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성지순례/2010성지순례

프랑스 성지순례 파리 01 (노트르담대성당)

월요일은자유인 2009. 8. 18. 07:51

Lourdes - Mont-de-Marsan(114km) - Bordeaux(259) - Tours(590) - Paris(850km) 실제거리는 1000km 정도.

 

▶노트르담 대성당.

중세 고딕 양식의 대성당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성당.

그 규모와 오랜 역사로 유명하며, 고고학과 건축학적 관심의 대상이다. 파리 센 강에 떠 있는 시테 섬에 있다.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서쪽 앞면의 성가대석과 네이브[身廊]는 1240년 완공되었고 그뒤 100여 년에 걸쳐 포치(porch), 예배당, 그밖의 여러 장식물들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 조상과 3개 출입문 측벽에 서 있는 조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트랜셉트[翼廊]와 네이브 사이에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의 대건축물로 탑 위에 뾰족탑을 덧붙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그대로이다. 4각형 쌍탑과 쌍탑의 선을 따라 정면을 3부분으로 나눈 버팀벽의 수직선과, '그랜드 갤러리'의 수평선이 '장미창'(薔薇窓)을 중심으로 비할 데 없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3개 입구와 그 입구의 이름과 관련지어 만든 조각, 그 위에 유대 왕과 관련있는 조각이 들어서 있는 갤러리, 직경 10m에 가까운 장미창, 그 위에 긴 열주(列柱), 좌우의 탑 등 양식은 고딕 건축의 전형으로 성당 건축의 규준이 되었다. 내부는 아일[側廊]이 2층으로 되어 있고 네이브는 거대한 원주가 끝에서 3개의 기둥으로 나뉘면서 천장으로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밝고 높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장엄한 종교적 공간을 연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북쪽 정면의 장미창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작품이다. 오른쪽 출입구의 〈성모자 聖母子〉(1165~70경), 왼쪽 출입구의 〈성모대관 聖母戴冠〉(1210~20경), 중앙 출입구의 〈최후의 심판〉(1220~30경), 북쪽의 〈붉은 입구〉, 내진(內陣)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했다.

1. 노트르담 대 성당의 기원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2. 『노트르담』 , 『고딕(Gothic)』 어원

『노트르담』어원

-노트르담 [ Notre-Dame ]은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하기 위한 순례지 교회 등에 이러한 이름이 많다. -우리의 성모(Our Lady)라는 뜻

■『고딕(Gothic)』 용어의 유래

원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세 건축을 양만족인 고트(Goth)인이 가지고 온거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된 미술사 및 비평용어영국에서‘Gothick’이란 단어는 ‘재미없는’,‘기묘한’혹은 고전적 규범과 반대되는 것이란 의미로 17세이과 18세기 작가들이 사용해 왔다. 그러나 영국 골동품 애호가들이 중세 기념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경멸적인 의미에서 벗어났다. ‘고딕’이란 용어는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그 평가를 받게 되지만, 거기에 함께 형성된 장식, 조각, 회화, 공예에 이르기까지 총괄적으로 확산되어 적용되었다.

3. 노트르담 대 성당

파리의 노트르담은 프랑스 고딕으로는 神殿 고딕의 대표적 건축이며, 그규모가 매우 웅장한 것이다.

이 大聖堂의 建立은 1163~1214년으로 콰이어∙트랜셉트 및 보올트 등은 1190년에 완성하고 西正面은 1214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亂命 때 대파되었으며, 1846~1879년 비올레르뒤크(Violet-le-Duc)가 재 건축 한 것이 현존한다. (1163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30년에 완공, 무려 170년동안 공사)

그 평면은 5樣式이며 반원형의 帝室로 되어 있고 중앙 네이브이 높이는 약 35m이다. 그 구조는 중앙에 넓은 네이브와 양쪽에 2개의 아일이 있고, 천장은 리브 보올트가 結合되어 있다. 트랜셉트는 그 突出이 매우 적으며 아일과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외관은 정면이 西向이며 그 模襲이 훌륭하고 벽면에서 깊이 들어가 있는 3개의 정면 출입구는 모두 포인티드 아치가 構成되었으며, 중앙 출입구 상부에는 지름 약 9.2m의 큰 로즈 윈도가 있다. 정면 입구 상부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聖母 마리아를 主宰로 한 조각상들이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 좌우에는 높고 큰 2개의 聖이 耐立하고 원래의 설계에는 그 탑위에 스파이어가 높이 솟아 있었다고 하다. 현재의 것은 매우 重厚한 감을 주는 것 같다. 이 탑 중간은 트레이서리를 가진 構成으로 연락이 되어 있어서 네이브의 지붕을 감추고 있다. 이 건물의 正面構圖는 절도가 있으며, 견실한 조화를 나타내고 안정된 비례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측면은 플라잉 버트레스가 돌출하여 있고, 그 하부에는 양쪽에 아일이 있다. 플라잉 버트레스들은 曲蘚的인 구조의 원리를 何神化하여 생기있고 역동적인 外觀을 형성하고 있다. 성당 내부에는 네이브와 아잉 사이에 큰 oo가 늘어서고, 그 oo위에 작은 oo가 2층을 지나 클이어스토리까지 뻗쳐 올라가 높은 네이브 천장의 6分 보올트 리브를 받친다. 벽면 부분이 아직 많아서 수직선 효과가 충분히 突出되지 않았으나,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진 큰 高蹤들은 고딕 성당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빛과 색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 구 분

원 어 명

Cathdrale Notre-Dame de Paris

구 분

대성당

소 재 지

프랑스 센강 시테섬

건립연도

1163년

건 립 자

M. 쉴리

건축양식

고딕양식

4. 노트르담 대 성당의 건축적 특징

1) 개관

- 가장 오래된 프랑스 고딕 건물의 하나로 승정

모리스(Bishop Maurice)에 의해 창건

2) 특징

- 긴 네이브의 거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트란셉트가 외벽에 거의 돌출되지 않음→ 트란셉트의 소극화

- 정면 중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띠모양의 인물조각상들은 커다란 Rose Window를 정면의 나머지 부분과 결속

3) 구조

- 네이브측 아일부분에서는 로마네스크식의 구획체계가 초기고딕의 6분 리브 볼트방식과 결합

- 아일은 정사각형으로 구획 : 콰이어 부분의 2중회랑으로 이어지고 있음.

- 육중한 서측벽은 결코 세워지지 않았던 탑들과 돌출된 첨탑들을 지지하기 위하여 구조적으로 필연적

- 건물외부에 횡압력을 지탱하기 위하여 플라잉 버트레스를 설치

평면

횡단면

주출입구측 측면

4) 형태

- 정면이 아홉개의 정사각형으로 구성 : 삼위일체의 종교에 잘 어울리는 세 개의 입방체

- 클리어스토리의 창문하부에 트리포리움 대신 원형창이 연속

- 주두 상부에서 시작되는 벽기둥 다발을 분화하지 않고 기둥 중간 중간의 묶음띠도 제거 → 수평수직의 움직임 가속화

- 높이 솟은 네이브 볼트의 횡추력을 지탱하는 버트레스를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됨 → 깨끗하고 거침없는 통일공간

5) 의미

- 3×3 단위의 기하학적 질서의 건축 및 조각의 통합으로 유명한 노틀담은 프랑스왕권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 이와 같은 양식을 전파하는 모델이 됨

6)중세 고딕 양식의 대성당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성당 그 규모와 오랜 역사로 유명하며, 고고학과 건축학적 관심의 대상이다. 파리 센 강에 떠 있는 시테 섬에 있다.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서쪽 앞면의성가대석과 네이브[身廊]는 1240년 완공되었고 그뒤 100여 년에 걸쳐 포치(porch), 예배당, 그밖의 여러 장식물들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조상과 3개 출입문 측벽에 서 있는 조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트랜셉트[翼廊]와 네이브 사이에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의 대건축물로 탑 위에 뾰족탑을 덧붙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그대로이다. 4각형 쌍탑과 쌍탑의 선을 따라 정면을 3부분으로 나눈 버팀벽의 수직선과, '그랜드 갤러리'의 수평선이 '장미창'(薔薇窓)을 중심으로 비할 데 없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3개 입구와 그 입구의 이름과 관련지어 만든 조각, 그 위에 유대 왕과 관련있는 조각이 들어서 있는 갤러리, 직경 10m에 가까운 장미창, 그 위에 긴 열주(列柱), 좌우의 탑 등 양식은 고딕 건축의 전형으로 성당 건축의 규준이 되었다. 내부는 아일[側廊]이 2층으로 되어 있고 네이브는 거대한 원주가 끝에서 3개의 기둥으로 나뉘면서 천장으로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밝고 높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장엄한 종교적 공간을 연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북쪽 정면의 장미창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작품이다. 오른쪽 출입구의 〈성모자聖母子〉(1165~70경), 왼쪽 출입구의 〈성모대관 聖母 戴冠〉(1210~20경), 중앙 출입구의 〈최후의 심판〉(1220~30경), 북쪽의 〈붉은 입구〉, 내진(內陣)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했다.

5. 노트르담대성당의 보전복구간의 변화

- 18세기 프랑스 혁명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 됨.

-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 조상과 3개의 출입문 측변에 서있는 조상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함, 트랩셉트아와 네이브 사이의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 1830년대 비올레 르 뒤끄에 의해 복원되어 원전보다 아름다운 고딕의 웅장함을 보여 줌.

6. 노트르담 대성당 사진

7. 고딕양식의 이해

Flying buttres (플라잉 버트레스)

12세기 플라잉 버트레스의 발달은 고딕양식의 위대한 진보였다. 벽이 없이 얹혀있는 무거운 지붕으로부터 아래지면까지 간접적인 힘을 전달하는 이러한 방법은 건축가들에게 고딕의 이상을 자유롭게 실현 할 수 잇도록 하였다. 벽이 괸장한 높이오 안전하게 세워져서 거대한 건축의 공간이 무한한 하늘의 공간으로 치솟을 뿐 아니라 무게를 지탱하던 역할로부터 해방된 벽은 유리로 같이 그 무게를 지탱하지 않는 재료로 대치될 수 있었다. 플라잉 버트레스는 거대한 구조물에 비해 경쾌함을 가져왔다.

리브 볼트의 출현으로 볼트 구조의 하중은 전부 리브가 받으며, 이것은 한곳에 모여서 주형을 만들게 되고, 이 부분에 작용하는 횡력은 매우 크게 되었다. 6분 볼트와 그에 따르는 정방형의 2중 베이 체계는 로마네스크 건축이 아직도 고딕양식의 초기에 잔재했던 것으로, 볼트의 횡력을 외부에서 지지할수 있게 된 4분 볼트의 체계와 함께 플라잉 버트레스의 출현 계기가 되었다.

네이브와 아일의 사이와 같이 벽체 하부의 아치를 지지한 곳은 플라잉 버트레스의 구조법을 사용하여 그 횡력을 바깥쪽의 버트레스에 전달시켰다. 플라잉 버트레스 구조는 아일의 지붕보다 높게 아일 바깥쪽에다 버트레스를 만들고, 아일의 지붕 상부 공간에다 네이브의 볼트가 집중하는 곳에서부터 바깥쪽 버트레스로 궁형의 아치를 구축해서 네이브 볼트로부터 오는 횡력을 바깥쪽의 버트레스에 전하게하여 그 횡력을 지지하도록 하는 구조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는 순전히 구조적 요구에 출발한 고딕의 독특한 법으로, 이 버트레스 상부에는 피너클을 붙여서 고딕의 특징을 잘 나타내었으며 회화적인 표현으로 매우 훌륭한 외관을 형성하였다. 이 플라잉 버트레스의 완성은 매우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며 볼트에 작용하는 하중은 플라잉 버트레스에 의하여 지지하게 되므로 네이브외벽에는 넓은 창을 자유로이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벽으로 된 면이 매주 작게 되었다. 따라서 주로 건물입면에 대한 장식적 수법은 창에 집중되어 고딕적인 독특한 트레이서리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또 그 창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8. 고딕건축의 발전 (프랑스)

1) Transition (변환점, 1100~1180년경) 첨두형 보올트를 사용하였으며 네이브(nave)는 클리어스토(clearstoy)로 채광토록 하였다. 클리어스토리 아래 돌출한 좁은 유보회랑(ambulatory)의 트리포리움(triforium)과 트리뷴(tribune)은 그 높은 벽으로 하여금 횡력을 지지토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창(stained glass)은 트리뷴측 외벽에는 설치되었지만 트리뷴의 다락에 해당하는 트리포리움 측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때때로 로마네스크(Romanesque)에서처럼 여전히 둥근 아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 아케이드의 지주는 다소 굶은 기둥으로 구성되었고 그 윗부분에는 작은 샛기둥을 두어 두개의 아치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은 지방에 따라 각가 다른 전토으이 영향을 받았으나 4계층 구성과 6분 보올트가 공통점이었다. 네이비의 벽이 아케이드(archway), 트리뷴(gallery), 트리포리움, 클리어스토리ㅡ이 4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시대에는 아직 플라잉 버트레스가 발달되지 않았다.

2) lanceole (첨두형, 1180~1250년 경)

이 기간 중에는 샤르트르(Chartres)성당, 랭스(Eeims)성당, 아이앵(Amiens)성당 등의 대작들이 건설되었다. 창문의 아치와 아케이드는 뾰족하게 되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의 둥근 창이 클리어스토리의 형식으로 생겨났다. 트리뷴은 사라지고 플라잉 버트레스가 트리뷴의 역학적 기능을 대신하였다. 플라잉 버트레스가 나타나자 보울트의 횡압을 지지하는 역할을 맡았던 트리뷴이 사라지고 벽면의 구성은 3계층구성으로 되었다.

보울트가 정방형에서 장방혀으이 4분 보울트로 되었으며 네이브와 아이(arsle) 똑같은 베이(bay)수로 분할할 수 있게 되었다. 첨두홍예(ogive)와 벽과의 각도가 커지기 때문에 횡압은 증가하지만 각 기둥이 균등한 힘을 받게 되기 때문에 모든 기둥이 균일화 되었고 샤프트는 지면에서 바로 보울트에 이르고 리바나 샤프트의 상직적인 의미가 완전해졌다. 발아래에까지 한꺼번에 상승하는 가상적인 힘의 운동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균일화된 기둥이 좁은 간격으로 늘어서 있게 됨에 따라 강한 수직 방향의 상승감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apse를 향한 수평의 방향성도 강해진다. 이 두가지의 다른 방향성 사이의 극도로 긴장된 조화 이것이 고전적 고딕건축 고조기이며 샤르트르성당(1994~1260년)의 건설에 이에 랭스성당(1210~1214년), 아이앵성당(1220~1236년,외진 1226~1270년, 내진)으로 계승되어 최고의 완성에 달하였다.

아미앵성당은 고딕사원의 파르테논(Parthenon)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고딕 건축 전체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걸작이다.

3) Rayonnant (전성기, 1250~1375년경)

이 기간의 초기는 St, louis왕의 통치기간에 해당되고 그 말기는 중세건축의 발전을 중단시켰던 백년전쟁 중인 1375년에 해당된다. 이 기간 동안에 고딕식 기법은 절정에 이르고 벽은 최소화되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가득 메워졌으며 트리포리움의 벽에도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가득 메워졌으며 트리포리움의 벽에도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었다. 클리스토리내의 트레이서리(tracery)는 트리포리움의 수직선을 연장한 선상에 놓여있다. 성가수석이 유보회랑(ambulatory), 클리어스토리, 트리포리움과 1층의 창문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오직 커다란 스테인드칼라스의 창 하나 밖에 없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기단의 작은 그것들이 커다란 대아치의 기둥을 둘러싼 지면에서 솟아 있고 구대의 가벼운 모울딩(moulding)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높기 때문에 기둥들의 모습이 세련되어지고 예리해졌으며 아치의 크기가 인상적이다.

4) Flamboyant (화염식, 후기, 1376년 이후)

14세기 시작된 백년 전쟁 (1339~1453년)과 14세기 중엽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대 휴행으로 인구가 감소되자 대분분의 사원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에 대신하여 왕립예배당이나 해외 무역, 방적업의 발전에 따라 인구가 급격히 증가된 교구 사원을 중심으로, 14세기말이후 공사가 개시되었을 즈음에는 갑자기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후기 고딕건축은 Troyes의 쌩 위르벵(St. Urbain)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2계층 구성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영국의 영향을 받아 아주 장식적으로 되었다. 속주의 많은 샤프트는 피어에 용합되어 능선으로 흔적만 남거나 다시 원주로 되돌아갔으며 더욱이 능선이 나선 형상으로 기둥을 에워싸는 것도 있었다. 주두는 흔적이 없이 소멸되고 각 리브는 나뭇가지와 같이 기둥으로부터 갈라져 나갔다. 이 양식의 기술은 15세기를 특징지우며 16세기의 일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창의 트레이서리는 곡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마치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후기 고딕건축을 화염식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고딕건축의 본가인 프랑스에서는 역시 2차원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중부 뽀아띠에(Poiter, 1162년)에는 아일이 거의 네이브와 같은 높이에 있는 큰 홀과 같은 형식의 교회가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독일의 할렌키르크(hallenkirche)의 유행으로 이어지는 전조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의에서 후기 고딕건축은 전적으로 과거를 회고하는 방향으로 흘렀으나 특히 영국에서는 완전히 독창적인 형태를 창조해 냈으며 과거의 권위는 일체 거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