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ksgarten(시민공원)에 있는 그릴 파르처 상.

Volksgarten(시민공원)에 있는 그릴 파르처 상
그의 비극들은 뒤늦게야 오스트리아 연극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과묵하며 애국적인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1809년 빚을 남긴 채 죽었고, 재능있는 음악가 집안 출신이던 어머니는 신경쇠약 증세가 매우 심해 10년 뒤에 자살했다. 그릴파르처는 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냈다. 1814년 국세청의 세무사로 시작해 1818년 재무부의 사무관, 그뒤 재무부 문서국의 국장이 되었으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자 1856년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1817년 비극
〈할머니 Die Ahnfrau〉의 첫 공연으로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앞서 무운시(無韻詩)로 썼던 희곡
〈블랑카 폰 카스틸리엔 Blanka von Castilien〉에서는 이미 뒤의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조용하고 전원적인 삶과 행동적인 삶의 대조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장단격(長短格)의 스페인 운문형식으로 쓴 〈할머니〉는 당시 인기있던 운명극의 외적 요소들을 상당히 지니고 있으나,궁극적으로는 등장인물들 자신이 그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단숨에 쓴 비극
〈사포 Sappho〉(1818)는 그의 성숙을 확연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의 비극적 운명은 평범한 남자와의 불행한 사랑뿐 아니라 삶과 예술을 조화시키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그릴파르처 자신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3부작
〈황금양털 Das Goldene Vlies〉(1821)의 집필은 어머니의 자살과 자신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얻은 이 비극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메데아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염세적이며 절망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영적인 삶과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이 어쩔 수 없이 체념과 절망을 낳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비극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최후 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는 심미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이 비극은 1823년에 썼으나 검열에 걸려 1825년까지 공연과 출판이 허용되지 않았다. 줄거리는 오스트리아 역사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그릴파르처의 인물들 중 죄악과 비극을 피한 최초의 인물)의 부상이 보헤미아의 전제군주 오토카르의 몰락과 대비되기 때문에, 오토카르의 비극적 운명이 인류 전체의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릴파르처는 이 작품과 다음 작품에 대한 평판에 실망하고 검열관의 반대에 용기를 잃게 되었다. 1820~21년 겨울에 만난 카타리나 프뢸리히(1800~79)를 사랑했으나, 예술가는 개인적인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에 결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시기의 정신적 고통은 일기뿐 아니라 〈비애의 심연 Tristia ex Ponto〉(1835)이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연작시에서도 나타난다.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되어 그릴파르처의 가장 훌륭한 비극으로 꼽히는
〈바다와 사랑의 물결 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1831)은 고전적 주제로 돌아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심리적 통찰이 뛰어나 입센의 희곡을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진정한 사명감이 결여된 여사제 헤로는 자신이 한 맹세를 잊고 레안드로스를 맹목적으로 사랑하여, 레안드로스가 죽자 상심한 나머지 죽는다. 이 비극은 생명적 본능의 여파가 인간의 내적 조화와 냉정을 모두 뺏는 것을 보여준다.
〈꿈은 삶이다 Der Traum ein Leben〉(1834)는 스페인 희곡에 대한 깊이 있고 오랜 연구의 소산이다. 오스트리아의 〈파우스트〉로 불리는 이 희곡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데, 야심에 찬 젊은 농부 루스탄이 자신을 죄악에 빠뜨리는 모험들을 꿈꾸다가 깨어나 세속적인 열망의 무상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유일한 희극
〈거짓말쟁이에게 화 있으라! Weh dem, der lügt!〉(1838)는 대중들의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선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주인공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주제가 희극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미묘하고 진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부터는 더이상 희곡을 발표하지 않았고 다른 글도 거의 쓰지 않았으나, 말년에 명성을 얻기 시작해 1861년에는 빈의 상원(귀족원)에 선출되었고, 그의 80회 생일은 국가적 경사였으며, 1872년 그가 빈에서 죽었을 때는 모두 슬퍼했다. 죽은 뒤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극 3편이 원고더미에서 발견되었다.
〈톨레도의 유대 여인 Die Jüdin von Toledo〉은 스페인적 주제에 바탕을 두고 젊은 유대 여인에 대한 왕의 비극적 사랑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왕비의 명령으로 그녀가 살해된 뒤에야 왕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합스부르크가의 형제싸움 Ein Bruderzwist in Habsburg〉은 깊이 있고 감동적인 역사 비극으로 공연에 성공할 수 있는 극적 줄거리는 없지만 황제 루돌프 2세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장 성숙된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리부사 Libussa〉에서는 문명이라는 합리적인 단계를 넘어선 인간의 발전을 예견했다.
스페인 희곡에 관한 평론과 사후 출판된 자서전 외에 가장 뛰어난 산문은 단편소설 〈불쌍한 악사 Der arme Spielmann〉(1848)인데, 가난한 악사가 인생의 실패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남을 도우려 애쓰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릴파르처의 작품은 위대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성과를 반영하며 이상주의에 대한 환멸로부터 현실과의 타협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글을 쓰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무대에 올리기에 적절한 희곡을 쓴 보기 드문 극작가였다. 괴테나 실러와는 달리 그는 교양있는 사람이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 모두의 특징을 살려 대화를 썼으며, 또한 구어체와 유머, 대중적인 소극(笑劇)의 요소들을 도입했다. 그의 희곡의 주요한 극적 갈등은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해결은 순응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메테르니히 체제의 검열과 억압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나 그의 불행은 주로 자신의 성격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데 있었던 듯하다.

신왕궁이자, 민족학 박물관이 들어가 있다.

호프부르그 안내도

까마귀??


카롤 대공의 기마상이다.
고개가 시청사쪽으로 돌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건너편에는 오이겐공 상이 카롤대공 동상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은 유명한 정치가이자 군인인 오이겐공

오이겐공의 동상이다.

Heldentor(영웅문)



영웅문에서 본 신왕궁의 모습

호프부르그 힐덴토르를 지나서 나오면
앞에 두 건물이 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자연사 박물관이다.

Hildentor 문이다.

호프부르그와 자연사 박물관 사이 도로


유럽이라고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인들의 교통신호 지키는 것은 거의 드물다.
신호등이 자전거 신호등과 보행자 신호등이 같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건너는 자전거 이용자, 사진이 찍히고 있음을 안타깝게 보는 우측 보행자의 표정이 재미있다.

우측 자연사 박물관의 모습이다.
개장시간전이어서 박물관 내부로는 들어갈 수없다.
사실 들어가도 한국말로 설명이 되지 않으니 별 의미는 없다.

자연사 박물관

미술사 박물관의 모습이다.
건물이 대칭적으로 지어져 있어서, 빛의 각도를 보면 사진에서 구분 할수가 있다.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 중앙광장에 있는 마리아테레지아 동상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
마리아 테레지아[1](독일어: Maria Theresia 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어: Mária Terézia 마리어 테레지어[*], 체코어: Marie Teresie 마리어 테레시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합스부르크 군주국[2]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3]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4]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5]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여제나 다름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여제시 되고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 앞을 지나는 특이한 자전거.

정원에는 개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파랗게 보이는 잔디에는 그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