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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 믿음

월요일은자유인 2006. 10. 19. 20:24
 

  예비자 교리 제 6과 : 믿음(信仰)에 대해서

 

  ※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 곧 은총이다. 

  은총은 오성(悟性)을 무시하지 않으며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 은총은 오성과 자유를 내면적을 은밀히 바로 잡아 준다. 은총이 개입한다면 모든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 신앙은 의지에서 나오며 자유로운 결단이다.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그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자유로이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 교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난다는 이 신앙은 인간끼리의 만남과 같이 인간 인격의 가장 그윽한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어떤 친화력에 근거하고 있다.


  ※신앙과 권위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말을 듣는 것이요, 그 교도권이 결정하고 정의하는대로 순응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교육을 제대로 받은 신앙인 치고 자기가 신앙을 바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께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물론 없다. 실상 교회는 하느님의 대변자에 불과하다.


  ※신앙의 탄생

  신앙은 신앙인에게 있어 영생(永生)의 시작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본질적을 초자연적이다. 그렇지만, 신앙은 이에 못지 않게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을 동원한다. 신앙에 동반하는 투신(投信)과 참여는 은총에 의해 지탱되고 비춰지면서도, 그것은 여전히 의식적이며 명석한 결단이다. 신앙의 수동성,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초자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며 촉구까지 하시는 그 응답의 내용이 텅비게 된다.

  인간의 행위 중에 가장 자유롭고, 책임져야 할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인간의 행위일 뿐 아니라, 인간적 행위이다. 인간적 행위로서의 신앙에는 구성 요소가 있고 율동이 있으며 심리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요청이 있고 존재론이 있고 윤리성이 있게 마련이다.


  ※ 신앙의 지향(指向)

  신앙 행위는 신앙의 들음과 함께 탄생한다.  다만 이 ‘들음’은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는 객관적 요소로서 복음의 메시지가 충분하고도 타당성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주관적 요소로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제시되는 메시지에 신앙할 사람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 지향은 하나의 신앙이다.

  믿는 다는 것은 자기를 반려(伴侶)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슨 일에 신명을 다해 투신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은 그 일을 믿는다, 신앙한다, 신조로 삼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교이다”라고 들 말한다. 신비주의에 가까운 애국 애족이나 애당심(愛黨心)도 비슷한 말을 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면, 가치나 이상이라는 품위를 갖는 목적을 짙게 의식하고, 이를 열렬히 원욕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목적 지향은 어떤 원욕(願慾)안에서 피어오르며 이 원욕은 목적 지향에 모든 중압(重壓)을 가하여 유일무이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게 하므로,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 지향은 다른 의미에서도 당연히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의 발현(發顯)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신앙의 들음이라는 개념에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믿기 전에 이 사건들이 과연 하느님의 신비에 속하는 것들인지, 과연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대변하고 있는지, 사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제시하는 그 메시지가 과연 자기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인지, 또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검토하고 물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초자연적인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보아서 : 하느님은 당신의 심부름꾼들을 파견하여 자연적 오성을 초월하는 진리들, 따라서 인간이 제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이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메시지로 보내 주셨다.

  그 작위인(作爲因)으로 보아서: 신앙 행위의 수행 내지 조정(措定)은 의지의 명령에 달려 있는데 이 의지 자체는 이미 내면적으로 은총의 자극,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의해서 움직임을 받는다.

   그 형상인(形相因), 즉 그 지적 본질로 보아서: 이 메시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인간 오성의 타고난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고 그 진리를 긍정하듯이 이해하려면 그 빛을 받아서만 가능하다. 그분과의 정신의 교환(交換)을 나눔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려면 오성이 어떤 의미로든지 은총의 힘으로 신화(神化)하여야 한다. 의지의 동력 가동은 신앙 행위를 윤리적으로, 즉 하나의 덕성스러운 행위로 끌어올려 주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행위의 본질 자체에 요구되는 것이다. 계시된 진리들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의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의 중개로 오성에게 전해 주는 명증과 지식을 오성으로 하여금 자기의 동의와 긍정의 형상 자체로 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의지이기 때문이다.         

 

  1.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1)기쁜 소식(복음:福音)

  인간의 한계성과 비참성, 허무에 대한 해답을 제사하는 것이 복음이다.


  2)하느님과 계시(啓示)

  하느님의 자기 전달인 계시는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계시를 하심으로 계시를 통해서 은총을 주심.


  3)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와 회개

  하느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회개”의 필요 회개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의 도와 어긋나게 타락하여 자초한 죄와 죽음과 고통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창조 당시의 선한 모습으로 복귀하라는 뜻이다.”


  2. 이 복음을 믿어라


  믿음의 중요성. 하느님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 존재를 드러내 보이시지만, 무딘 인간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을 요구하심.

        

  3.하느님 아버지께서 믿도록 해주신다.


  믿음의 초대에 하느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원의와 노력이 합일 할 때 인간은 더욱 깊이 하느님을 체험한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너머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바보스럽고 우직해 보이는 열심한 신앙인들의 그 모습 안에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가 이루어져 있고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이미 이 세상에서 맛들이고 있는 것이다.

        

  4. 예수께서도 믿도록 해주신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세상에 임하셨고 그분의 전 생애 전부가 구원을 위한 완전한 애타적 봉사의 삶이었으며 그분이 행하신 기적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생활이 복음을 심기 위한 것이 까닭에 그분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돕고 계신다.


  5. 나는 믿나이다.


  ※ 신앙의 여러 단계 : 입신(立身)의 신앙에서 관상(觀想)의 신앙까지

  이제 막 입신한 사람의 첫 신앙은 아직도 희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선교설교(宣敎說敎)를 열심히 따르기는 하겠지만 역시 아직은 대체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비해 기성 신자(旣成信者)의 신앙은 점진적으로 해명(解明)되고 보강된 것이기 때문에 이 양자는 확실히 구별되어 마땅하다.  실상 기성 신앙은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성사 거행(聖事 擧行)에 참여함으로써 초보 단계를 넘어서서 신앙의 신비를 터득하고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적 지혜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성숙한 신앙에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입신의 신앙은 복음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 복음 전도(傳導)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곧 빠스카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구원 사건을 선포하는 케리그마이다. 반면에 기성 신자들의 교리툐육 내지 재교육에서는 신앙의 교설적 및 관상적(觀想的)차원을  밝혀 주는 방향으로 계획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6.신앙의 연륜(年輪)

 

   신앙이 하느님 나라에의 입문이요 따라서 여기서부터 비롯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가게 마련이라면, 신앙의 성장이란 것도 몇 가지 심리적 요인들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 중에서도 신앙인의 연령은 차장 중요하고도 끈질기게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인간적 발육 내지 인격적 발전과 신앙의 성장 및 발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신앙은 아예 소멸해 버리거나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7. 믿음(신앙)과 신념의 차이는

   ※ 신앙은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인간성을  완전하신  하느님 인격에로 일치하려는 의식적인 노력.

   ※ 신념 : 굳게 믿는 마음.


  1)신앙의 객관적 여건 : 신학자들은 흔히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어 하느님을 믿고[신앙의 직접 대상], 하느님에게 믿고[신앙의 근거], 하느님께로 믿는다[신앙의 궁극 목적]는 말로써 신앙을 묘사한다.


  (1) 신앙의 대상 : 신앙의 집약적 표현인 사도 신경에는 직접 하느님께 관한 조항 뿐 아니라 인간과 세상에 관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은 하느님과의 관련하에서만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2)신앙의 목적 :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설정한 목적을 달성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했으므로 하느님께 합일(合一)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요 목적이다. 이 목적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 자신이므로 하느님이 먼저 거기에 이른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도달 할 수 없다. 여기에 계시의 필요성이 있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 범위를 초월하는 진리는 계시에 의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인 하느님을 차지하고 뵈옵는데 있다면, 신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한 대상은 신앙 조목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인 생활하시고 위격적인 하느님 자신이다.


  (3) 신앙의 근거 :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각 인간의 인격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은총으로 영혼 안에서 잠잠히 속삭이시며 각 사람을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다. 이 은총에 순응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 내밀어 준 어떤 손을 잡고 한 단계를 뛰어 넘는 것이다.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또한 전 인류의 역사 안에 실현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그분은 인간의 입을 빌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최후 증인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증언을 계속하여 인류 사회 안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전파된 이 증거의 말씀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 생활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표시는 기적과 기타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하느님은 거짓을 증거하시려고 전능을 발휘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표시 외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의 존재 자체가 “믿음을 가질 크고도 영구적인 동기요,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깨뜨릴 수 없는 증거”이다.


  2)신앙의 주관적 요인(인간의 응답)


  (1)신앙 행위의 분석 : 신앙이란 하느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증거 때문에 믿는 덕행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행위는 자기가 제시된 어떤 사물의 내용을 다알지는 못하면서도 제시하는 사람의 진실된 성격과 그 사람은 그 일에 관하여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일단 인정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고전적 학자들은 지성과 의지의 활동이라 규정했는데, 이에 준할 때 믿는다는 행위는 지성이 만족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의지로서 결단을 내려 붙들고 있는 인식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명제를 자명하게 증명할 수 있을 때는 이것은 ‘아는’것이지 ‘믿는’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행위는 곧 하느님이 계시하신 초자연적 진리가 비록 인간의 미약한 지력으로 다 깨우쳐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최고의 선은 인간의 의지를 잡아끌어 결단을 내리게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최고의 진이요 최대의 선이므로 지성의 대상이 동시에 의지의 대상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지성과 의지의 동시적 작용이다.


  (2)신앙 행위의 종합 : 지성과 의지의 작용은 독립된 별개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이므로 신앙 행위란 구체적인 한 인격체의 행위이다. 한 인격체인 인간이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가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두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전적으로 네게 ‘맡기는’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제시된 어느 이론이 그러한 것이라고 인정해 두는 메마른 두뇌만의 활동이 아니라 원초적인 사랑을 겸비한 자기 봉헌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자기의 인격을 위대한 상대방의 인격에 주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택이야말로 하나의 탈피 이상의 희생을 요하는 거창한 결단이다. 그것은 한 인격이 지녀 온 묵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붕괴를 의미하며 여태껏 영위한 세속 생활과 절연을 강요하고 ‘지금까지의 나’의 파탄 내지 죽음을 결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와 절연과 죽음의 선을 넘지 않고는 절대자이신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 버릴 수 없다.

  이처럼 신앙의 선택은 묵은 자아의 파괴에서 비롯하고 새로운 나의 건설에 귀결되며 이 건설은 나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사고와 원의와 행동을 운전하도록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진리와 선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


  (3)신앙 행위의 특성 : 본래 정신적 실존(實存)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그 실존이 자연적 인격체일지라도 언제나 그 파악은 불투명한 인식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실존은 그 자체로서 이미 초자연적 존재 곧 신(神)이기 때문에 신앙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장막에 쌓인 어두운 인식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대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라 하고, 토마스는 신앙을 가리켜 “장래에 올 직관의 전주”라 한다. 신앙 인식의 이같은 특성은 믿는 이로 하여금 항상 긴장된 기다림 속에 처하게 하므로 신앙은 종말론적 희망이다. 언제나 이 신앙의 구름을 헤치는 하느님의 영광을 얼굴에 맞대고 보려는 갈망으로 차 있는 상태이다.

  확실성은 객관적 자명성과 주관의 굳은 집착을 의미한다. 신앙에서는 그 대상이 인간에게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기까지 굳이 믿는 이유는 그 대상을 자명하게 아시는 분께 대한 굳은 집착 때문이다. 이 집착은 그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신앙의 견고성은 지성의 세계에 있지 않고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다. 신앙 개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굳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은 삶에서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 제문제에 대한 정면의 대결이요 이 대결을 통하여 해결에 이르기까지 자기 희생 가지도 불사하는 결연한 행동이다. 진지한 신앙인은 참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위대한 겸손과 관용 있는 과감성과 끈기 있는 용기로써 계속한다. 이같은 겸손과 성실과 관용은 위대한 인간 가치이므로 가톨릭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적 존재로서의 모든 적극적인 인간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 가치들은 영원한 가치인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긍정되고 질서 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신앙은 일종의 인식이지만, 공허한 주관적 사색이 아니고, 철석같은 신뢰 심이지만 감상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긍정이며, 신앙자가 결단으로써 자기 전인격을 내걸어 쟁취하는 답변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점화되고, 하느님의 증언을 동기로 하며, 하느님을 차지하는 시동(始動)적 행위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지성적인 인식과 의지의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가지며, 희망으로 신앙이 지탱되고 사랑으로 생활화한다.  한 마디로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 앞에 인간답게 존재하고 행위 하게 하는 실존적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