행사)
대 코린트 유적 박물관
고대 코린트 유적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물이나 출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중 검고 붉은 색조의 그림이 그려진 코린트의 항아리는 특히 유명하다. 이 '코린트의 항아리'가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기원전 7세기경 무역 도시로서 최전성기를 누린 코린트가 당시 전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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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적지 순례(여행사)(Ancient Corinth)
B.C. 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고대 도시국가를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한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코린트시에서 약 8km 떨어진 ♣아크로코린트 산기슭에 있다. 코린토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설한 ♣아폴론 신전으로,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원주로 된 신전이었으나 현재는 7개의 원주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신전 남쪽에는 상점 등의 흔적이 있는 ♣아고라가 있으며, 아고라에서 북쪽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진 레카이온 거리에는 배수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저 일족의 상 등 출토된 발굴품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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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안이 아크로 고린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