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자유여행20 부다페스트04
부다페스트 거리
이슈트반 성당이 보인다.
이슈트반 성당을 나와서 걸으면 세체니 다리에 이른다.
세체니 다리에서본 겔레르트 언덕위의 자유의 여신상(?).
세체니 다리에서 본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이다.
최초로 도나우 강에 건설된 견고한 다리. 커다란 사자 4마리가 네귀퉁이에 앉아있는 19세기 중반에 가설되었다. 밤에 불을 밝히는 전구가 사슬처럼 보인다 하여 세체니 다리로 불리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에 헝가리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세체니 백작을 일컫기도 한다. 그는 영국에서 2명의 건축가를 데리고 와서 사재를 털어 다리 건설에 착수했다. 다시 2명의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인 애덤 클라크는 그후 부다페스트에 정착했다.
길이 375m, 너비 16m인 이 다리는 중앙에 있는 48m의 돌아치와 철에 의해 지탱된다. 1839년부터 10년에 걸쳐 건설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폭파되었다가 전후에 재건되었다.
세체니의 아버지 페렌츠는 자신의 소장 유물과 서적을 국가에 기부해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세체니 국립도서관의 실질적인 설립자가되었다. 어머니 율리아 페슈테티치가 일생동안 수집해 기부했던 기암괴석 역시 헝가리 자연사 박물관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아들인 이스트반 세체니는 헝기 학문의 전당인 헝가리학술원의 설립자이자 진보적 경제관을 가졌던 민족주의의 상징적인물이었다.
그가 부다와 페스트 다리 건설에 나선 계기는 정작 따로 있다. 1820년 자신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차 급히 돌아온 세체니는 다뉴브를 건저지 못했다.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배편이 기상악화로 무려 8일간이나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세체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리를 놓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명문가의 자손 답게 자신의 1년 수입을 먼저 내놓고 다리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곧 국민운동으로 번졌고 다리 건설을 위해 국채가 발해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는 당시 영국에서 다리 설계로 명성이 드높았던 윌리엄 클라크에게 설계를 위촉했다.
세체니는 또 스코틀랜드 출신 애덤 클라크를 헝가리로 초빙했다. 애덤 클라크는 공사기간 내내 다리 왕공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부다 왕궁이 있는 바르헤지 아래를 뚫는 터널까지 설계했다. 그래서 헝가리인들은 부다쪽 다리 입구의 광장을 애덤 클라크 광장이라 명명하여 지금까지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다.
1842년 다리 공사가 시작되긴 하였지만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1848년부터 2년간의 대 오스트리아 독립전쟁 땐 파괴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햇다. 전쟁이 완전 실패로 끝난 이듬해 11월 21일 준공식이 열렸다. 부다와 페스트가 처음으로 한 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공격에 견디지 못해 일부 교량이 붕괴되었지만, 곧바로 재건되었으며 부다페스트의 경관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조형물로 남아있다.
세체니 다리에서 본 국회의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