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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루르드와 성모 발현

월요일은자유인 2007. 9. 20. 15:52
루르드와 성모 발현


루르드는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소도시로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이다. 루르드 성지는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벨라뎃다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에게 발현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끌었으며, 많은 병자들이 이곳을 방문한 후 치유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성모 발현과 메시지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벨라뎃다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하는 열 네 살까지 문맹이었고 종교 교육조차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식까지 앓고 있었다. 1858년 2월 11일 목요일 정오경 나무와 짐승의 뼈를 줍기 위해 마을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가브(Gave) 강변의 동굴 근처로 간 벨라뎃다는,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하늘은 잠잠하였고 나무들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동굴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서 후광이 빛나고 흰 옷에 하얀 베일과 파란 색 허리띠를 두르고 양발 위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아주 '젊게 보이는 어떤 여인'을 보았다. 벨라뎃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미소를 띠고 서 있는 그 여인 앞에서 잠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어머니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 일로 둘은 담요를 털 때 사용하는 방망이로 어머니에게 맞았지만, 벨라뎃다는 2월 14일과 18일에 또다시 동굴로 갔다. 그때 '동굴의 젊은 여인'이 "앞으로 15일 동안 매일 이곳에 와주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벨라뎃다는 2월 19일 금요일부터 3월 4일 목요일까지 매일 아침 동굴로 갔으며, 2월 22일 월요일과 2월 26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동굴의 젊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1858년 2월 25일부터 동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샘물
이 기간 동안 매번 그 '여인'은 조금씩 벨라뎃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8일째인 2월 24일 수요일에 "회개하시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오. 죄인의 회개를 위한 상징으로 무릎을 끓고 땅에 입을 맞추시오" 라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그 다음 날에는 손가락으로 샘물의 원천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씻도록 하였다. 또 13일째인 3월 2일 화요일에는 "사제들에게 전해 이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게 하고, 이곳에 성당을 짓게 하시오" 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곧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 이 '동굴의 젊은 여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월 21일에는 1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15일째 되던 3월 4일에는 8,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실망하고 흩어졌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3월 25일 목요일 아침, 벨라뎃다가 다시 동굴로 갔을 때 이 '젊은 여인'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네 번에 걸쳐 반복된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밟히지 않던 이 '여인'은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Immaculata Conceptio)라고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벨라뎃다는 곧바로 마을의 주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인 1854년에 이미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동정 성모 마리아의 무염 시태를 믿을 교리로 발표하였으나,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전세계에 루르드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의 전령자(傳令者)가 된 것이다.

1858년 4월 7일 열일곱 번째
발현 때의 촛불의 기적(그림)
성모 발현 당시의 동굴 모습 현재의 동굴 모습

이후 그녀는 4월 7일 수요일과 7월 16일 금요일에 다시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볼 수 있었는데, 4월 7일에는 촛불이 벨라뎃다의 손가락에서 오랫동안 탔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기적이 있었고, 이 일은 7월 16일에 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7월 16일 발현에 대해서는 그녀가 자세하게 언급하기를 회피하여 아직까지 비밀로 되어 있다. 타르브(Tarbes) 교구장 로랑스(Laurence) 주교는 성모 발현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에 착수하였는데, 그녀의 증언, 기도와 회개 운동 그리고 많은 치유 기적에 근거하여 1862년 1월 18일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로랑스 주교의 교서는 성지 순례의 토대가 되는 인정서였다. 그는 교구 내 신자들에게 '루르드 동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소망에 응답하기 위한 성당을 동굴 위에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벨라뎃다와 동굴을 보기 위하여 루르드에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성지화 작업 및 성당 건립

 
지하 성당 내부
1864년 4월 4일. 여러 주교들과 200여 명의 신부들을 비롯하여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체 거동과 더불어 루르드의 성모상이 축성되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동굴을 중심으로 한 성당 건립이 시작되었다. 동굴 위에 건립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은 크게 지하 성당, 상단부 대성전, 로사리오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성 비오 10세 대성전이 있다.
지하 성전은 1866년 5월 19일 벨라뎃다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벨라뎃다의 수도생활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벨라뎃다는 1860∼1866년 느베르(Nevers)의 사랑의 자매 수녀회 (Le Couvent des Soeurs de la Charite)에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1864년 8월 이 수녀회에 입회하기를 원하였지만,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66년 7월 느베르의 성 질다르(S. Gildard) 수련소에 입회하여 그 해 7월 29일에 착복식을 한 후, 마리 베르나르(Marie Bernard)라는 이름으로 서원하였다. 벨라뎃다는 이곳에서 종교 교육을 받은 뒤 기도와 은둔 속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발현 체험으로 인해 얻은 명성의 고통으로부터 보호는 받았지만, 수도원 장상들의 경직된 태도와 계속되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행복하게 생각하였으며 상냥함과 경건함과 기지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으면서도 자신에게 나타났던 성모 마리아의 참회 요구를 충실하게 이행하였고, 자신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비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그녀의 일생은 발현을 체험한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극히 평범한 삶이었다. 1879년 4월 16일 건강이 악화되어 35세의 나이로 수도원에서 사망한 벨라뎃다는 수도원 성당 내에 묻혔다.


루르드 성지와 벨라뎃다의 시성

벨라뎃다에게 나타난 성모 발현이 1862년 1월 18일 타르브(Tarbes) 교구의 로랑스(Laurence) 주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루르드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벨라뎃다는 루르드가 순례지로서 발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1866년에는 벨라뎃다가 참석한 가운데 지하 성당이 봉헌되었으며, 1876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이 축성되었다. 부패되지 않은 그녀의 시신이 1913년 8월 13일부터 사람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고, 1925년 6월 14일 복자품에 오른 후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성되었다. 벨라뎃다가 시성된 것은 그녀가 성모 발현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겸허한 단순성과 그녀의 전생애를 통해 보여 주었던 절대로 의심하지 않은 신뢰심 때문이었다.


동굴 위에 건립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
병의 치유를 위해
루르드 성지를 찾는 순례객들
부패되지 않은 벨라뎃다 성녀의 시신

성지 순례와 질병의 치유

각지에서 오는 순례객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이미 1872년에 6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있었고, 이후 교통 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1908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1964년 이래 매년 300만명 이상의 순례객이 방문하였으며 현재는 연간 400만 명이 넘는다. 순례객들 중에는 환자들도 있는데, 때로 이들 가운데 병이 치유되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었으며, 1866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루르드 연보>에는 더욱 많은 놀라운 사실들이 보고되고 있다. 1882년 의학적 증명을 위해 의사 생 마클루(Saint-Maclou)가 세운 사무소에서는 1905년까지 총 2,000여 건의 기적적인 치유 사실을 증명하였다. 교황 비오10세는 시성을 위한 공정한 판단이 될 수 있도록 이 치유사실들을 이중적 판단, 즉 의학 및 종교적 판단과 함께 교회법에 맞는 형태로 정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수천 건에 이르는 치유 기적 중에서 각종 검사와 실험을 통해 1858∼1862년의 8건, 1907∼1913년의 33건, 1946∼1970년의 24건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현재 루르드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순례지가 되었으며, 기적에 의한 병의 치유도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 한국 가톨릭 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췌

출처 : 레지오마리애 강남 은총의 모후Co.
글쓴이 : 박진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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