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과 :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비자 교리 제 12과 : 예수의 죽음과 부활
1.부활의 예시와 예표.
예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시기 전 약 200년 전부터 발전해 온 유대교 문학의 하나로 묵시(黙示) 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전체의 상징을 사용해서 말하는 특별한 문학인데 이 묵시 문학 중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에 모든 의인(義人)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사상으로 예수의 제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2. 부활을 가능케 하는 죽음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간의 죽음은 반드시 오는 필연적인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부터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우리가 끝이라고 종국이라고 생각하는 이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있어서도 십자가의 죽음이 있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고통의 바다에 뛰어 드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의 세상이 고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시고 우리들을 생명의 세계로 초대하신 것이다.
3.한 알의 밀 알이 썩음의 의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신의 몸을 발효시킴으로써 그 열과 양분으로 씨앗의 눈이 자란 새싹이 되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의 섭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세상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가 생각했던 제한된 세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영원한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소중하게 역기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형제들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의 일생을 바친 봉헌, 더구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바친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고 그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다.
4.새 아담으로서의 예수
창세기에 최초로 인간이 된 원조는 아담이다. 아담은 최초로 정리된 상태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됨으로서 혼돈을 야기(惹起)한 즉 죄와 죽음의 세력에 이 세상을 속박되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 아담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질서와 정리된 상태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천지 창조가 가능하게 하신 분으로 교회는 예수를 첫 사람, 부활한 사람, 새 아담이라고 부른 것이다.
5.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체험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알았고,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요한 15,13)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인간을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충실히 전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당신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 기꺼이 처형장으로 발길을 옳기신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체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사람은 허물과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되셨다고 믿는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이다.
6. 부활의 의미
1)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다만 역사의 한 페이지 정도에 당시의 예수의 행적이나 적혀져 있으면 다행이고 그나마도 의문시되었을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께서 이렇게 비참하게 처형되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한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이며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지없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죽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사람과 자신들은 아무 관계가 없기에 도망하였고 패배의 쓴잔을 마신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부끄럽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두려워 가만히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제일 먼저 교회를 이룬 사도들은 우선 첫째로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이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 그들의 첫째 사명이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서 교회가 생기고 또 교회 안에서 신약성서가 생겼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 전체가 예수 부활의 증언서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로마 총독에게 나타나셨거나 대사제나 당시의 떵떵거리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 부활은 인간에게 죽음의 문을 통하여 새 생명을 누리게 해준 사건으로 우리 믿음의 바탕이요 신앙생활의 중심이다.
7. 부활의 역사성
1)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3일 째 되던 날 일요일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가 곡을 하고자 무덤에 갔을 때 놀랍게도 무덤의 문이 열려 있었고, 무덤이 비어 있었다. 예수의 시체가 그대로 썩고 있었다면 “예수 부활”이라는 말은 생겨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빈무덤에 대한 기록을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두 남자의 증언이 일치해야만 그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마리아 막달레나 한 여자의 증언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꾸며서 유대인들이 믿도록 할 계획이었다면 남자들이 빈무덤을 발견했다고 꾸몄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무덤에 관한 기록을 꾸며낸 것이라는 말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을 때,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예수의 부활을 믿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당황하기만 했다(루까 24,20-24).
2)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았다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부활을 믿게 된 동기는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한 주의 발현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가 되면 그 밑에서 권력을 누려 보려는 꿈에 젖어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완전히 실망하고, 그 꿈이 산산이 깨어져서 뿔뿔이 흩어졌고, 또 유대인들에게 “예수 일당”으로 몰려 피해를 입을까 봐 숨어서 지냈다(마르꼬 16,8). 그런 제자들이 얼마 안 가서 예루살렘에 다시 모여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는 부활했고 우리는 그 분을 보았다”(사도행전 2,32)고 유대인들에게 외쳤다. 이것이 모든 제자들의 설교의 중심 테마였고 핵심이었다. 도망치고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서에서는 한결같이 이 점을 주장하고 있다. 예수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후 55년경에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이다. 고린토 전서 15장 3~8절에는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 목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발현했고 그 발현을 본 500명 중 대부분은 그 당시(AD 55년경)까지 생존해 있었다 한다. 또한 예수님의 생존 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예수님의 친척들 중의 한 사람인(마르꼬 3,21과 요한 7,5) 야고보와 교회 박해에 앞장섰던 사도 바오로 자신도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바오로의 개종 시기가 32년 경이므로 예수님의 발현은 AD 30~32년 즉 2년 간에 걸쳐 수시로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그 제자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던 이들까지도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그 후로는 그들의 생명을 바쳐 예수는 부활한 주님이라는 것과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3) 발현(發顯)의 체험은 환상(幻想)을 본 것이 아니다(주관적 환시가 아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고대한 나머지 헛것(환상)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환상이란 어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며 몰두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공포에 질리고 실망해서 흩어져 숨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어떤 환상을 볼 수 있어도 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꼭 같은 환상을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고린 15,5b- 6,8).
8. 예수 부활의 신학적 의의
1)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1고린 15,3-5).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인 이루어야 할 '어떤 일'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놓인 것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그들을 준비시키셨다. 그분이 가르치신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죽음 뒤에는 영원한 삶이 있다
예수께서 지금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11,25).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죄수 중 하나에게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
(2)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다시 뵙지 못하는 처벌이 있다. 예수님은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라고 가르치셨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게헨나)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 온갖 쓰레기를 태워 없애느라고 언제나 불길이 솟는 곳이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쉐올'이라는 어두컴컴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는데, 게헨나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2) 예수는 부활로 전혀 새로운 차원의(모양의) 삶을 시작했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 어떤 모양으로 변화되었던가? 부활하기 전의 그분의 삶과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막달레나의 오빠 나자로를 부활시켰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그 나자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께서 부활시킨 그 나자로는 그 후에 다시 병들어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전혀 다르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문이 잠겨 있는 데도 들어오시고, 또 똑같은 시간에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나타나시기도 함을 본다. 우리 인간은 내가 여기 있으면 지금의 시간에 다른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형태의 삶을 하셨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죽고, 부패하는 그런 차원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삶을 누렸음을 알게 된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셨던 것이다.
3) 예수 부활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며 희망이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이래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문제요, 고민 거리요, 공포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염원이고 또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인간의 숙명이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염원과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숙명이 빚어내는 부조리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인간 역사에 있어 하나의 경사요, 역사의 분기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인간의 아들 중에서 최초로 부활에 이른 첫 열매이며(고린토 전서 15,20), 이제 우리도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이 희망 안에, 이 희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안겨 준 희망은 순수한 가능성뿐인 희망이 아니라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이 보증해 준 희망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도달한 부활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희망 때문에 죽음을 공포의 순간으로서가 아니라 참 승리의 순간으로 기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9. 부활의 의미와 구원 효과.
부활의 신비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고, 부활로 우리에게 새 생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신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얻게 해 줌으로써(참고. 로마 4,25),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로마 6,4) 의화(義化)이다. 새 생명은 죄로 비롯된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영광에 대한 새로운 참여라고 할 수 있다(참조 에페 2,4-5; 1베드1,3).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은 장차 우리가 맞이하게 될 부활의 근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사람이 되셨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0.22). 이 일의 완성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
"예수님이 최대의 사랑으로써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가셨다는 것은 전 인류가 하느님께 가는 여행의 표지(標識)이며 수단이다. 인간 예수님은 인간이 갈 길을 보여주셨다. 세상의 어두움 한가운데에서도 사랑에 살고 사랑을 살리며 그리고 사랑으로 죄를 쳐 이기고 더 큰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인간이 갈 길임을 예수님은 몸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뻐하시는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랑을 항상 예수님에게 권면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10. 예수의 부활은 사랑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증명해 준다.
예수님의 생애를 지배한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온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마르꼬 12,33)이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남을 위해 자신을 죽음에 부치셨고, 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루까 23,34)하고 기도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때문에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 처형된 분이시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고 그대로 죽음으로 끝나 버렸다면 “죽기에 이르도록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도 죽고 썩기는 마찬가지다”는 결론이 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죽어 간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이라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으셨지만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의의를 이렇게 규정해 볼 수 있다.
①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요 문제인 죽음을 넘어 참된 소망인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을(절대자) 공경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데에 있음을 증명해 준 사건이다. 말하자면 영원히 살고 싶다는 염원과 꼭 죽어야 한다는 숙명이 빚어내는 인간 운명의 비참을 극복하고, 참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과 길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②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사랑의 계명이(그분의 사상의 요약인) 진리이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인간이 참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해 준 사건이다.
③ 예수 부활은 그분의 천주성을 증명한 사건이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분이 단순히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참으로 약속된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다시 살으셨습니까?
<답>예수께서 죽으신 후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제 3일에 당신의 전능으로 영혼과육신을 결합하시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부활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었습니까?
<답>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서 40일동안 가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여 주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마치시고 교회창립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무엇을 하시었습니까?
<답>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 40일에 당신의 전능으로 하늘에 오르셨으니, 이것을 예수승천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시어 성부의 오르편에 좌정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시어 성부의 오르편에 좌정하신다는 뜻은 예수께서 천주성으로는 이미 천주 성부와 같은 한천주이시나, 인성으로도 천주의 위엄과 영광을 만유(萬有)위에 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보충 자료>
※부활절의 의미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 '이스터‘(Easter)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간, 곧 '성주간' 또는 '주의 수난 주간' 금요일 예식이 끝난 후 다음날 저녁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지낸다. 이 기도는 암흑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애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신자들은 사순절(四旬節) 동안 '승리의 태양'으로 떠오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대하며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부활절을 맞이하는 것이다.
※ 복음(福音)의 정의
1)신약성서에서
(1)복음 (ευαγγελιον)은 여러 구절에서 사신(使信), 선포를 뜻한다. 1데살 1,5에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의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1고린 9,14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리라”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로는 복음을 좀더 자세하게는 “하느님의 복음”으로 규정하여 창시자를 나타내고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규정하여 복음의 내용을 제시한다. 그가 “나의 복음”이라고 쓴 것은 역시 사도의 설교를 의미한다.
(2)예수의 말씀과 생애에 대하여 서술한 표시로서 복음이라는 말이 마르 1,1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2)말씀
복음이란 낱말을 들으면, 우리는 즉시 복음서라는 책을 생각하게 된다. 복음은 그리이스 낱말 에우안겔리온(euangelion)을 직역한 것으로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곧, 구원의 메시지, 구원의 선포가 복음이다.
복음은 본디 기쁜 소식이므로, 발설한 말을 가리켰다. 사실 예수님은 네 복음서 가운데 어느 한 줄도 쓰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청중을 향하여 복음을 발설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기록된 기존 자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이지 예수께서 쓰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이라 할 적에
㉠ 우선, 예수 친히 설교하신 기쁜 소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마르코 1,14-15이다. :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고 하셨다.”
㉡ 다음으로, 복음은 사도들이 예수의 정체와 그분의 구원 업적에 대해서 설교한 바를 뜻한다. 사도행전 15,7을 에로 들 수 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내 입을 빌어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뽑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적으로 예수 자신의 설교에 관심을 갖든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사도들의 설교에 관심을 갖든지 간에, 하여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기쁜 소식>의 내용인 것만은 틀림없다.
본시 복음이란 선포를 뜻하는 것이지 책을 뜻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야 겠다. 사실 신약성서를 보면, 복음이라는 낱말은 선포 활동을 뜻했던 것이다. 신약 성서에 나오는 복음 전도사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었지 복음을 기록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첫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사도 바울로는 이미 당시의 복음 전도사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복음 전도사란 저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만을 뜻하는 거시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해 주는 표시가 된다.
아무튼, 단어란 계속 변화되며 종종 매우 특별하고 전문적인 뜻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복음이란 말도 변하여,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놓은 책을 가리키게 되었다. 원래 선포를 뜻하던 복음이라는 낱말이 대략 2세기에 이르러서야 복음서라는 책을 뜻하는 낱말로 바뀌게 된 것이다.
3)행적(行蹟)
실상 복음서는 교리서가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 역사에 개입한 바를 알리는 증언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하고많은 종교 이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위해서 하신 업적을 증언하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기에 앞서 우선 행동하신다(신명 26,7-8)
예수께서도 그처럼 처신하시어 우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셨던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이룩하신 기적은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기적은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4)말씀과 행적은 계시(啓示)의 두 가지 양식이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말씀과 행적, 말과 행동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복음서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불가능하게 또 보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분의 행동과 관련이 없다면, 그 말씀은 의미가 거의 없거나 아주 없거나 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행적을 그분의 말씀에 비추어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의미한 사건들이 되고 만다.
예수께서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언행에는 반드시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 문화권의 색채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마귀와 관계하셨다는 말씀이나 이야기는 당시 예수께서 사신 동시대인들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말씀과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마귀나 귀신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5)복음서 기록 동기
①예수를 뵙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목격자들이 하나 둘 죽기 시작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잊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②개종자들이 초대 교회로 끊임없이 몰려오게 되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③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애초에 기대한 것과는 달리 곧 재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과 비례하여 복음 메시지를 기록할 필요성이 커져 갔다.
④복음 작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사료들을 제멋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들은 그 사료들을 교회 전승에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사료가 기록된 경우에는 더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가들은 전승된 사료들을 상당히 자유롭게 적용하고 재해석했다. 복음서 집필은 어느 개인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오랜 전승 과정의 마무리 작업이라 하겠다.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생활하는 분위기 안에 살면서, 교회를 위해서 예수 전승들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에 그들은 하느님의 인도를 받았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성령의 영감이라 한다. 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의 공적 대변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복음 작가 개개인이 개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수용하고 재해석한 복음서에는 복음 작가들의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실 네 복음서에는 각 복음 작가가 애용하는 낱말과 문체, 그리고 강조되는 쌍이 들어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역사적 진리에 대한 교서>에서도 복음 작가들의 편집 작업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제각기 달리 배열하거나 다른 문맥에 배치한 사실을 지적했다.
6)“기쁜 소식” 복음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성취한 신성한 구원의 기쁜 소식”, ‘복된 소리’, ‘기쁜 소식’ 말 그대로 이다. 복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 복음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복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 깊은 일치 속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복음을 선교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하느님 체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