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자유인 2007. 4. 2. 16:55
  ♣이스탄불(여행사:지역)

▶참고 자료 : 신비감이 깃들어 있는 곳, 이스탄불 :

                   아테네에서 직선 거리로 560km.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 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기 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유적지가 모여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 있고 모두 이 지역에 몰려있다.


        그리스도교 제국과 이슬람 제국이 공존했던 현재의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 공항을 빠져 나오면 눈앞에 아름다운 마르마라 바다가 펼쳐진다. 이 바다를 마주하고, 비잔틴 시대인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해안 길을 따라 21km에 이르도록 길게 쌓아 올린 삼중 성벽을 지나면 일곱 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는 오래된 도시가 나타난다.

        이 도시를 바라보며 술탄 마호메드 광장으로 진입하면, 서쪽으로 지는 해에 반사되어 황금색으로 변한 금각 만과 호수 같은 바다를 미끌어져 가는 관광선과 그 위에 떠 있는 갈라타 사라이 브릿지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818세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바로 이 도시를 가리켜 “자연의 축복받은 선물이요, 역사적 유물을 동시에 간직한 곳이 이스탄불 외에 지상에 다시 어디 있겠는가!”라고 극찬 하였던 것이다.

        이스탄불의 역사는 기원전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을 가로지는 보스포러스 바다 서쪽 산기슭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67년에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사는 메가르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비잔티움’이라고 도시의 이름을 명명하고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장군 파우사니아가 거느리는 그리스 군대에게 이 도시가 점령당하기 전까지 비잔티움은 페르시아 제국에게 통치를 당하게 된다(기원전 512~478년)

        한편 서기 312년 10월 로마 시를 가로지는 티베르 강이 흐르는 밀비안 다리에서는 거대한 로마 제국의 대권을 거머 쥐기 위해 일전을 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이고 다른 한사람의 이름은 막산티우스였다. 전쟁이 있기 하루 전 날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전력상 열세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밀비안 다리를 서성이고 있었던 그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태양이 비취었다. 그리고 그안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이 표적으로 승리하리라’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하늘로부터 새 힘을 얻은 그는 다음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오랫동안 로마 제국내에 카타콤베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온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기도가 응답된 순간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전쟁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점점 더 커져가는 광대한 로마 제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동서양의 교차로인 바로 이곳에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전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하였다. 이로부터 약 1,100년간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1054년 정교회가 분리된 이후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로서 역사의 무대를 지켰다.

        1453년 5월 29일 장기간의 격전 끝에 승리에 찬 오스만 터키 군사들이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여 그날 실의에 찬 이곳 주민들은 최후의 기도를 하느님께 드린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이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술탄 메헤메트 2세의 나이는 약관 23세였다. 그는 종교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이미 타락한 비잔틴 제국을 무너트리고 이슬람교가 융성하라는 뜻인 ‘이스탄불’로 도시의 이름을 개명하고 약 600년간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가 되도록 초석을 놓았다.

        비잔틴 제국의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 성소피아 성당의 돔 가운데는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상징적이니 표시를 붙이고, 네 귀퉁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미라렛(첨탑)을 세워 제국이 바뀌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약 2만명이 들어 갈 수있는 성전 내부의 예배 장소는 중앙의 강대상이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방향을 틀어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 방향으로 기도하도록 건축물을 구조 변경하였고, 황금색 모자이크로 된 화려한 성화들을 모두 두껍게 회칠하였다.

        1204년 4월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 전쟁으로 또 한번 몸살을 앓게 되는데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고자 성지로 가는 길에 이곳을 방문한 서로마 제국의  4차 십자군에 의해서 성 소피아 성당의 문과 은으로 장식된 설교단이 파괴되고 성전에 소장되었던 각종 진귀한 보물들이 도난당하였다. 위와 같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역사의주인은 바뀌어 왔으나 두 제국이 공존하는 도시의 숨결은 아직도 살아있어 골목골목마다 기독교 문화 이슬람 문화가 공존해 왔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현재 이스탄불은 유동인구 300만을 포함하여 1500만을 가진 대도시로서 동서양을 왕래하며 무역하는 상인들과 서계역사를 좌우했던 두 제국의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려는 수많은 순례객들도 늘 분주한 가운데 있다.



 

그랜드바쟈르,  히포드럼,   블루 모스크, 지하저수저,  소피아성당,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곳이다.

 

12일 째 : 조식 후 이스탄불 명소 방문


▶성지순례 마지막날이다. 이날은 위의 사진에 있는 소피아성당, 지하저수저,블루모스크,히포드럼,톱카프궁전, 그랜드 바쟈르를 구경한 후 이스탄불 공항으로 이동을 하여 귀국을 한다.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성지순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소피아 사원을 제외하면 이스탄불 관광이다.

터어키의 마지막 날을 이스탄불 관광으로 마감한다.

호텔을 빠져나와 하루 동안 이스탄불 관광을 하고 바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서 귀국한다.


♣성소피아 사원(여행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도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바로 이스탄불이다. 이 이스탄불에는 1100여년에 걸친 로마와 비잔틴제국, 라틴공국과 600여년에 걸친 오트만제국의 수도로서의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있게 한 데에는 네 사람의 공헌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헬라의 일개 소읍을 새 로마로 건설하여 동서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콘스탄틴 대제, 소피아 성당, 이레네 성당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던 유스티아누스 황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1532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완전한 모스렘 도시로 변화시키고 도시 명칭도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오토만 제국의 메멧1세, 오토만 제국에 최절정의 황금기를 열었던 술레이만 대제가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이스탄불 관광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을 꼽으라면 바로 비잔틴 건축예술의 진주라고 일컫는 소피아 성당이다.


1. 소피아 성당의 건축 역사
        현재 지금의 자리에 서있는 건물은 세번째 것으로 첫번째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이 교회는 “메가 에클레시아” 즉 큰 교회라고 이름지어져 A.D. 360년에 개장되었다. 그 다음해에 이 교회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다시 말해 “성스런 지혜”라고 재천명되었다. 돌로 된 벽과 세개의 둥근 천장, 그리고 나무 지붕으로 구성된 고전 건물이었던 이 첫번째 교회건물은 A.D. 404년 시민 폭동때 파괴되었다. 이 폭동은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이오니스 크리소스톰의 추방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두번째 교회는 건축가 루피노스가 데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으로 지었다. 이 교회는 첫번째 교회보다 많은 다섯개의 둥근천장과 나무 지붕으로 만들었다. 이 교회건물은 415년부터 완공되었다. 이 교회건물은 1935년 발굴되었는데 이 교회건물의 터는 현재 교회(세번째 교회)의 서쪽에 있는 입구보다 약 2미터가 더 깊다. 이 때의 발굴에서 많은 기둥과 코린도식 머리 기둥, 그리고 예수의 12제자를 의미하는 양이 새겨진 두개의 작은 대리석 단대공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두번째 교회 역시 시민 폭동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이 폭동은 당시 폭도들이 폭동당시 “니카(승리)”라고 외친 것에 기인하여 “니카 혁명”이라고 불린다. 이 폭동 또는 혁명은 532년 유스티안 황제 때 마차 경주가 열리는 동안 발생하였는데 이 폭동의 원인은 당시에 있었던 정치 및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를 폐위시키려는 황제조카들의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폭동으로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 사라졌으면 성소피아도 그 중 하나였다.
        세번째 교회는 바로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다. 즉 벨시사리우스 장군이 폭동에 가담했던 많은 폭도들을 죽인 후, 황제는 교회 건축을 명령하였는데 건축가는 트랄레스의 안테마우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루스였다. 이들은 532년 2월 23일 교회 건축을 시작하여 537년 12월 27일에 완공하였다. 즉 이 교회의 건축은 5년 10개월 4일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원했으며 이로 인해 수백명의 장인과 수만명의 인부가 이교회 건축에 동원되었으며 아주 귀한 건축자재가 제국의 각 지역에서 운반되었다. 녹색대리석 기둥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며 중앙 본관에 세워진 반암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

2. 성 소피아 건축의 의의
        성 소피아가 완공되었을 때 그 낙성식은 대단히 화려하였다. 또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내부의 화려함을 보며, ‘오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능가하였소.’라고 외칠만큼 뛰어난 걸작품으로 당시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좌가 위치했던 곳이다.
        성소피아는 동서양 건축양식의 통합체로서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비잔틴 예술의 정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개의 본당으로 구성된 예배당은 성 소피아의 중앙집중식 설계와 중앙의 홀로 덮고 있는 거대한 돔이 하나로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이 성소피아가 독특한 스타일로 세계 예술품 중 가장 뛰어난 기념비중 하나가 된 것은 비잔틴 예술이 점차 동양 쪽으로 많은 치우쳐 진 것에 비해 초기 비잔틴 예술로 성소피아가 로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건물은 외랑과 내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에 거대한 돔이 있는 중앙의 본당, 두개의 복도, 그리고 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3. 개조와 복구
        돔에 생긴 첫번째 균열은 553년과 557년에 있었던 지진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558년에 돔의 상당한 부분이 붕괴되었다. 그래서 다시 돔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돔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로드스에서 특별히 가져온 석회로 된 벽돌을 사용하였다. 이 돔은 처음 것 보다 작게 만들어졌으나 높이면에서는 처음돔보다 7미터가 더 높다.
        교회 내부는 우상타파 시대(726-842)때 변화되었다. 인물화로 된 모든 판넬들이 제거되었고 대신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단순한 십자가가 만들어졌다.
869년 또 다시 지진으로 건물의 서쪽 부분이 다시 파괴되어 870년에 복구되었다. 986년 10월 25일에도 중앙 돔의 일부가 지진으로 내려앉았고 후에 건축가 트리도트에 의해 복구되었다. 1204년에는 제 4차 십자군들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상당히 파괴되었다.
        교회 복구는 1261년 비잔틴 귀족들이 십자군들로부터 도시를 재탈환하면서 시작되었다. 받침용 기둥이 서쪽에 추가되었고, 안드라니코스 2세는 또 다른 받침 기둥을 북동쪽과 남서쪽에 세웠다. 1348년 지진 때 붕괴되었던 돔은 도시민들에게 특별히 부과된 세금으로 1354년에 재 복구되었다.
        오늘날 현재의 성소피아사원을 살펴보면 첨탑이 세워져 있는 알게 된다. 이것은 오토만 터키인들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면서 세워지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성소피아를 사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정복왕 메호멧 2세의 통치 초기에 첫 번째 나무 첨탑과 성지인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복왕 메흐멧 2세는 이후 남 동쪽에 벽돌로 된 첨탑을 세웠다. 북동쪽의 첨탑은 건축가 시난(1566-1574)이 셀림2세 때 세웠으며, 북서와 남서쪽에 있는 2개의 첨탑은 무라트 3세 때(1574-1595) 세워졌다. 이 외에 대리석으로 된 설교좌석, 사회좌석이 추가되었고, 그리고 19세기 포사티의 복구 때 타일이 붙여진 술탄의 자리가 추가되었다.
        마흐무트 1세 때인 1736년에 건물 내부에 도서관이 그리고 1742년에는 초등학교 건물이 외부에 세워졌다.
        복구작업은 1810년 마흐무트 2세 하에서 행해졌으며, 가장 중요한 복구는 1847-49년 사이의 술탄 압듈 메지트(1839-1861)의 통치 때 스위스 건축가 G. 포사티에 의해 행해졌다. 본당에 있는 술탄의 자리도 바로 이 때 추가되었다.

4. 성소피아의 내부 구조
        내랑- 내랑은 외랑보다 더 넓고 더 높다. 천장은 황금 바탕에 기하학적인 모양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벽은 얇게 잘라진 대리석판으로 덮여 있다. 양 옆에는 2층 갤러리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있다. 남쪽에는 시계문(호롤로지안 문)이라 불리는 출구가 있다. 방처럼 되어 있는 이 문은 때때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황제가 사용하던 곳이었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중앙의 문은 제국의 문이라고 불린다. 황제는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곳에서 무릎을 꿇곤 했다. 이 문 위의 모자이크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보좌에 앉아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왼손에는 “너에게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문구가 씌여진 복음서를 들고 있다. 오른쪽 원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왼쪽에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레오 6세로서 예수에게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들은 920년에 만들어졌고 오토만에 의해 회칠이 되었다가 1933년 재복구 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

        본당 – 본당의 길이는 73.50미터이고 넓이는 69.50미터이다. 후진은 동쪽 벽에 있다. 중아의 예배당은 네개의 커다란 기둥과 비팀대에 의해 양 옆의 예배당과 구분된다. 중앙의 돔은 55.60미터, 직경은 31.24 x 32.81미터로써 타원형이다. 돔은 건물이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훨씬 더 평평했으나 558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되어 새로이 복구되었고, 이 때의 돔의 재 건설에는 로도스에서 가져온 가벼운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의 상징, 성소피아 사원

        성소피아 박물관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것이다. 하지만 성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성소피아 성당이라는 가장 최초의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듯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에는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성당안 성화는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위성에서 본 성 소피아 대성전의 모습.

▶memo

 

 

 


☞ 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한다.

        이스탄불에 위치한 성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던 6세기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건축되었다. 당시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완공된 성당 건물에 감격하여“오! 솔로몬 왕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라고 부르짖으며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보다 더 거대한 성전에 찬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미리 예약된 이스탄불 주교좌 성당을 향했다. 건물 입구에 ‘Cathedrale Saint Esprit -Istanbul’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슬람교 국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이었기에 입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호기심이 가득했다. 크고 웅장한 건물구조와 내부의 성화들은 진귀한 작품들이었다.
        제대 뒤편의 성령강림 모자잌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가톨릭 신자들이 많지 않음은 기정사실일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진품 성화들이 벽에 부착되어 있는데도 조명등을 설치하거나 주변을 밝게 꾸며 놓지 않았다. 성화 한편한편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상세하게 알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블루 모스크(여행사)


        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멧 모스크 SULTAN AHMET MOSQUE)

        기독교 제국이었던 비잔틴 제국을 무너트린 술탄 메히메트 2세는 기독교의 영화를 상징하는 성 소피아 성당 건너편에 이스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 제국의 영화를 위하여 이에 버금가는 거대한 모스크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최고 건축가인 시난에게 건축하도록 명하였는데, 1609년에 시작안 공사는 시난이 나이 들어 죽고, 그의 제자인 모하메트 아에 의해서 1616년에 완공하게 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높이 43m 사방 24m의 넓이로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천장은 비잔틴 건축 양식인 돔 건축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대칭 형태로 만들고 직경 5m의 일명 코끼리 다리라고 하는 네 개의 기중이 건물을 받치고 있다. 한편 사방에는 260개의 창문을 만들어 외부의 빛을 사용하여 기도와 예배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2만여장의 푸른색 타일은 이곳에서 약 150km 떨어진 니케아란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서 니케아는 325년 5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토의하던 종교회의가 있었던 곳이다. 중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곳까지 전주된 도자기 문화가 1480년경 바로 니케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후 오스만 터키 시대에 만들어진 타일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려한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이 모스크를 가리켜 블루 모스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이곳 블루 모스크의 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미사일 모양의 미나렛은 모두 6개로서 성지 메카의 7개의 미나렛 숫자에 비해 하나 부족한데,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술탄 메히메트는 이 모스크를 만들 대 미나렛에 금을 입히라고 하였다고 한다. 금은 터어키로로 ‘알튼’이라 하는데 이를 잠손 들은 건축가가 ‘알트(6)으로 알아듣고 미나렛 숫자를 6개 만들었다고 한다. 출입구를 지나 넓은 정원에는 기도 시간 전에 알라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손과 발을 닦는 세정식대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문이 함께 동서로 있는 마드라사라고 하는 학교와 기도실 그리고 화려한 분수대가 있어 인상적이다.

▶memo

 

 

 


☞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했다.

        내 신발을 넣는다는 게 꺼림칙했지만 규정을 따라야 하기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같은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관습이 있다. 입을 다물고 발끝으로 걸어서 하느님 앞에 대면하는 자세이며, 자기의 방법을 하느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방법에 흡수되고 통합 되도록 스스로 허심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이런 거룩한 지향을 가진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발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를 참아낼 수 있었다.

        뒷쪽 한귀퉁이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기도하는 구역에 들어갈 수 없기에 따로 마련된 ‘여성들의 기도처’였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성들을 위한 공간을 모스크의 양 측면이나 뒷면 혹은 이층에 마련하여 커튼이나 칸막이를 설치한다고 한다.
        이 나라의 문화이긴 하지만 신앙생활까지도 여성들에게 차별을 두는 점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고 안타깝게 여겨졌다. 터키를 순례하는 동안 마치 우리나라 민방위 훈련하는 날 시작 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몇 번 반복해서 들으니 분명히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모슬렘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거룩한 의미를 지닌 소리를 민방위 훈련 소리 정도로 들었으니... 그 후부터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평화의 모후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라고 화살기도를 드리는 기회로 삼았다.

♣히포드럼(마차경기장 HIPPODROME)(여행사)

☞블루 모스크 앞에 위치한다.

                                                

        성 소피아 교회와 블루 모스크사이를 지나 북서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약 35m 높이로 우주선 모양을한 표면이 노란색인 거대한 설주를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오벨리스크이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태양신 라(Ra)를 위해 만든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를 위해 사면에 그에 대한 찬가와 당대의 왕조를 칭송하는 내용을 상형 문자로 새겨 넣었던 것이다. 기원전 15세기 고대 이집트 왕인 투트모스 3세의 영광스런 통치를 기리기 위하여 이집트가 카르낙 신전에 이 오벨리스크를 세웠는데,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통치 때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히포드롬 광장은 길이가 약 400m 넓이 120m 그리고 10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비잔틴 시민을 위해 마차 경기, 서커스, 그리고 국가 기념행사등을 하였다.

        한편 이곳에 운집한 시민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계층 구조에 의해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서 물과 땅 공기 , 그리고 불을 상징하는 색깔인 청, 녹, 백, 적등으로 그들의 계층을  대표하여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청색에 속한 사람들은 지주나 민의원 신분이고, 녹색으로 대표되는 자는 상공업에 종사는 자들이었다. 또한 청색은 희랍 종교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히포드롬 광장은 역사적으로 ‘니카의 반란’이 있던 장소로도 유명한데,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부인 테오도르(이집트출신 무희)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녀의 미에 감탄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데오도르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황비로 삼는다. 그러나 황제의 반대파들은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나 점과 당시 이집트에서는 단성론(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性), 즉 인간이 된 신성(神性)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설. 이 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人性)은 ‘바다로 떨어지는 꿀방울이 바다에서 녹아 버리듯’ 신성에 의해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폐기되고, 인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재는 허상(虛像)으로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은 우리의 인간성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스도의 중재적 활동과 구속(救贖)은 허공에 뜬 논의로 되고 만다. 이 설의 주창자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한 수도원의 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이며 알렉산드리아가 총대주교인 디오스쿠루스(Dioscurus)가 지지하였다. 단성론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그 후에도 단성설은 동방 교회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삼장 논쟁', '성화상파괴 논쟁' 등의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이를 믿는 다는 것을 빌미로 바로 이 광장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란군에 놀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데로도르의 설득으로 다시 용기를 얻은 황제는 반란군을 마침내 진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성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권위와 영광을 위해 현재의 성소피아 성당을 짓게 되었다. 1826년 이곳 히포드럼에서는 또 한번의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오스만 터키 시대에 술탄 마하무드 2세의 통치를 거부하던 3천여명이 이곳에서 피를 흘린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죽음의 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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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저수조(Yerebatan Sarayi)(여행사)

        이스탄불은 많은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저수저가 성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지하궁전(Yerebatan Sarayi)이다. 물은 이스탄불로 부터 20km 떨어진 곳으로 부터 수로를 통해서 공급했고 기둥과 천장 장식이 화려하게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를 지하 궁전(saray : palace) 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336개의 기둥중 거의 모두가 비잔틴 코린트식의 기둥 머리를 가지고 있다. 저수저 전체의 크기는 70m 폭에 길이는 140m 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이스탄불 시는 이 저수지를 개축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기둥들 사이에는 나무를 재료로 도보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다.
석고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이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양 구석의 기둥의 받침은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단을 믿지않는 그리스도교인임을 알 수 있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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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이 지하 저수저이다. 우측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톱카프 궁전(여행사)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투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투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 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터어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보존되어 있어 그 흥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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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바오로회 수녀님의 글을 인용하였다.

        거대한 궁전 건물 입구에는 전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나치면서 순례객들이 목마를 때 마시도록 준비해 놓은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방음 역할을 위해 설치해 놓았던 장치였다.
        그 당시 황제들은 신하와 중요한 기밀을 의논할 때 대화를 하는 동안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엿듣고 대화의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수도물을 틀어놓았다고 한다. 물소리가 방음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싸한 방법으로 여겨지면서 그 당시 황제들이 갖추었던 통치력의 지혜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랜드 바쟈르(GRAND BAZAR)(여행사)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 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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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기의 음식

        시미프 - 빵

        바크라바 - 꿀에 젖은 케이크

        고등어 샌드위치

        쿤피르?- 통감자 속에 ......



▶참고 자료

        성지순례 일정상 보스프러스 해협관람은 할 수가 없다. 잘하면 멀리서나마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이스탄불에 온 이상 이런 한 곳도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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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그냥 이런곳도 있다는 정도)

        모하멧트 모스크(FATIH CAMII)


        FATIH, 즉 정복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 FATIH CAMII는 시내에 있는 3대 모스크의 하나로 오스만 투르크의 메호멧트 2세가 이스탄불을 점령한 기념으로 15세기에 창건한 것이다. 지진으로 붕괴된 후 18세기에 재건되었다. 이 모스크는 거대한 본관 외에도 병원, 목욕탕, 도서관 등 굉장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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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갈라타 타워(GALATA KULESI)

        원래 이 타워는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나 14세기 제노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이 자신의 자치령에 따라 재건한 것으로 지역의 이름을 따라 갈라타 타워로 개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이던 1446년에 타워의 상층부가 추가되면서 그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이 곳은 감옥, 화재감시탑, 해상감시탑 등 그 용도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졌다. 현재 갈라타 타워의 높이는 63미터로, 가장 높은 곳의 두 층은 전통쇼를 가미한 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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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위성사진으로 볼 때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술레이마니에 모스크(Suleymaniye Mosque) :

        거대한 돔과 4개의 날카로운 첨탑을 지닌 술레이마니에 모스크는 골든 홀 서쪽 해안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스탄불 모스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1550~1557년 오스만 제국 황금시대의 건축가 시난에 의하여 세워진 이 모스크는 구릉의 정상에 세워졌다. 이 모스크의 중앙 정원 네 구석에 세워진 4개의 첨탑 규모는 이곳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내부의 미후라브(기도를 위하여 벽에 판 구덩이)와 설교단은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스테인드 글래스의 창 너머로의 빛은 스테인드 글래스를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물들여 준다.이 모스크 부지 내에는 술레이만과 그의 처 흇레무 술탄(러시아명 로쿠세레나)의 사당이 있으며 부근에는 시난의 사당도 있다. 또한 사원 내에는 4개의 메드레세(이슬람 신자교), 1개의 외곽교, 캐러밴 사라이(대상들의 숙박지), 터키욕탕, 저소득층을 위한 주방과 호스피스 시설들이 있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에서 내려다보면 이스탄불의 주요한 옛 도시들을 대부분 볼 수 있다. 매일 새벽마다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교량이 들려지고 배들이 통과하는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했던 갈라타 다리, 또 전망대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내풍기고 있는 갈라타 타워가 뒤편에 우뚝 솟아있다. 보아즈 해협을 쉼없이 오가며 보통사람들의 발이 되어주는 소형 여객선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낙옆처럼 떠있는 고기잡이 배들이 곡예를 연출한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슐레이만 왕의 명령에 받은 건축가인 시난에 의해서, 골든혼이 내려다보이는 세 번째 언덕의 경사로에 건축되었다. 그는 1550부터 1557년까지 7년 만에 완공시켰다.  처음 3년 동안은 3,000명의 일군들이 깊이 6-7미터까지 땅을 파고 토대를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사원 건축을 위해 5,723명의 일군들이(이들 중 3,523명은 그리스도교인) 동원되었다고 한다. 건축비는 약 6,000만 달러 정도이다. 사원내의 돔의 크기와 높이는 성 소피아보다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보이는 사원 복합 건물의 크기와 우아함은 그 어떤 건물보다도 훌륭하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한 때 오토만 왕족의 거주지였던 오토만 올드 팔레스 자리에 세워졌다. 이 사원은 200x140미터에 달하는 정원의 한 가운데에 세워졌고 앞에는 주랑으로 된 정원이 있으며, 뒤에는 술레이만과 그의 부인인 휴렘 술탄의 무덤이 있는 커다란 묘지가 있다. 이 정원을 중심으로 사원의 부속 건물들이 주위에 있다. 철저한 종교 교육을 시켰던 회교 신학교는 이 부속 건물들 중 가장 중요한 곳이다. 회교 신학교 아래에 있는 시장은 관광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이 건물의 원래 이름은 아편쟁이들이 과거에 주거지로 사용했던 티리아킬레르 바자르였다. 병원, 자선소, 그리고 대상숙소가 사원의 서쪽 정원 앞에 있다. 오토만 시대에는 800명의 일군들이 이 거대한 복합 건물에서 일했다. 복합건물의 중심에 위치한 커다란 정원에는 11개의 입구가 있고 사원의 남쪽 벽에는 세정용 우물이 있으며, 서쪽 부분에 있는 정면 내부 마당으로 들어가는 3개의 입구가 있다. 정원 맞은편에 있는 창문 위의 타일 판넬에는 아랍어로 코란의 인용 구절 및 외국의 점령을 축하하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이러한 문구가 사원에 쓰여진 이유는 헝가리를 정복하여 획득한 자금으로 이 사원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사원은 4개의 첨탑이 있으며 이들 중 두 개는 각각 두 개씩의 발코니가 나머지 두 개는 각각 세 개씩의 발코니가 있다. 술레이만 대제는 그가 오토만 제국의 10 번째 황제라는 것을 이 발코니의 숫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가장 높은 첨탑의 높이는 74미터이다. 사원의 전체 면적은 약 4,500평방미터(약 3,500명)이며 넓이는 57x60미터이다. 만일 1평방 미터가 한명이 기도하는 자리라면 이 사원은 5,000명의 기도자를 수용할 수 있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술탄 아흐멧 사원에 이어 이스탄불에서 둘째로 큰 사원이다. 이 사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음향이 훌륭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일 램프들은 지면에 낮게 드리워져 있는데, 이는 쉽게 타면서 더 밝은 빛을 내도록 하기 위해 서이다. 오일램프가 걸려 있는 검은 색의 둥근 물건은 타조알로 만든 것이다. 여러 종류의 향료와 식물이 첨가되어 태워지는 이 알에서 나오는 향기는 사원 안에 거미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준다. 사원의 뒷마당에 있는 묘지는 비석들의 야외 박물관처럼 보인다. 고위 관직자들의 무덤에 만들어진 비석들은 훌륭한 예술 작품처럼 우아하다. 각 무덤의 머리 부분과 발 부분 양 쪽에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이 무덤들은 성지인 메카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술레이만 대제는 1566년에 사망했고 이 묘지의 중앙에 있는 무덤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사원의 미흐랍 바로 뒤에 있으므로 기도자가 기도하는 동안 신과 교류함과 동시에 그와도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각형의 무덤 천정에 만들어진 돔은 28개의 기둥이 받쳐준다. 내부에는 8개의 석관이 있는데 이 중의 세 개는 세 명의 술탄들의 것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무덤 가까이에 그의 부인인 휴렘 술탄의 무덤이 있다. 그녀는 러시아 성직자의 딸이었으며 셀림 2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제국의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록셀란이며, 그는 술레이만 대제로 하여금 그의 아들인 무스타파와 국무총리인 이브라힘을 살해하도록 했다. 그녀는 또한 오토만의 정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 무덤의 내부 벽도 이즈닉 타일로 장식되었다. 시난의 무덤은 묘지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이 무덤은 조각 및 건축면에서 걸작이며, 일반에게 공개되지는 않으나 단지 매년 4월 9일 '기념일'에만 방문이 허용된다.

        매주 금요일이면, 수천명의 이슬람 신자들이 금요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몰려든다. 이들 무리속에는 낯선 사람들도 여기저기에 눈에 띈다. 그들은 터키 사람들이 아니다. 가족의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낯선 땅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외국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터키에서 가까운 중동 국가나,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지만,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등에서 불법으로 입국한 사람들도 많다. 술레이마니예 사원 주변에는 폐허에 가까운 버려진 집들이 많은데, 이런 집들은 불법 체류자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위성사진으로 볼 때 그렇게 크지는 않는 사원 같음.


▶하루 이스탄불 순례를 마치고 이스탄불을 떠난다.

  이스탄불을 떠나는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저녁이다. 한국에 도착하면 오전에 도착한다고 한다.









▶이스탄불 공항.

☞이스탄불 공항 왼쪽, 우측이 우리가 순례할 지역이다.

▶인천 공항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을 한 후

글 지도 상으로 보면 이스탄불을 이륙해서 흑해를 지나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몽골, 중국, 인천으로 이어진다.

☞이스탄불에서 인천까지의 항로.

구글 지도 상으로 보면 이스탄불을 이륙해서 흑해를 지나 우크라이나, 시베리아, 몽골, 중국, 인천으로 이어진다.

비행 중 잘 보면 시베리아를 지날 때는 시베리아 겨울철 눈밭에 길게 한 줄로 그어진 횡단철도를 볼 수가 있고, 몽고의 고비사막과 중국 베이징 상공을 지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