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성지순례 03
4월 15일(목)
장거리 비행과 시차 적응이 안되었지만,
오늘부터 성지순례가 시작된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보통 8시쯤 순례가 시작이 된다.
3번째 로마이기에 코스는 일정하다.
아마 바티칸 박물관, 성시스틴성당, 성베드로 대성당순례후
점심을 먹고
카타콤베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라떼란 대성당, 성계단성당,성모마리아대성당을 순례하고 마드리드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으로 가야 한다.
로마의 유명한 관광지는 드를 시간이 없을 것이다.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 찍을 시간은 있을 것이고
다른 곳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바티칸 지도이다.
중앙 위쪽이 바티칸 박물관이 위치하고.
아침 일찍나가서 줄을 서서 입장을 한다. 시즌때는 줄서기만 2시간 이상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면 옆 건물인 성시스틴 성당을 거쳐 성베드로 대성당과 광장 순례를 할 수가 있다.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The Vatican Museum)
성 베드로 광장 오른편 성벽을 따라 5-6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은, 그 역사가 거의 500년이나 되어, 세계 각국 박물관의 표본이 되어 왔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년)가 아폴로 석상을 교황청 안에 안치함으로써 시작된 이 박물관은 28개의 부분으로 크게 분류되는 바,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와 상형문자를 비롯, 그리스, 로마제국, 르네상스, 현대미술 등이 총망라되어, 여기에 소장된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물론 이 가운데엔 아직 미공개의 예술품도 있고, 분류가 안된 필사본 등이 꽤나 된다고 한다.
양쪽 벽에만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가득 차 있으며 시스틴 성당도 이 박물관의 마지막 코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 시스틴성당(Sistine Chapel)
성모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틴 성당은 교황 식스또 4세(1471 - 1484)의 명으로 1475 - 1482년에 걸쳐 죠반니 데 돌치(Giovannino de Dolci)의 설계로 건축된 것으로, 당시의 교황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고 부른다.
이 성당은 교황의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성당이며, 또 교황이 서거했을 때,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여기에 모여 교황의 비밀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제대를 중심으로 양쪽 벽에는 12개의 그림이 있는데, 제대 오른편엔 모세의 일생을 왼편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나타낸 작품들이 있다.
원형의 천장은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프레스코(frescoes)화로 그린 것이다.
시스틴 성당의 제대 뒤에는 미켈란젤로의 최대걸작인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6-1545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200평방미터가 넘는 방대한 작품이며, 39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지금 바티칸(바티칸이란 점치는(vaticinia)고지(高地)란 뜻을 지니고 있다.)
대성당은 네로(Nero)황제(54-68년)의 경기장으로부터 북쪽 언덕받이 위에 콘스탄틴 대제(大帝, 272-337)가 4세기에 세웠던 대성당 터에 서 있다.
▶이 대성당 바로 밑은 초세기의 이교도 공동묘지였고, 이 무덤들 사이에 베드로 사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노예라도 자기 무덤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어느 누구도 타인의 무덤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신성불가침의 로마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법적인 보호도 못 받는 역적으로 취급받았다.
▶따라서 성 베드로의 유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이교인 무덤과 비슷하게 꾸며놓고 신자들끼리만 알고 그곳으로 성묘를 다니며 기도하곤 하였다.
▶대성당의 심장부가 되는 이 무덤을 둘러싸고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건물들이 세워졌다.
사도 성 베드로가 순교한 지(67년경)얼마 안 되는 2세기 초엽 사도의 무덤 위에 가이오 신부가 이교인 무덤과 비슷하게 다시 기념 묘각을 세웠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자유가 인정된 이후 콘스탄틴 대제는 초라하게 땅 속에 묻혀 있던 사도의 유골을 거두어 특별히 마련한 돌 궤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기념 묘단을 만들어 그 돌 궤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 위를 덮었다.
그 무덤을 중심으로 지은 대성당을 교황 실베스떼르(Sylvester, 314-335)1세가 326년 11월 8일 성대하게 축성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는 콘스탄틴 대제 기념 묘단과 거의 같은 높이로 그 주위를 대리석으로 덮어 성직자석으로 꾸미고 새 제대를 크게 지어 그 기념묘단을 덮었다.
교황 갈리스도(Calixtus, 1119-1234년) 2세는 다시 더 큰 제대를 만들어 기왕에 있던 제대를 덮고, 교황 클레멘스(Clemens, 1592-1605년)8세는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계속 하면서 다시 더큰 제대를 세워 덮었으니, 이 제대가 바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세워진 대성당은 1,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성년을 맞이하여 보수, 증축할 필요성이 생겨 교황 니꼴라오(Nicholas, 1447-1455) 6세 때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중단 되었다.
1506년 교황 율리오(Julius, 1503-1513년) 2세는 대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도록 명하였다.
브라만떼,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폰티나, 베르니니, 마데르노 등 당대의 거장들에 의해 작업이 이어진 끝에 1626년 11월 18일 콘스탄틴 대제 때 세워진 대성당 이후 1,300년 만에 교황 우르바노(Urban, 1623-1644)8세가 새로운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이 대역사는 120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광장과 그 외의 부분들은 1700년 초까지 공사를 계속하여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광장 주위의 기둥들은 1656년에 시작하여 11년 후인 1667년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과 예술이 총 발휘되어 옛 묘소를 영예롭게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로 그 묘소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왔음이 고증되었다.
여러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교황 비오(Pius, 1939-1958)12세와 교황 바울로(Paulus, 1963-1978년) 6세는 현존하는 유해가 사도 베드로의 것임을 재차 공식 선언하였다.
"정말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재발견 되었는가? 많은 작업과 여러 가지 연구의 최종적인 결론은 '그렇다'는 답변입니다. 사도들의 머리이신 베드로의 무덤이 과연 재발견되었습니다."(비오 12세, 1950년 크리스마스 메세지)
"예, 그렇습니다. 그분의 무덤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존경하올 유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고증이 성립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자리에 계십니다. 문헌, 고고학, 방증, 그리고 논리 등의 분석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입증해 주었습니다."(바울로 6세, 1978년 6월 29일자 연설)
▶베드로 성전 입구 좌편에서 시작하여 차츰 앞으로 나가 중앙 정면을 돌아 우편 입구의 삐에따(La Pieta)상으로 나오는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그리스도교 성전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중앙 회중석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①넓다란 현관으로 들어서면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다섯 개가 보인다. 좌편 회랑(Navis)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례당(Baptisterium)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마태오 3, 13-17 : 마르코 1, 9-11 : 루가 3, 21-22)를 그린 벽화는 마라따의 원화를 모자이크로 복원시킨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그리스도교적인 재생의 신비를 상기시키고, 신앙의 은혜를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한다.
②여기서 조금 나아가면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3대 국왕(제임스 3세, 찰스 3세, 헨리 9세)들을 새긴 기념비가 나온다. 유명한 카노바(1819년)의 작품이다.
③바로 왼쪽에는 예수 봉헌 경당이 있다. 여기에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년)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어린이들에게 영성체를 허락한 교황이다.
④그 다음 상당히 큰 경당은 참사원 성무일도(聖務日禱)경당으로서 이 대성전 참사원들이 성무일도를 합송하는 곳이다. 이곳에 동방교부(東方敎父) 성 요한 크리소스톰(344-407년)과 교황 글레멘스 11세 (1700-1721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제단 위에는 그리스도의 원죄 없으신 모친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펼쳐져 있다.
⑤바로 이어서 맞은 편에 예수의 거룩한 변모(마태오 17, 1-8 : 마르코 9, 2-8 : 루가 9, 28-36) 제단이 보인다.
여기 있는 거대한 그림은 라파엘의 최후의 걸작 중의 하나다.
⑥왼쪽 뒤편으로 보이는 것은 대 그레고리오의 제단이다. 조금 나아가 왼편에 열려 있는 문은 대성전 제의실과 역사, 예술 박물관 입구이다.
⑦그 다음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십자형의 이 대성전 좌편 주랑(柱廊=transeptis)에 해당한다.
⑧맨 먼저 성 베드로 순교 제단이 보인다. 제단 위의 모자이크는 구이 도레니의 그림이다.
이 자리가 네로 황제의 경기장 가까운 곳이며, 이곳이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 장소로 전해진다.
⑨이어서 성 요셉 제단과 토마의 제단이 차례로 있으며, 이 주랑에는 고백소가 여러 개 마련되어 있어 사제들이 각국어로 고백성사를 준다.
⑩좌편 주랑을 다 지나면 베르니니(Bernini)가 만든 알렉산델 7세의 기념비가 있다.
그곳에 장막을 헤치고 모습을 나타내는 죽음이며, 사랑, 정의, 진리, 현명이라는 네 가지 덕목이 조각으로 표상되어 있다.
⑪이어서 왼편에는 기둥의 성묘 경당, 맞은편에는 대 레오 성인의 제단이 보인다.
⑫그리고 대성전이 머리끝이 되는 후진(apsis)이 나타난다. 석고재로 된 반투명 유리의 창문에서 나오는 빛은 그 밑의 '베드로의 교좌'를 비춘다.
제단 이름도 베드로의 교좌이며, 양측에는 초대 교회의 4대 교부(敎父) 성 암브로시오(334-397년),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 성 아타나시오(295-373년), 성 요한 크리소스톰(344-407년)의 커다란 상들이 세워져 있다.
이 후진의 전체 구조는 (초대 교회에서 비둘기로 상징된 교회의 영혼인)성령께서 교좌를 비추어 주심을 상징한다.
▶ 교황 제단
중앙 회중석과 양편 주랑이 교차하는 지점, 대성전 중심이 되는 곳에 교황제단이 놓여 있다. 고백의 제단이라 불리는 여기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일찍이 성 베드로가 피로써 신앙고백을 하였고, 그 뒤 모든 세기를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 제단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바쳐진 영광은, 제단 위에 세운 베르니니의 거대한 구리기둥 천개(Ciborium),
그 위로 치솟은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원형 천정,
그리고 천정(Cupola)받침 둘레에 새겨진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오 16, 18)는 예언 말씀을 대변하고도 남는다. 그 후 여러 차례 제대를 새롭게 덮어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2천여 년 전에 묻혔던 베드로 사도 무덤의 중심과 그 제대의 중심은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수직선을 유지했다.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원형 천정의 외부 꼭대기 십자가는 베르니니의 천개 중심을 통과하여 베드로 사도의 무덤과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꼭대기의 십자가는 대성전 가운데의 중앙탑(오벨리스크)꼭대기의 십자가와 정동향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최후심판 때에 동쪽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유해를 비롯한 초대 교회 건축의 위치가 정동향으로 되어 있다.
베르니니의 청동의 천개는 판테온의 천장을 덮었던 청동으로 만들어 졌으며 나선형(꽈배기)의 원주가 받치고 있는 이 제단은 교황님의 제단으로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있다.
ⓐ제단 주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성녀 헬레나, 성 론지노, 성 안드레아의 거대한 석상이 눈에 띈다.
ⓑ성 안드래아 상 아래에 지하 묘소(Crypta)로 내려가는 층계가 있다. (맞은편 성 론지노 상 아래에도 입구가 있음.) 그리로 내려가면 성 베드로의 묘소는 물론 여러 교황들, 우리가 들어 익히 아는 현대의 교황들,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울로 6세, 요한 바울로 1세의 묘소 앞을 지나 대성전 옆으로 나오게 된다.
ⓒ중앙 제단에서 현관을 향하고 보면 왼편 머리에 고대의 성 베드로 동상이 보인다. 여러 세기를 두고 무수한 순례자들이 쓰다듬고 입맞춤에 오른 발은 밋밋하게 닳아져 있다. 우측 주랑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회의장으로 쓰였다.
ⓓ그레고리안 경당을 지나면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제대에 이른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이곳에서 새롭게 한다.
ⓔ금을 입힌 감실이며 천사상은 베르니니의 작품이며, 제단 위에 있는 성삼위(聖三位) 그림은 대성전에 소장된 유일한 유화다.
(다른 그림들은 모두 모자이크이다.)
ⓕ다음에 성 세바스띠아노의 제단과 비오 11세와 12세의 기념상을 차례로 지나면, 순례의 발걸음은 삐에따(La Pieta)상 앞에 서게 된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품, 깊은 영감을 주며 영혼을 매료시키는 이 대리석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1499년 그의 나이 24세 때 조각한 이 작품은 그의 젊은 시절의 대표작이다. 동정녀의 얼굴에서 아들의 주검을 안은 어머니의 고뇌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엄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모습을 아주 젊게 조각한 것은, 모성애는 결코 늙을 수 없고 또 영원한 동정녀임을 표시하고자 했다 한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완성된 그의 작품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밤사이에 성모님의 가슴에 두른 띠에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원래 이 제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봉헌된 것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25살이 되기 전의 1500년 대희년을 위해 조각했다.
이 성전에서 그림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가 완전에 가까운 모자이크이다.
삐에따 상은 20여 년 전 한 정신이상자에 의해 파괴된 후 현대 기술에 의해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 후 삐에따 상은 방탄유리로 보호막이 둘러져 있다.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광장은 광활한 타원형으로, 멀리서 보면 넓은 사다리꼴의 공간이 돌기둥과 궁전의 지붕 사이에 뻗쳐 있고 마데르노(Maderno)가 조각한 전면이 우뚝 솟아나 보인다.
㉡궁전의 옆 부분은 반원형으로 도리아식의 회랑이 네 개씩 줄을 지어 있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모두 284개의 기둥과 20미터 높이의 8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대리석으로 142분의 성인의 상이 지붕위에 세워져 있다.
㉣이 역사적 대업은 알렉산델(Alexander, 1655-1667) 7세의 명령으로 베르니니가 1656년 - 1667년 사이에 완성한 작품이다.
㉤성 베드로 광장은 전 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에 안고 있는 전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한 복판에는, 이 광장에서 제일 오래된 기둥처럼 세워진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다.
㉦네 마리의 청동제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이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5.88미터인데 칼리골라(Caligola)황제가 그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지금의 모습대로 세우는 데에 4개월이 걸렸고 9백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첨탑은 성 베드로 사도가 순교했던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교황 식스또(Sixtus 1585-1590년)5세가 현 위치로 옮겨왔으며, 교황 알렉산델 7세의 출신 가문 인장으로 꼭대기를 장식했다. 맨 꼭대기의 십자가가 퍽 이나 인상적이다.
㉨이 오벨리스크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 교황 식스또 5세의 명으로 1586년 이곳으로 옮겨온 이 오벨리스크 양옆에는 14미터 높이의 분수대가 있는데, 각기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오른쪽 것은 1615년 마데르노가, 왼편 것은 1677년 베르니니가 만들었다.
㉫두 개의 분수와 오벨리스크 사이엔 광장의 중심부를 나타내는 둥근 대리석판이 놓여 있는데, 이 곳에서 보면 네 줄로 된 기둥이 하나로 보인다.
㉬많은 순례자들과 로마인들은 주일 정오에 교황님의 강복(降福)을 받기 위해 이 광장에 모인다.
라테란의 성 요한 성당
▶콘스탄틴 황제는 라테란 가문의 파우스따와 결혼했는데, 이때 결혼 지참금처럼 가져온 프라우찌오 라떼라노(Plauzio Laterano)궁전을 325년에 교황 실베스떼르 1세에게 선물로 드린다.
이로써 교황은 첫 번째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고 그 후 교황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천여 년 간 거처하게 되었다.
라테란 대성당은 455년 반달족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교황 레오 1세 때 되찾았고, 896년엔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905년 세르지오 3세 때 재건되었다.
▶ 라테란(Lateran)대성당
그 후 교황 니콜라스 4세가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과 1361년 사이에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가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 부분은 끌레멘스 12세때, 알렉산드로 갈릴레이(Alessandro Galilei)가 만든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6미터나 되는 석상들은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시고 옆에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띠노 등 교회 박사들이 있다.
현관 오른쪽에 성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흔하지 않은 콘스탄틴 대제의 석상이 있다.
중앙의 청동문은 305년에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원로원에 있던 것을 1650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성전 내부는 세기를 두고 보수하고 손질해 왔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1650년 보로미니(Borromini)의 작품이다.
성전 중앙통로 양쪽 기둥에 서 있는 사도들의 석상은 베르니니 제자들의 작품이며, 석주의 장식 등은 신구약의 사건들을 취급한 보로미니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볼 수 있다.
바닥은 14세기, 천장은 16세기의 것이며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르 다 볼떼라(Daniele da Volterra)가 만들었다.
중앙 교황제대의 천개 양식은 15세기의 고딕식이다.
윗부분 굵은 철사안에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석상이 있는데, 두 사도의 두개골을 모시기 위함이다.
중앙제대 앞의 교황 마르띠노(Martinus, 1417 ∼ 1431년) 5세의 무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묶이어 매 맞으시던 기둥을 옮겨온 공적 때문이라 한다.
제대를 향해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경당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에 쓰시던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서 성 목요일에 교황께서 집전하는 만찬미사는 오늘날에도 이 곳에서 봉헌된다.
오른쪽으로 1598년에 제작했다는 갈대 오르간이 있다.
제대 뒤쪽에는 지난 세기에 새로 장식한 로마 주교좌가 있다.
주교좌 위의 모자이크는 13세기 뚜리띠(Turriti)의 작품이다.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성전에 들어오면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 세계 제일의 성당이다.
바티칸이 새로운 교황좌로 정해져 옮겨지기는 했지만 중세기까지 교황들의 거처는 바로 라떼란 궁이었고, 한때(1309∼1377년)는 프랑스 아비뇽에서 있었던 적도 있다.
이때 라테란 궁은 화재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아비뇽에서 돌아온 교황은 바티칸에서 거처하게 된다.
성전에 들어와 가운데 통로 오른쪽 첫 기둥 뒤에 있는 지오또(Giotto)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상 첫 성년인 1300년에 로마에 왔다가 교황 보니파시오(Bonifatius, 1294∼1303년) 8세의 부탁으로 이 벽화를 그렸다.
▶ 성 계단 성당 (Scala Santa, 거룩한 계단)
라테란 대성당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가 매를 맞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모욕과 고통을 참으며 오르내리셨다는 28개의 계단을 보존하기 위한 경당이 있다.
이 계단은 바로 예루살렘의 본시오 빌라도 총독관저에 있던 것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옮겨온 것이다.
수세기 전부터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간다.
그리스도께서 밟으신 계단을 그의 제자들이 발로 밟기가 황송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이 경당은 1585년 교황 식스또 5세(1585-1590년)가 세운 것이다
성 모 마리아 성 당
에스퀴리노 언덕위의 이 거대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식스투스 3세 때인 5세기 초의
건축으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은 높이가 75m로 로마에서 가장 높다.
성모마리아 대성당 정면(옛날에는 성모설지전성당이라고 불렀다.)
성당 내부 바닥은 기하학적 무늬로 되어있고, 천장은 격자무늬인데, '쥴리아노 다 상갈로'의 작품이다. 압시데(후랑)의 승리의 아치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생애가 모자이크되어 있다. 1295년 쟈코보 또리띠의 성모 대관식 기념 작품이다.
로마의 7개 언덕 중 하나인 에스뀔리노(Esquilino) 언덕 위에 352년에 세워진 이 성전은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전이다.
이 성전이 여기에 세워진 이유에 대해 눈(雪)에 얽힌 유명한 기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리베리오(Liberius, 352∼366년) 교황 때의 일이다.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신자 귀족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아내를 맞아 평화스럽게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나날을 보내었으나, 그 가정엔 자녀가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기도 중에 자녀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딴 데 있었음인지, 둘이 다 연로하여 이제는 자녀에 대한 희망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는 막대한 재산을 성모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바쳐야 되는지를 모르던 두 부부는 열심히 기도하며 자선행위도 하고 단식과 금육의 재계를 지키며 주의 계시만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참으로 기이하게 이루어졌다. 즉 8월 4일이 지나 5일로 접어든 밤중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이들 부부 각자의 꿈에 나타나시어 "로마의 에스뀔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 하셨다.
아무리 꿈이며 묵시라고는 하지만 둘에게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요, 찌는 듯한 이 삼복더위에 과연 눈이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날이 새자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지 않는가! 그것도 꼭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려 있었다. 신기하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두 부부는 곧 교황 알현을 청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교황도 다른 사제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도 삼복더위 8월 중에 내린 백설을 보고 이는 거룩한 동정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경탄하면서 감동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이런 경로를 거쳐 세워진 성당이라 처음엔 교황 이름을 따라 '리베리오 성당'이라 불렸고, 그후 예루살렘에서 예수 아기가 누웠던 말구유가 이 성당에 안치된 뒤에는 '말구유의 성모 성당'이라고 불렸으나, 로마의 다른 성모 성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 성모 성당'(Basilica of Santa Maria Maggiore)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8월 5일 삼복더위 중에 내린 백설을 기념하기 위해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 한다.
그 후 이 건물은 5세기에 와서 교항 식스또(Sixtus, 432∼440년) 3세가 확장 개축했다.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1371∼1378년) 11세 때에 지은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 가운데 하나다.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은 현관 좌측에 있다.
성전 정면의 광장에는 마센찌오(Massenzio)의 바실리카 기둥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성전 안에 들어서면 여러 가지 건축양식의 매혹적인 장식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아벤띠노(Aventino) 언덕의 쥬노(Giunone) 신전에서 옮겨온 36개의 기둥 위에 성서를 소재로 한 36개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승리의 아치나 제대 후면의 장식 등에서도 이 설지전의 매력을 느낀다.
여러 가지 조각으로 장식된 바닥은 13세기에 장식된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도 아름답다.
나무로 된 천장은 르네상스 때 너무나도 유명한 안또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의 작품으로 15세기말 콜룸부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와 아라고나(Aragona)의 페르디난도(Ferdinando) 왕을 거쳐 교황 알렉산델 6세(Alexander, 1492∼1503년)에게 선물한 금으로 도금했다 한다.
중앙제대의 화려한 천개장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베르니니 작품을 본받아 푸가(F. Fuga)가 만든 것이다. 제대 밑의 동굴경당(Cripta)에는 베들레헴의 예수님 구유가 보존되어 있어, 성탄 때에 따로 구유를 꾸미지 않는다.
여기엔 또 1854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교황 비오 9세(Pius, 1846∼1878년)가 무릎을 꿇고 있다. 제대 위의 모자이크는 5세기의 작품으로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에페소(Efeso)공의회와 관련되어 만들어졌다.
뒷면의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휠씬 뒤인 13세기에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뚜리띠(Turitti)의 작품이다.
중앙제대 양편에 커다란 경당이 둘 있는데, 왼편 것은 까ꥉ라 보르게세(Cappella Borghese)라 하며 교황 바울로 5세(Paulus, 1605∼1621년) 때에 세운 것이다.
이 경당은 로마에 있는 수많은 경당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경당이다. 제대 꼭대기의 부각은 17세기 스테파노 마데르노(Stefano Maderno)의 작품으로, 그 유명한 한 여름의 눈의 기적을 그리고 있다.
맞은편 경당은 교황 식스또 5세 때 즉 1585년에 도메니꼬 폰따나가 세운 것으로 성체를 모신 경당이다. 도금한 화려한 제대장식은 스깔쪼(L. Scalzo)가 만들었다
카타콤베(58)
▶로마는 흔히 지상 로마와 지하 로마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옛부터 지하를 개발하였다.
지하도, 지하 무덤들, 수로들, 지표 하단의 건축물, 수조, 갱도, 목욕탕. 이러한
지하구축물의 총 길이는 무려 수 백 Km나 된다고 한다.
▶이 지하의 도시는 아주 오래 전 다신교를 믿던 이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서 집회도 하고 미사를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이 된다.
▶초대 교회 때 순교자들의 무덤 돌 곽 위에 깨끗한 보를 깔고 미사를 드렸던 전통을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만 해도 제대에는 성인의 유해를 놓고 그 위에 보를 깔고
미사를 드렸다. 낮이라도 미사 때에는 촛불을 켜는 것도
이 때 지하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켰던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가다꼼베 (지하 공동묘지)
가다꼼베(Catacombe)란 안식처란 뜻으로 로마에 있는 가다꼼베는 대부분 크리스찬의 무덤이다. 그러나 가끔 비크리스찬과 유대인들도 있었다. 당시 크리스찬은 부활의 희망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 즉 아마천으로 싸고 무덤 문을 돌로 막는 방법을 원했었다. 또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개인 무덤을 만들 수가 없었고 땅도 제한되어 있어 땅속 깊숙이 5-6층 정도의 통로를 뚫고 장사 지내는 방법을 택했다.
이 통로의 총 길이가 약 900킬로미터 정도나 되며, 300년 동안 약 6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원이 묻혔다.
본래 가다꼼베는 비밀스런 장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법엔 모든 무덤은 신성불가침의 장소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찬은 땅 속 무덤으로 피신할 수 있었고 때로는 종교예식도 자연스럽게 거행할 수 있었다.
뚜파(tufa)라는 응회암(凝灰巖)이 있어 쉽고 안전하게 굴을 팔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들은 지하세계를 만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라띠움(Latium: 로마 동남쪽에 있던 옛 나라.)의 뚜파는 급수시설이나 무덤, 비밀 오락실 등 거대한 지하 구조를 형성하는 데 널리 이용되었다. 화장보다는 매장을 선호했던 로마의 기독교인과 유태인 들은 땅값이 비싼 시가지 대신 지하의 공동묘지를 선택했다. 까따꼼베는 한 층의 높이가 5m인 여러 개의 층으로 구성되는 지하묘지로 벽을 따라 수천 개의 묘실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로꿀리(loculi)로 뚜파 벽에 나란히 뚫려 있는 사각형의 공간을 말한다. 시체는 종이로 감싼 후 안치되었는데, 가족인 경우 둘 혹은 그 이상을 합장하기도 했다.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문에 죽은 이의 이름을 새겼고 관련 정보나 사망날짜를 기록하기도 했다. 진흙으로 만든 작은 등이나 향료병이 무덤 위에 놓여 있는데,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흔들리는 불꽃은 매우 인상적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상부가 아치이며 플라스터나 프레스꼬로 벽을 장식한 아르꼬졸리움(arcosolium)이라는 묘실을 이용했다.
이 경우 볼트(vault: 아치에서 비롯된 곡면구조의 총칭.)로 구획되는 하나의 방을 꾸비꿀라(cubicula)라고 한다. 일종의 천창인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굴을 파는 동안 흙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까따꼼베는 5세기 초반까지 공동묘지로 이용되었다. 그후, 순교자들이 매장되면서 성소가 되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스러운 도시 로마를 찾았다. 또 순교자에 대한 숭배가 그들의 신성한 무덤 부근에 매장되어 구원을 얻으려는 믿음으로 연결되었다.
수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구조적 위험이 증가하고 로마지방의 재정 곤란으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순교자들의 성소는 성직자들에 의해 계속 보수되고 순례자들의 방문 역시 계속되었다. 9세기 초반에 유골이 도시 안의 교회로 이장되면서 대부분의 까따꼼베는 빈 채로 남게 되지만, 영적인 이유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반이 침하되고 잡초가 우거지는 등 지하세계로의 입구가 무너지면서 대부분의 까따꼼베는 잊혀졌다. 16세기에 이르러 로마 지하세계의 콜럼버스라고 불리는 안또니오 보지오(Antonio Bosio)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된다. 그는 30개의 까따꼼베를 발견했고 이후로도 몇개가 더 발견되었다. 불행히도 대리석이나 값진 유물들이 도굴되기도 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기독교 기념물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인기있는 장소다.
아삐아(Appia) 가도를 따라 수많은 까따꼼베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성 깔릭스뚜스(Calixtus)의 까따꼼베는 길이가 10km가 넘고 다섯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쎄바스띠아누스(Sebastianus)의 까따꼼베, 성 도미띨라(Domitilla)의 까따꼼베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