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 동굴의 성모이야기
'루르드의 성모'께 대한 사람들의 신심은 지극하였다. 울타리를 넘다가 붙잡혀 벌금을 물고서도 또다시 울타리를 넘곤 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루르드에서 얼마 안 되는 비아리츠라는 곳에서 휴양하고 있던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탄원했다. 종교적인 사람들과 반종교적인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조정할 줄 아는 황제는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울타리를 철거했다.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루르드가 속해 있던 타브르의 주교는 조사단을 임명하여 벨라뎃따의 이야기를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목격자들을 여러 차례 심문하고 벨라뎃따의 이야기를 수십 번 청취하여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한 주교는 루르드의 신심을 인정했다. 곧 이어 큰 성당들이 세워지고 병든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세워졌다. 오늘날 루르드의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의 하나이며 해마다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찾아든다. 이들 순례자들의 신심은 고무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하는 루르드의 하늘은 온통 기도로 가득 찬 듯한 감을 준다.
벨라뎃따는 후에 수녀가 되었다. 성모님이 경고한 바와같이 그녀는 현세에서는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성인'을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호기심, 벨라뎃따는 겸손하지 못하다고 오해한 원장 수녀의 엄격함, 그리고 육신을 갉아먹는 폐결핵 등 갖은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루르드에서 병을 고친 사람의 수효가 수백을 헤아렸지만 벨라뎃따는 그런 은혜도 입지 못했다. 1879년 4월 16일 벨라뎃따는 '동굴의 성모'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거룩한 마리아여, 불쌍한 죄인,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그녀는 1933년 12월 8일 성녀품에 올림을 받았다.
하느님께 대한 19세기 반란의 주동자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래 하느님이 그들에게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사용하여 보다 잘 당신에게 봉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하느님께 대항하는 무기로 이용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과학적 발명과 물질적 향상을 허락하셨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대신 모든 공을 자기들 스스로에게 돌려 버렸다... 하느님께 대한 반란은 날로 더해 갔으며, 그 어느 누가 이를 막지 못하는 한 끝없이 더해 갔을 것이다. 그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성모님이었다. 성모님은 파리와 라살레트에 발현하셨으며, 교황은 성모님이 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교리로 선포했다. 이렇게 시작된 성모님의 반격은 1856년 그 절정에 다달았다. 하느님께 대한 반란을 이끈 사람들은 극히 우수한 두되의 소유자들이었다. 고로 그들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반격도 그들 못지 않게 우수한 두뇌를 가졌으며 그들 못지 않게 훌륭한 이론을 펼 수 있는 성인을 앞세워야 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께 돌려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성모님이 택하신 사람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나이 14세가 되도록 문답도 외우지 못하는 무식한 농촌 소녀 벨라뎃따 수비루였다... 1858년 2월 11일 프랑스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루르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성모님은 모두 열아홉 번에 걸쳐 벨라뎃따에게 발현하셨다... 루르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처음 알게 된 이래 그 때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 생활에 충실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과 반달족 그리고 아리우스와 알비겐 등 이민족과 이단자들의 박해를 극복했다. 소위 종교 개혁이라는 거센 물결이 밀어 닥쳐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할 때 루르드 주민들은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전 프랑스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일어난 반란에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한 신앙 생활을 했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 공경에 그러했다.
발현 개요
성모님이 루르드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뉴스가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이 루르드의 동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모님을 보는 것은 벨라뎃따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컴컴한 동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벨라뎃따의 모습을 봄으로써 성모님의 발현을 알았다. 그녀는 성모님이 발현하면 곧 탈혼 상태에 들어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벨라뎃따의 이야기를 믿었다. 그러나 관리들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웠다. 2월 18일 목요일은 성모님이 세 번째 발현하신 날이었다. 성모님은 그 날 벨라뎃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곳에 오너라.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 벨라뎃따는 죽을 때까지 성모님의 이 말씀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여섯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슬픈 표정을 하시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곧 표정을 고쳐 미소 지으셨다. 라살레트에서 성모님은 내내 통곡하셨다. 그러나 루르드에서는 간혹 슬픈 표정을 하시기도 했지만 자주자주 미소를 지으셨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도 성모께 대한 신심의 증가와 무염 시태 교리의 선포가 주요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덟 번째 발현 때 벨라뎃따는 두 무릎으로 성모님이 서 계신 동굴 앞 장미나무 있는 곳까지 기어 갔다. 그녀는 무릎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를 굽혀 절을 한 후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하여 "통회하라! 통회하라!"하고 외쳤다. 아홉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벨라뎃따에게 우물 자리를 잡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여 년을 두고 많은 병자를 낫게 한 저 유명한 루르드의 우물이다. 2월 26일 금요일, 성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위하여 머리를 숙여 땅에 입맞추어라." 벨라뎃따는 얼른 그렇게 했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3월 2일 성모님은 당신이 발현하신 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또한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3월 25일은 성모 영보 축일이었다. 그 날 따라 벨라뎃따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부인이 바로 성모님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벨라뎃따에게는 그저 '부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소녀는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부인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소녀가 세 번째 물었다. 그 때의 일을 벨라뎃따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은 장미나무 위에 서 계셨다. 그 모습은 '기적의 메달'에 그려진 성모님과 비슷했다. 내가 세 번째 물었을 때 부인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은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했다. 부인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위로 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눈을 올렸다. 부인은 서서히 손을 편 후 나를 향하더니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했다." 순박한 농부의 딸 벨라뎃따는 그 중대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페라말 본당 신부에게 그 말을 전했다. 본당 신부도 그 때가지 성모님의 발현을 의심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의심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 순박한 소녀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지어 낼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님은 불과 3년 남짓 전에 교황 비오 9세가 선언한 무염 시태 교리를 그런 방법으로 추인하셨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이 얼마나 묵시적인 말이냐? 그 한마디 속에는 원조의 범명과 강생 구속 교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새로운 요약이다. 시기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원천적인 계시를 까맣게 잊어 가고 있을 때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루르드의 일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고 있었다. 점점 많아지는 군중들의 수는 그들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1789년, 1830년, 그리고 1848년 3차에 걸쳐서 프랑스 정부를 뒤엎은 것은 바로 파리의 군중이었다. 1858년 루르드에 모인 군중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제3 제국의 정정(政情)은 그리 안정되어 있지를 못했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가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하였다. 사실 그들은 보통 교우들과 똑같이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판공 성사를 보고 교무금을 내고 영성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모님의 발현 같은 것은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와 같이 인지가 발달한 시대에 그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벨라뎃따를 심문하고 위협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중에는 한때 절도 혐의로 옥에 갇힌 일이 있는 그녀의 아버지까지 위협했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리들은 동굴 앞에다 울타리를 치고 경찰관을 배치하여 아무도 접근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시끄러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다시는 성모님이 발현했다는 얘기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복되신 어머니와 울타리는 아무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성모님은 여전히 같은 곳에 발현하셨다. 벨라뎃따는 동굴 앞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눈엔 개울도 울타리도 보이지 않았다. 성모님과 나 사이의 거리도 보통 날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성모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따라 성모님은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성모 마리아는 미소를 지은 후 벨라뎃따에게 부드러운 이별을 고했다. 그 날은 마지막 발현의 날이었다. 그러나 루르드의 이야기는 그 날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루르드
루르드는 프랑스 남부, 피레네산 기슭에 있는 인구 약 1만 7,000명의 마을이다. 1858년 2월 11일, 이곳 가브 강가에 있는 동굴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셨다. 벨라뎃다 수비르라는 한 가냘픈, 그러나 마음씨 곱고 효성스러우며 신앙심 깊은 소녀 앞에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11일부터, 14일, 18일, 19일, 20일, 21일, 23일등 발현은 계속되었으며, 열 한 번 째 발현 때 이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씀이 있었다. 25일에는 발현하신 자리에 샘이 솟았는데, 28일에 눈병을 앓던 남자가 그 샘물로 눈을 씻자, 당장에 깨끗이 나았다. 7월16일에 열여덟번째의 마지막 발현이 있었는데, 샘물이 잇달아 기적을 나타냈다. ■ 성모 발현 벨라뎃다가 11-12세 무렵 집안이 기울어 땔감을 구하러 개울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는데,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리자, 동굴 입구에 있는 찔레와 들풀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더니, 동굴 속에서 황금빛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모습이 똑똑히 떠올랐다. 귀부인은 새하얗고 헐렁한 옷을 입고, 머리에서 어깨에 걸쳐서 흰 베일을 쓰고, 옥색 띠를 매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에는, 금빛사슬에, 커다란 흰 구슬이 꿰인 로사리오를 늘어뜨리고, 그녀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던졌다. 벨라뎃다가 열심히 로사리오를 굴리며 기도를 하자, 귀부인도 로사리오를 하나씩 굴렸다. 로사리오의 기도를 외고 있을 때, 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발현 기간 동안 성모 마리아는 매번 벨라뎃다에게 메시지를 전하셨다.8일째인 2월 24일 수요일에 "회개하시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오. 죄인의 회개를 위한 상징으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손가락으로 샘물의 원천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씻도록 하였다. 13일째인 3월 2일 화요일에는 "사제들에게 전해 이 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게 하고, 이곳에 성당을 짓게 하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곧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이 '동굴의 여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곧 사람들은 흩어져 갔다. 3월 25일 목요일 아침, 벨다뎃다가 다시 동굴로 갔을 때 성모 마리아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네 번에 걸쳐 반복된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던 이 성모마리아는 열 여섯 번째의 발현 때 그녀에게 고했다.(Immaculata Counceptio)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 라고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벨라뎃다는 곧바로 마을의 주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인 1854년에 이미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동정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발표하였으나,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전세계에 루드르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의 전령자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4월 7일 수요일과 7월 16일 금요일에 다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볼 수 있었는데, 4월 7일에는 촛불이 벨라뎃다의 손가락에서 오랫동안 탔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기적이 있었고, 이 일은 7월 16일에 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7월16일 발현에 대해서는 그녀가 자세하게 언급하기를 회피하여 아직까지 비밀로 되어있다. 이러한 그녀의 증언, 기도와 회개를 통해 1862년 1월 18일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로랑스 주교는 교구 신자들에게 '루드르 동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소망에 응답하기 위한 성당을 동굴 위에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벨라뎃다와 동굴을 보기 위하여 루드르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루르드에는 1868년 5월에 첫 번째 지하성당이, 이어서 제2, 제3의 성당이 차례로 세워졌다.
■ 메시지○ 개인적인 메시지"나는 15일 동안 여기에 즐겨 오겠다." "나는 네게 현세의 행복을 약속하지 못하지만, 후세의 행복은 약속하마." 이 말씀대로,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그녀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메시지는 기도가 주 내용이고, 베르나뎃따가 결코 알지 못했던 세 가지 비밀로 되어 있다.○ 회개와 관계되는 메시지"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여라.""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땅에 입을 맞추어라."
"샘물을 마시고 씻어라.""저기 있는 채소를 먹어라."기도, 보속 행위 그리고 특히 회개의 증표가 보이는 생활의 회개가 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샘은 2월 25일에 동굴 발치에서 발견되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요한 4 : 14) 주님의 물과 정화를 상기시키는 듯 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간의 육신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하셨다. 수많은 병자들이 이 물로 씻거나 잠김으로써 원상태로 회복되고 치유되었던 것이다. ○ 교회적인 메시지"시람들이 행렬을 지어 이 곳으로 오게 하고, 이 자리에 성전을 세워야 한다고 사제들에게 알려라."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성전을 세우라는 명이었다. 성전이라는 외적 건물은 "살아있는 돌"로 완성되는 영적 건물, 곧 하느님의 집의 표시가 된다.- 메시지의 확인 : 3월 25일, 베르나뎃따의 주장에 따라, 마사비엘의 부인이 당신의 이름을 밝혔다 : "나는 원죄 없으신 잉태이다."당신이 회개하도록 부르신 이들에게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인 당신 자신을 주셨다. 마리아는 교회의 표상이다. 마리아는 또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당신 아드님의 신비체 속에서 당신의 모성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 마리아의 메시지는 복음서를 반향한다."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 루가 18 : 1 참조)"너희들의 생활을 고쳐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 : 14)"당신은 반석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마태 16 :18)."나는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다."(마태 28 : 20)
■ 성모님 발현동굴동정 성모께서 1858년 2월 11일 부터 7월 16일 사이에 벨라뎃다 수비루에게 18번 나타나셨던 곳이다. 1864년 4월 4일에 축성된 이 성모상은 마씨비에유 동굴에 발현 시와 같은 모습으로 안치되어 있다. 성모상 밑에는 감실이 있어, 성체를 모셔 놓았고, 제대 왼편 동굴 안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 아래에는 1858년 2월 아홉 번째 발현 당시의 성모님의 말씀 에 따라 벨라뎃다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올랐던 샘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성모님께서는 피레네 말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뎃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제대 왼쪽 동굴 안편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아래에는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당시에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뎃다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 올랐던 샘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성모님께서 피레네 발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뎃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 기적수
동굴 안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 아래에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 당시의 성모님의 말씀을 따라 벨라뎃다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올랐던 샘이 있다. 그리고 벨라뎃다는 "마시고 거기서 씻어라"하신 성모님의 말씀에 순명하였다.
■ 목욕실
가브강을 따라 동굴을 지나가면 샘물로 많은 순례 객들이 씻을 수 있도록 1955년에 다시 지은 목욕실이 있다.
■ 대성당(무염시태 성당)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라"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성당 제대는 성모님 발현 장소의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 양쪽의 유리창은 발현 당시부터 1876년 루르드 성모상의 역사까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좀 더 위쪽 유리창에는 세상 태초부터 교황 비오 9세가 성모무염시태 신비를 정식 교의(믿을 교리)로 발표하기까지의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1862년 처음으로 구상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성전은 13세기 고딕 양식 설계로 이루어졌는데, 1871년에 낙성되고 1876년에 축성되었다. 고딕양식의 종루는 그 높이가 지상 70m에 이르며, 금색이 칠해진 중심부는 성모마리아가 벨라뎃다에게 원죄 없는 잉태를 알려 준 말씀이 문자로 새겨져 있다. 입구 중앙에는 왕관을 쓴 루드르의 성모상이 있으며, 성당 후면 부에는 여러 개의 소성당이 있다. 성당의 회중석과 중심부에는 성모마리아의 일생이, 소성당에는 루드르에서의 발현?순례?벨라뎃다의 일생이 그려진 스테인드 글래스가 있다.
■ 로사리오 대성당
신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성모님 발현 후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완성되었는데, 항상 묵주를 손에 들고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신 동정 성모님을 위해 특별히 로사리오 대성당(매괴의 대성당)으로 봉헌된 곳이다. 이 성당은 1901년 묵주의 15현의를 뜻하는 작은 15개의 성당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당에서 성모님 신비에 대해 묵상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아무런 지주나 기둥이 없이 건축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 또는 밀알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 십자가의 길
1912년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 위에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각처마다 쇠로 조각된 2m 높이의 상들이 있다. 누구나 이 언덕의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대사를 얻어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한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 또 한편 병자 순례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은 가브강을 따라 목욕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 현재매년 약 4백만 명이 루르드를 순례하고 있다. 모든 프랑스 교구와 벨지움 교구민들이 연중 순례를 한다. 세계 도처에서 특히 군인 순례자들이 몰려든다. 매년 약 650,000명의 병자들이 성지 본부에 접수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의료봉사를 받고 있다. 매일 부활절로부터 10월 중순까지 "축일"미사가 거행되고 횃불 행진을 한다. 주 2회 주교들과 수백 명의 사제들이 성 비오 10세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한다. 바오로 6세를 위한 연미사 때에는 8백 명의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였다. 개인 고백 성사도 화해의 성당에서 볼 수 있으나, 예식서의 규범을 엄수하면서 공동 고백과 총 사죄가 행하여진다. 자주, 적어도 주 2회씩 병자들을 위한 공동 도유식이 있다. 기도와 회개의 장소로서 그 중요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 동굴 같은 성소에는 매일 성체가 현시 되어있다. 십자가의 길 또한 매우 인상적 이밖에도 개인 혹은 단체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소, 비신자를 위한 안내소, 청소년들의 안내소, 노약자 전용 안내소들이 마련되어 있으며, 치유와 기적, 성소와 부부 혹은 가정 문제, 평화 문제 등을 위한 대화장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