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자유여행38 바하우03
멜크 수도원 올라가는 길
도심을 지나서 중간, 중간 사이길이 있다.
그냥 길따라 올라가면 수도원에 갈 수가 있다.
멜크 수도원
도나우 강변에 우뚝 선 신의 요새
1600년대에 수도원에서 수기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14세기에 이 수도원에서 독일인 수도승 아트존이 쓴 견습 수도승의 때의 회상기이다.
이 회상기를 바탕으로 움베르토 에코는 20세기의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장미의 이름>을 썼다.
수도원은 11세기 말에 창건되었지만 18세기에 재건되었기 때문에 중세를 상기시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없다. 그러나 196m나 되는 긴 복도와 10만원의 장서, 2000점의 필사본을 지닌 상당히 유서 깊은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한다.
중세의 명문가였던 바벤베르크 가의 레오폴트 3세가 성을 베네딕트수도호에 기증한 후 요새형 수도원으로 개축한 것이 멜크 수도원의 출발점이다. 그 이전에는 로마 시대때부터 군 요새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어 독일의 유명한 전설인 <니벨룽겐의 노래>에 모델 역할을 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성이 세워졌다.
거울의 방
종교 개혁의 와중에서 수도원은 갈수록 피폐화되었고 이어 17세기말,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다 시패 했다. 1702년 수도원은 현재 모습처럼 복원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 다시 한 번 점령을 당했고 나폴레옹은 1805년과 1809년 두 번에 걸쳐 자신의 사령부를 이곳 수도원에 설치했었다. 멜크 수도원은 이후 오스티라 종교, 교육, 사상에 지대한 역할을 하며 오스트리아 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였다.
1702년 새로운 바로크 식 건물을 지을 당시, 디트마이어 신부는 건축가 야콥 프란타우어에게 주문하여 건물을 앉히기에 부적합한 사다리꼴의 부지에 건물을 짓게 했으며 그러면서도 주위 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을 탄생시켰다. 프란타우어가 1726년에 숨을 거둔 후 작업은 그의 제자 뭉게나스트에게 전수되었다.
안뜰로향하는 입구는 수도원의 수호성인인 성 레오폴트와 성 콜로만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길양쪽으로 17세기와 18세기에 두 개의 보루가 세워졌다. 문 안쪽에는 수도원의 문장이 있으며, 교단의 창시자 성 베네딕토를 묘사한 천장화가 있는 대기실 뒤에는 고위 성직자의 정원이 있다. 그 벽은 예언자들을 나타내는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수도원에서 본 멜크 시가지
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수도원에서본 도나우
멜크 수도원
내부 관람을 하다가 이곳으로 나와서
왼쪽에 있는(사람이 서있는 곳)곳으로 들어가면 유명한 도서관이 나온다.
도나우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