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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 한국인의 종교 심성

월요일은자유인 2006. 10. 19. 20:21
 

예비자 교리 제 3 과 :  한국인의 종교 심성


  1. 서문(序文)

  한국인의 종교 심성은 특정하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반도(半島) 국가의 특성도 있지만, 다양한 문화가 소위 비빔밥 식으로 다 합쳐서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므로 딱 부러지는 종교적인 특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교리나 신학은 서양 학문을 중심으로 해서 저술된 것이기에, 그것을 교육받은 지도자들은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교리적 지식이나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심성에는 불교적인 현세적, 내세적인 종교심과 유교적인 형식주의, 샤아머니즘 적인 정령신앙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신앙 형태를 띠고 있다.


  2. 우리 민족의 종교 심성의 발자취

 

  1)우리 민족의 ‘하늘’(天)사상

  우리 민족은 아주 옛날부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주재(主宰)하는 분이 하늘에 계신다고 믿어 왔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인식한 하늘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공간(空間)의 의미를 벗어나는 초월적이고 인격적 실재(實在)였다, 그래서 천지 만물과 사람을 내시고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좌우하는 분을 높은 하늘과 연관시켜 그분의 이름을 ‘하느님’ : ‘천신(天神)’, ‘천제’, ‘상제’, ‘옥황상제’(玉皇上帝) 등으로 부르며 섬겨 왔다. 하느님은 ‘하늘’(天)과 ‘님’(主)의 합성어로서, 선사 시대이래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지칭해 온 순수한 우리 말이다. 이 하느님 신앙은 단군이래 우리 민족 심성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순수한 종교 개념이다.


  2)무교(巫敎, 샤머니즘)

  무교는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기까지 선사 시대로부터 고대 한민족을 지배하던 종교이다 외래 종교들이 들어와 표면적으로 우리의 정신 세계를 대부분 차지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 종교 심성의 바닥을 흘러내려 왔다. 무교는 주로 민중의 생활 속에서 민간 신앙의 양상으로 이어오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와 유교 등 외래(外來)종교와 습합(習學; 철학,종교 등에서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절충하는 것)된 형태로 변하기도 했다. 무교는 우리 민족의 정신 세계의 기층(基層)에 자리잡고 한국인의 기초적 종교 의식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1)무교의 우주관

  무교의 모든 사상적 표현 밑바닥에는 애니미즘(Animism)적인 원시적 사고 방식이 깔려 있다. 애니미즘이란 인간은 물론 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애니마(Anima)라고 하는 정령(精靈)에 힘입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수목(樹木), 산악, 암석, 동물, 천체 숭배 등 자연 숭배의 밑바닥에는 위대한 애니마에 대한 정령 숭배가 깔려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는 생명의 사회요 갈등과 힘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모든 만물은 신화적 인과율(神話的因果律)로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이 정령의 세계에는 우연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주술적 인과(因果)로 얽히고 설킨 세계이다.

  무교의 종교 사상은 이런 원초적 우주관을 전제로 하여 펼쳐진다, 여기에 따르면 우주는 마치 커다란 기둥 하나가 받치고 있는 거대한 3층집과 같다. 곧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지하계라는 3층 구조를 갖고 있는데, 천상계(上界)에는 천신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신령(神靈) 같은 선신(善神)들이 존재하고 지상계(中界)에는 우리 인류를 비롯해 금수(禽獸), 초목(草木)등 만물이 살고, 지하계(下界)에는 못된 악귀(惡鬼)와 악령(惡靈)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계는 광명의 나라요 하계는 암흑의 나라이다.

 

  (2)무교의 신관(神觀)

  무교에서 신앙 대상이 되는 신령들은 부지기수이다. 이 무수한 신령들도 크게 나누어 보면 천신(天神), 지신(地神), 인신(人神), 잡귀(雜鬼)의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천신과 지신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신이지만 인신과 잡귀는 후생적(後生的)인 신령들이다. 무교의 신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은 다 신이나 악귀가 될 수 있다. 이 신령들 눈에는 선신도 있고 악귀도 있다고 믿는데, 그 기준이 애매모호하여 대부분의 신령은 그 선악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들 신령의 선악은 인간의 대접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3)무교의 인간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생사화복(生死禍福)과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신령들의 조화로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잘되어도 귀신 덕이요 못 되어도 귀신 탓으로 만사를 귀신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만은 없어지지 않고 저승(下界)으로 가서 현세와 다름없이 새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장례 때 죽은 이가 생전에 쓰던 가재도구 등을 무덤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이다.

 

  (4)무교의 행위적 표현(祭儀)

  굿과 같은 무의(巫儀)는 인생 만사를 뜻대로 할 수 있는 초인적 주력(呪力)을 지닌 행사로 믿고 행한다. 무의는 예배보다는 주술(Magic)에 더 가깝다. 그래서 무당은 일종의 원형적(原型的) 행위로 굿을 반복한다. 기계적인 제의의 반복을 통해 무당은 사제(司祭), 예언(豫言), 치유(治癒), 오락(娛樂) 등의 직능을 행사한다.

 

  3)유교(儒敎)

  유교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윤리관을 바탕으로 공자에 의해 사상 체계로 정립된 종교이다 유교는 개인의 인격적 성숙(修己)과 사회적 질서의 실현(治人)을 기본 과제로 한다. 유교의 중심 사상은 천(天)과 인(仁), 예(禮)로 요약할 수 있다. 

 

  (1)천(天)

  유교에서 ‘천’은 모든 원리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이 천은 인간의 화복(禍福)을 좌우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천이 명하는 대로 천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인 인(仁)을 통해서만 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천이 부여한 덕인 인으로 천을 알 수 있으므로 “인간 속에 있는 덕을 도외시하고는 천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말하는 천은 인간 내면의 덕의 밝기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문제삼게 된다.


  (2)인(仁)

  ‘인’은 사람다움(人格)을 원만하게 이루게 하며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장과 더불어 완성된다고 가르친다. 인은 인간 본연의 자세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행할 수 있지 허위(虛僞)와 가장(假裝)과 언변(言辯)과 수식(修飾)으로는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이 관념적으로 흐르거나 행동이 따르지 않고 말이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은 먼저 나 자신을 다스리는 수양을 하고 나서 인류를 도와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나 혼자만 올바로 산다고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아니며, 또 나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올바로 이끌 수는 없다.

  인은 우선 사람다움을 말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 사람답기 위해서는 언행에 거짓이 없고 믿음성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랑을 사랑하려면 성의를 다해 남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예(禮)의 기원은 하늘에 드린 제사의 금기 사항에 있다.  이것이 점차 윤리적 차원에서 개인 질서로부터 나라의 법규, 세계 질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예는 인을 행함에 있어서 그 외면성을 강조한 것이며 진정한 예란 사랑과 의로움을 내포한 행동 규범이다.

  유고는 인생 문제 해결책으로 수양을 통해 인간의 도리에 맞게 살아가며 인과 예로써 남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3)예(禮)

  예는 신에게 제사하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예의 핵심은 불변적인 요소로 인간성의 본질을 가리키고, 겉은 가변적인 것으로 상황에 알맞는 제도와 형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중(適中)하게 이행해야 한다. 성실성이 없는 예는 허례허식(虛禮虛飾)일 뿐이고, 형식이 없는 예법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에 사랑과 의로움이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한 예라고 할 수 없다.


  4)불교

  약 2500년 전 인도 카필라 왕국의 왕자 석가모니는 인간의 고통을 목격하고 회의에 빠져 이를 극복하고자 왕궁을 떠나 오랜 고행과 정진을 한 끝에 불타 즉 부처가 되었다.  이 구절로 불교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통, 회의, 고행, 정진, 부처]가 말마디로서 불교는 요약된다.

  5세기경부터 우리 민족의 종교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종교가 불교이다, 불교는 인도의 왕자였던 샤카무니(釋迦牟尼)가 세운 자연 종교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言帝)와 삼법인(三法印)과 연기(緣起)이다.

  불교는  개인의 구원에 치중하는 소승 불교와 개인의 구원은 타력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며,  개인의 구원만이 아닌 타자의 구원도 포함시키는 대승불교와 밀교 특유의 실천적 방법을 덧붙여 금강 승으로 크게 분류한다.

  불교는 佛, 法, 僧을 삼법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붓다에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1)불교의 기본 교리는 사성제에서 출발한다.

  사성제란 苦제, 集제,滅제,道제의 네 가지이다.     

  ①첫 번째 진리인 고제는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뜻이다. 괴로움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 즉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즉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이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생각이다.

  ②두 번째 집제는 괴로움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을 애욕(愛慾),有愛(존재에의 열망), 불생(비존재에의 욕망)을 들고 있다.

  ③세 번째 멸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가르치는 말이다.

  ④네 번째 도제는 괴로움을 끊는 방법에 관한 진리이다. 

  괴로움을 끊는 길로서 경전에는 팔정도가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실천적 수행 덕목이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앞의 고, 집, 멸제는 인생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도제는 그 문제 해결에 대한 실천적 수행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팔정도는 올바르게 보는 것(正見),올바르게 생각하는 것(正思,) 올바르게 말하는 것(正語),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正業),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正節-正命), 올바르게 노력하는 것(政情進,올바르게 마음가지는 것(正念), 올바르게 마음 정하는 것(正定)을 말한다.

  이러한 사성제가 이루어질 때, 인간은 쾌락과 고행에 치우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 자세에서 올바르게 사물과 현상(現象)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지며, 이상 경지(理想境地)인 열반(涅槃: Nirvana)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2)세계의 존재 양식(三法印)

  불교는 세계의 존재 양식을 삼법인으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인연(因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제법은 존재 일반을 의미하며,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하지 않음)한 것이기 때문에 무아(無我: 불변의 실체인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깊이 통찰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무상의 구조 가운데, 나라는 것, 내 것이라는 물건은 상주(常住 : 생명 변화가 없이 늘 있는 것)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만은 상주하는 것처럼 확신하는 착각에 빠진다.


  (3)일체 존재의 존재 양식(緣起) : 연기설(緣起說)

  왜 苦가 나타나는가?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가? 그 까닭을 탐구해서 그 원인 된 것을 소멸시키면 그것의 결과인 고도 소멸된다고 하는 사고 방법이 연기설을 이룬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써 저것이 상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연기설의 구체적인 표현이 인연 연기설이다. 인이란 직접적인 원인을 뜻하고, 연이란 간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조건을 뜻한다. 즉 모든 현상의 변화는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며, 단독적으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변화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없어진다는 내용이다.

  불교는 인생을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무상 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고통의 원인인 번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 방법을 제시한다.


  5)도교

  도교는 신선설(神仙說)을 바탕으로 도가(道家) , 역(易) , 오행(五行) , 복서(卜筮) , 참위(讖緯) , 의학(醫學) , 점성(占星) 등의 사상과 무(巫)의 신앙을 첨가하여 중국에서 성립된 종교이다.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고 수용했지만 목적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는 현세이익적인 자연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도교에서 도(道)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며 가치 실현의 기준으로 궁극적 존재이다. 도를 시발점으로 모든 존재를 인격신으로 삼으며, 많은 신들은 인간과 같은 명칭을 갖고 있다, 이 신들은 현세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위계 제도 속에 있다.

  삼국 시대에 들어 온 도교는 신선 사상과 함께 부적(符籍)을 쓰거나 구마(驅魔)의 관습 등으로 존속하다 무교에 쉽게 융합되었다. 오늘날 불교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칠성각(七星閣), 명부전(冥府展), 시왕신앙(十王信仰)등은 무교를 통해 불교에 흘러들어 간 도교의 잔영이다. 도교는 지난 200년 사이에 등장한 많은 신흥 종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3.불교와 유교의 단점.

  세상을 고통이라는 점에서 보려는 경향,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경향.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의 우리들의 삶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기쁨이 더 많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불교의 영향으로 이 세상의 삶을 고통만을 강조하기에 우리는 이런 고통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불교의 영향은 우리를 체념의 민족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발전과 성숙의 기회를 일찍 포기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윤회와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세에서가 아니라 후세이기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체념하게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유교는 윤리 도덕적으로는 훌륭한 덕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유교의 치명적인 단점은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정신에 머물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덕 보덕(以德報德), 이원 보원(以怨報怨)의 사상이 유교의 근본 정서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당파싸움은 이러한 유교적인 사상에 물든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유교의 영향은 우리를 분노의 민족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일에 쉽게 분노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 형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극을 보면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오는 데 대화하다가 쉽게 분노하고 언쟁을 높이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아랫사람이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크면 항명, 반항, 대드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이를 갈고 칼을 갈아서 윗대를 제거하는 그런 사극(史劇)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유교의 근본 정신인 덕은 덕으로, 원은 원으로라는 사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4. 기후, 농사 재배에 의한 심성

  우리 나라는 기후 특이상 세계에서 연중 일교차가 가장 큰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특이한 기후 조건하에 4계절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우리 나라의 기후 조건으로 벼 재배의 북한계선이라는 점이다. 한강 이북에서는 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즉 벼 재배를 남방처럼 2모작 3모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재배로 그해 1년 농사는 결정이 나는 것이다.


  5. 기독교의 윤리

  그리스도교 윤리의 출발점은 인간 중심이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물론 이지만,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의 하느님의 위치까지 올려서 인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간 중심의 윤리이다. 일반 사회 윤리가 체제나, 질서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인간 중심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존엄성, 고귀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까지 약속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리의 또 한가지 특징은 과정의 윤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정이 나쁘나,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윤리는 과정과 결과가 좋아야 참된 것이 된다. 그래서 결과가 혹시 나쁠 지라도 과정이 좋았다면 용서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신적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은 자기의 삶을 초월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우리 민족은 유사이래 '하늘'(天)을 절대적 존재로 받들고 제사를 바쳐 왔다. 이 하느님 신앙과 무교(巫敎) 그리고 삼국 시대에 들어온 유, 불, 도교와 근세에 서구에서 들어 온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종교심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인에게도 하느님 신앙은 의식 깊은 곳에 잠재해 있다.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다급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을 부르게 된다. 무교는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친 종교이다 거대한 외래 종교의 물결에 핍박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소원을 풀어 주는 구실을 해 왔다. 유교는 실천적 가르침으로 윤리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불교는 아집과 허무한 욕망을 버릴 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종교 심성들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올바로 깨닫고 믿게 해 주는 데 방해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교리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해할 때 우리가 믿고 따르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을 훨씬 더 잘 받아들 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