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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 예수 그리스도

월요일은자유인 2006. 10. 19. 20:28
 

예비자 교리 제 11과 : 예수의 공생활과 십자가

  

  제 11-1과 : 예수의 공생활

  예수께서는 삼년간의 공생활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돕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다.

        

  1.예수님의 복음 선포

 

  1)예수님과 세례자(洗禮者) 요한

 

  하느님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기 위해 오랫 동안 인류를 준비시키셨다. 드디어 주의 길을 닦기 위해 파견된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엣세느파의 일원으로서 광야에서 고행과 절제의 생활을 하고, 예언자나 고행자 반 유목민들이 입던 낙타 털옷을 입고 복종의 의미를 드러내는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곡기는 전혀 없는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아온 사람이다)이 나타난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임을 알아보았고, 설교와 회개의 세례,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순교로써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시작된다(참고 루가 3,23). 요한은 예수께 세례 주기를 망설이지만, 예수께서는 굳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태 3,13-17)이라는 선포의 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공현(共顯)이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에서 홀로 머무르면서 당신의 공생활을 철저하게 준비하셨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간의 단식을 끝마치실 무렵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신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하는 사탄을 물리치신 일은 오직 사랑으로 아버지께만 순종함으로써 수난을 통한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해마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전에 사순절을 지냄으로써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의 신비와 결합한다.

  

  2.유혹 받은 예수

  공생활에 앞서 특이한 체험을 하심.

  

  1)굶주림에서 오는 유혹.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그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고 창조해 나가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라 하느님이 주시는 빵으로 산다는 말씀이다.  교훈)먹고살기 위해서 교회를 등한시하는 경우, 떠나는 경우, 냉담 하는 경우가 있으나,  경제적인 부는 늘여 갈 지 모르나, 결코 더 행복해지지는 않음.


  2)권력과 금력에서 오는 유혹

  악마가 성전 꼭대기에 데려가서 유혹을 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오로지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인생관을 취하고 계신다.  교훈)명예만을 위해서, 체면만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저런 일을 저런 사람들과,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만을 추구할 때, 항상 만족을 얻지 못함. 내가 인정해 주고 받아들일 때에야 만 가능


  3)교만으로부터 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반역.

  권력에 대한 유혹은 악마가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려가 눈앞에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거기에서 악마는 내 앞에서 무릎을 끓으면 이 영광을 주겠다는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다. 여기에는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인이 당한 모든 유혹이 상징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항상 우상 숭배에 있었고, 우상 숭배의 최고의 형태인 사탄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사명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이해시키려 했다.   교훈)교만함.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문제임.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 다루는 진실한 유혹은 바로  우리가 좋은 일을 하느냐 나쁜 일을 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의 나약성으로 악한 일을 취할 때도 있지만,  하느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의 종교가 아니라, 과정의 종교임]


  3.예수의 설교.


  1)예수님의 복음 선포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르 1,14-15).

 

  예수님의 이 선포는 "이제 하느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 하셨다. 그러니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한 구원 활동을 시작한 나를 믿고 따르시오."라는 선언이다. 사람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전적인 회개로써 자기의 행실을 고치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의지할 때,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4.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서에는 ‘회개’라는 말로서 '메타노이아'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마음을 바꾸다’: '일하는 방법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왜 주님의 나라에서는 마음을 바꾸어야 할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예수께서 여기 계신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므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태도를 이제는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기적이었고, 이웃에게 고통과 수모를 주었으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주님의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정의, 그리고 그 아들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 위대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전념해야 할 일은 올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깨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릇된 생활 방식을 벗어나 완전히 마음을 바꾸고 어서 빨리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 방식만이 참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길뿐이다.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이 설교의 주제였다. 생활 주변의 일들을 소재로 하여 비유로 설명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금 이 자리에서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당하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소유란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5.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의 근원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통치자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가나안 왕과 같은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正義)대로 통치할 왕을 보내 달라고 하느님에 간청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또한 하느님의 보호 아래 지탱되어 나가기 때문에 결국 오직 야훼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소망과 하느님께 드리는 탄식 어린 간청이 드디어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정의대로 이 세상을 통치할 구세주가 곧 나타나리라는 것이 예수님 시대에 민중에게 널리 퍼진 믿음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민중을 인도하고 가르치던 랍비들은 민중의 이 기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백성들에게 이미 하느님의 통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산다면 그들의 가슴 속에 큰 하느님의 정의의 정신이 깃들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언자들이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달랐다. 그분의 선포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새로운 점은 "그 나라가 다가왔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징표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의 중심이었다. 루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으로 가셨는데, 거기에서 안식일을 맞게 되어 회당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펼쳐 드시고는 장차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예언한 대목을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6.예수의 기적.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복음 사가들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적들은 신약성서의 본질이다.  이것들이 상상적인 장식물이나 글자 그대로의 치장물이 아니다.  ‘예수가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 다면 아무리 복음서를 읽는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일관성 있게 그려낼 수 없다.

  복음 사가들은 기적들을 기술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표현들을 사용했다. 기적적인 사건들이라고 한 때도 있었고, 비범한 사건, 능력, 표징, 그리고 업적이라고 한 때도 있었다.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아로서의 능력이며,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표징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표징들은 하느님의 계획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선언하는 기적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

  기적은 헛되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뜻대로 성취되었다.

  기적은 하느님의 선함을 드러내는 현현을 목적으로 한다.

  기적 중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적은 그의 출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분의 출생 자체가 의심할 여지도 없는 기적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이 예언했고 또 가브리엘 천사도 선언했듯이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 메시아의 도래를 알려준 베틀레헴의 별자리는 하나의 진정한 기적이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성과 인성을 겸비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또 설명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성을 취할 수 있었다.


  7.예수의 행적.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보다 더욱 강한 인상을 주는 가르침은 그분의 행적, 생활 자체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깊이 동정.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죄인과 세리들을 감싸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적 삶을 통해 사람들을 당신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계획 속으로 불러들이신다.

        

  8.예수의 교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계획과 뜻이 점차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 하느님을 떠나고 하느님과 등졌던 관계를 청산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통치권과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며,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이다.

  예수께서는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오랫동안 교육시키셨으며, 그들을 통해 가리키고 봉사하는 생활을 세상끝날까지 계속하실 것이며 그들을 통해 당신이 현존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제 11 - 2 과 :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보증이요 희망이며 승리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1.십자가 죽음의 외적 원인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외적 형태는 신약성서의 수난 사화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박고 십자가형이 언도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로마인의 재판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던 것이다. 국권에 반역을 꾸민 반란자로, “유대인의 왕”으로서 메시아라 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다. 십자가형이란 로마의 사형 집행 형식 중 하나로 주로 노예와 반란자들에게 적용하고 로마인들에게는 참수형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잔혹할 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형벌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죽음으로 볼 수 있다. 예수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고발하였고 당시 유대아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총독의 지배를 받는 로마 식민지 상황 아래서 유대 사회, 정치 지도자들은 로마와 결탁해서 자기들의 지위를 지키기에 연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대부분의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렸고, 까다로운 규정 준수에 묶여 살고 있었다. 로마 밑에서의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느님 계명에  충실히 살아야 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에서 죄인으로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그늘진 세상을 알아야만 했다. 이런 유대의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 아래에서 예수의 활동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회 통념상 죄인으로 지내던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으며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였고, 유대의 정결례 규정을 위반하였으며,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사람들, 죄인들과 사귀었고 율법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율법의 정신과는 먼 형식주의의 율법을 비판하였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고, 치유를 베풀고 하느님의 나라를 나누어주면서 깨어 준비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마저 사형 집행권이 없는 식민지 상황이었기에 보통 때는 증오하던 로마의 주둔군과 협작하여 결탁한 끝에 그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지상은 거짓 예언자요, 신의 모독 자였다.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오시는 메시아를 빙자한 거짓 메시아이었다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의 눈에는 자기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느님을 모욕하였고, 로마 지도자들에게는 혁명가로 보였기에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형을 언도하여 예수를 죽인 것이다.


  2.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의 길(십자가의 의미)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비애를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더욱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 불행이 온다던가 자신의 신체에 고장이 났다던가 또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가 사업에 실패했다던가 등등 우리가 좌절을 경험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성숙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잘되어 갈 때는 비교적 신앙을 지탱해 나가기가 쉽다. 그러나 자기 생각대로 되어 가지 않을 때, 그 때에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의 여부가 신앙을 가늠하는 하나의 시금석인 것이다.

  하느님 대전에서의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은 오히려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서 자기로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설령 인간의 눈에는 헛되게 보이고 모든 것이 헛수고로 끝난 것처럼  생각되어도 만일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그 무력함 속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 대전에서는 고귀한 것이라는 것,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 만족에 빠져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있는 때보다 훨씬  고귀하다는 것,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제시된 그리스도교 적인 가치관인 것이다.


  1)예수께서는 죽음을 미리 아셨고 자원하여 죽으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실력자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대립을 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 떳떳하게 예고하고 그 길을 자진해서 가셨습니다.


  2)십자가의 길

  예루살렘의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까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을 말한다. 교회는 중세 이후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온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파 죽음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이 길의 중요한 14곳을 정해 놓고 보존해 왔다. 그 내용은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부터 무덤에 묻티시는 광경까지이다. 이 14처에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한 장면을 더해서 기도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예루살렘에 갈 수 없는 신자들이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성당 벽에 십자가의 길 그림이나 조각이 있다.

        

  3.십자가 죽음의 내적 의미

  1)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지려는 교만으로 인해서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됨.

  인간의 구원은 회개하고 겸손해 질 때만 구원이 가능.

  예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 한다는 것과 타인을 위하여 살 때에 비로소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심.


  2)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제물.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화해와 속죄의 제물로 짐승을 바침.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제물로 바치셨고 스스로 제관이 되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완전한 제사를 봉헌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다.


  3)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증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셨다. 십자가의 치욕과 고통, 피 흘리심과 죽으심은 오직 참사랑에 대한 증표이다.


  4)십자가 죽음이 계시하는 것.

  하느님의 면목을 보여줌.

  인간은 타인의 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까닭에 순수하게 사랑하려는 자는 바보나 패자가 되거나 배척 당하지만, 하느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어리석도록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완전한 실패 속에서 새로운 삶과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여 준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이 진리는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후에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즉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자신이 전 인류의 고통을, 그리고 죄의 대가로 주어진 궁극의 비참인 죽음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이것을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은 전 인류의 역사 안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비탄과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셨다는 것, 주님은 이 인류의 고통의 역사를 다만 간과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당신 자신의 것으로서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고통은 하느님 자신이 그렇게 바라신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죄로 말미암아 갈라져 있는 인간의 현실,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도사리고 있는 죄의 세력이라는 것이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을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함께 계심으로써 그 고통을 함께 져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 예수의 고통 속에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 정말로 근본적인 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은 전 인류의 고통, 우리의 매일의 고통을 함께 져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숨을 거두신 예수의 모습은 매일의 여러 가지 고뇌, 좌절, 실망, 고독, 그 밖의 모든 고통을 하느님이 떠맡으셨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것을 알고서 매일의 작은 십자가 속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와 함께 그 십자가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긋는데 그것은 십자가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도저히 떼어버릴 수 없는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고통은 우리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통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떠한 고통도 자기만의 고통이 될 수 없고 자기의 고통을 짊어져 주시는 분이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어떠한 때에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수의 철저한 신앙, 하느님의 뜻을 최후까지 찾는 신앙인 예수의 삶의 모습을 보아 왔는데, 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철저히 다른 사람, 타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화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순히 자기 주장, 자기일 때문에 죽어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해방하며 구원하는 권능인 하느님 나라를 성취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참된 구원은 자아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비틀어진 사람 즉 죄인이 사랑의 나라로 포섭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자유롭고 참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희생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해방하는 사랑을 끝까지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사랑의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신 예수님의 존재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 이신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그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그것을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물론 신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4.십자가 고통의 의미

  세상에는 고통과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열매들이 많이 있다. 자유와 평화, 영광과 기쁨, 용서와 사랑 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값진 희생의 대가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기꺼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치르는 희생과 고통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하여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보증이  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답>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은 고통을 즐겨 참아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을 천주로서 하셨습니까? 혹은 사람으로서하셨습니까?

<답> 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인간으로서 하셨으나, 동시에 예수께서는 천주시므로, 비록 미소한 고난의 일부까지라도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의 미소한 고난이라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면, 왜 그처럼 혹독한 고난과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습까?

<답> 예수의 미소한 고난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데도 그처럼 혹독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천주의 공의(公義)를 원만히 채우시고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또 죄악을 미워하고 온갖 고통을 참아받는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보태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그 육신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답>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그 육신은 제자들이 거두어 새 무덤에 장례지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그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답> 예수께서 죽으신 후 그 영혼은 고성소(림보)로 가시어 그때까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 성인 성녀들을 위로하여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