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성지순례 45 이스라엘 01
대추 야자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배관시설이 다 되어 있다.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라기 보다는 차양막이라고 보면 된다.
너무 뜨거운 태양열을 차단하기 위해서 쳐놓은 것이라고 한다.
꿈란에 다다른다.
꿈란 유적지 입구이다.
유적지 매표소와 식당과 상점이 있는 곳이다.
매표소 입구
매표소 입구
이곳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상점과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첫 점심식사를 한다.
점심식사이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혼란스럽다.
우측 접시는 미트볼 비슷한 고기이고
좌측은 양배추 잘게 썰은 것이다. 샐러드를 앞에 있는 빵을 벌리면
넣어서 먹을 수 있는 빵이다. 샐러드를 빵에 넣어서 먹고
간단하게 점심을 떼운다.
화장실에 있는
손 말리는 기계, 강력한 바람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제품이다.
식당안의 모습
당양한 인종의 순례객들로 넘쳐난다.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2009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비시즌임에도 성지마다 사람들이 넘쳐난다.
앞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심각하게 시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식당에서도 사해는 보이지만
여전히 모래바람을 사해는 보이질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꿈란 유적지를 순례한다.
예리코(Jericho)의 남쪽 12km,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사해 수면에서 약 300m 높이에 위치한 쿰란은 1947년에 쿰란 제1 동굴이 발견되면서 그 부근 일대에 대한 탐사가 시작되어,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차에 걸쳐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사해의 북서 연안에 있는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n, 히-חירבת קומראן) 부근의 200개 이상의 동굴 중 11개 동굴에서 ‘쿰란 문서’라고 불리는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들이 발견되었다. 쿰란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년경부터인데 기원전 100∼31에 대규모의 모임 장소와 식당, 약 1,000개의 식기류가 저장되어 있는 방, 토기 작업장, 사본의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물 저장소, 수로, 등 다양한 구조물들이 건축 되었다.
이 시기는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F.Josephus, 37/38∼100?)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기원전 31년의 큰 화재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오(기원전 22-서기 18?)의 통치 기간에 다시 쿰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고 이후 로마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쿰란에서는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우물이 발굴 되었다. 그리고 쿰란 거주지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1,100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유해는 대부분 남자의 것이고 머리가 남쪽을 향해 매장되어 있었다. 쿰란 주변의 동굴에서 발견된 토기와 같은 형태가 쿰란 거주지에서 발견 되었고, 또한 쿰란 거주지에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주된 시기는 사본의 제작 및 필사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이것은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서기 68년까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쿰란 문서를 남긴 사람들이라는 증거이다.
우측으로 들어가서 먼저 간단한 영화를 상영한다.
매표소 입구
식사를 마치고 이곳에 다 모여서 가이드의 설명을 먼저 듣는다.
꿈란에 관한 짧은 영화를 시청
에세네파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의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마카베오가 독립전쟁(기원전 166∼160) 시기에 마따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하였지만 그들의 정치형태는 비판적이었고, 결국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의 통치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152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더 발라스(기원전 150∼145)는 요나단 마카베오를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로 임명하였다.(1마카 10,15이하) 요나단은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찬탈하였다.
이에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바로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이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는 정의의 스승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복제품이다.
정결예식장소, 이것역시 재현해놓은 곳이다.
양피지
양피지 필사를 위한 돌 책상
2000년전의 짚신
시원하게 영화를 감상한 후
다시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유적지를 둘러 본다.
날이 뜨거워서 사람들은 천막 아래에 모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