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교리2

제 19 과 : 한국교회사

월요일은자유인 2006. 10. 19. 20:34
 

예비자 교리 19과 : 한국 천주 교회사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교회가 창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겨레 어느 나라보다 주님을 증거하고, 겨레를 주님의 품으로 이끌기 위한 믿음과 사랑이 강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선열들이 순교의 피를 마다하지 않았던 교회이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사람이 왜 살고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죽음으로 증거해 준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계속되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 살아오면서,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흘린 피를 밑거름으로 해서 성장하였다.


  1.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의 조선

 

  1)정치

 

  조선 후기는 극심한 당쟁으로 정치 질서가 문란하였던 시기이다. 16세기말에 시작된 당쟁은 17-1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영,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쟁을 완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가운데 집권적 관료 정치를 부활시켰지만, 19세기의 순조, 헌종, 철종 대에는 세도 정치라는 일당 전제 정치가 지배하였다. 그리고 과거를 통하여 각지에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던 질서가 무너졌다 한 마디로,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하는 등 국가의 정치 질서가 문란하던 시기였다.

 

  2)경제

 

  영, 정조 시대에는 임진, 병자 양란 이후 극도로 황폐해진 농토를 정리하고 경지 면적을 확대하기 위해 토지를 많이 개간하였다. 이 결과 국유지가 원칙이었던 과전법(科田法)이 무너져 왕실이나 권세가, 지방 양반들의 사유지가 늘어나면서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끊고 추수한 곡식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어야 하는 병작농(竝作農)이나 머슴으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조선의 수공업자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8세기부터는 국가에 장인세(匠人稅)를 납부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어 경제적인 성장에 큰 몫을 하게 된다. 정조 때에는 상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어 서울과 지방에 시장이 열려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농업 생산의 증가와 수공업의 발달은 물물 교환에 머무르던 원시적인 경제 상태를 화폐 경제로 발달하게 하였으나, 국가 전체의 경제가 성장한 대신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3)사회

 

  크게 양반과 평민으로 나누던 신분 체계(身分體系)가 조선 후기에 무너지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신분으로 세분화된다. 양반은 본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총칭하던 의미였으나 나중에는 과거 급제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사족(士族)을 가리키게 되었고, 이들은 국가의 권력을 이용하여 갖가지 특권을 보장받았다. 그래서 상민들 가운데 혼인이나 납속(納贖)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재정난을 타개하거나 구호 사업 등을 위해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신분을 높여 주던 일) 등을 통해 양반으로 승격되는 사람들이 많게 되고, 그런가 하면 신분은 양반이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사회적 지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났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상민들은 대부분 병작농으로 전락하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살기 어려워 노비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노비는 도망하거나 전쟁 때 공을 세우거나 납속으로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 상민과 노비의 신분이 모호하게 되었다. 한편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은 사람들을 도시로 몰려오게 하였다. 그래서 도시 지식층과 상공업자 사이에서 사회 생활과 문화 활동에 대한 욕구가 나타나게 되어 농촌 지식인과 도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의 새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정치 질서와 경제적 어려움이 커져만 가는데도 위정자들은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해 불만을 견딜 수 없던 민중들이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회의 불의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민중의 의식이 차츰 깨여 이런 민중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4)문화

 

  조선 시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은 철학적 깊이가 더해지고 높은 학문적 성과를 자랑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변 철학으로 변해 실생활과는 점점 멀어지는 학문으로 변하였다. 남인 학자들은 도덕률만 주장하지 않고 현실 생활에 연결되는 실학을 추구하게 된다. 이들은 높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아울러 임진, 병자 양란으로 피폐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조(思潮)는 그 때까지 분화 창조 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였던 서민층과 여성들도 문화 활동에 한 몫 끼여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2. 천주교의 전래

 

  1)스스로 들여온 교회

 

  조선은 해마다 북경에 사신들을 보냈는데, 이들을 수행하던 관리들은 관광이나 학문적인 목적으로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다. 이들과 필담(筆談)을 하고 예물을 주고받는 기회를 통해 서양 문물과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들을 이 땅에 들여왔던 것이다. 이 한역 서학서들을 접하게 된 이들 가운데 이벽, 권철신 형제, 정약전 삼형제, 이승훈 등은 자율적인 서학 연구를 통해 마침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원시 유교를 연구하던 이들은 '천(天)‘, '상제‘(上帝)의 개념 안에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위격적인 존재의 모습을 보았고, 이러한 해석은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일치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천주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갈망하던 이들은 천주 신앙에서 현세와 내세를 볼 수 있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발견하고 이를 근 기쁨과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한국 땅에도 복음의 광명을 보내 주셨다. 그 보내 주신 방법은 참으로 기묘하여 세계 가톨릭 역사 중에도 그런 일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즉 다른 나라에는 대개 다 외국으로부터 전교 신부가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러나 한국에는 외국 신부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서 자기 손으로 복음을 구하여 가지고 와서 동포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것이 한국 가톨릭이 길이 길이 자랑할 만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1631년부터 한국 사람은 중국 나라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많았다. 이때 중국으로부터 가톨릭 서적이 몇 권 한국에로 들어온 것이다. 가령 ‘천주 실의(天主實義)’라는 책에 실려 있는 천주교의 신조와 윤리 법은 한국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교회 창설

  당시의 학자 이덕조, 이승훈, 정약종,정약전,정약용,권철신,권일신,홍교만등이 천주교에 관한 책을 일고 비로소 우주와 인생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나아가 그 종교를 믿기 위해 모여서 천주교 교리 연구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그들이 토론을 하였지만 만족한 결론을 못 얻고, 한사람을 북경에 보내어 더욱 철저히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돌아오도록 결의하였다. 서학 서적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던 이들은 마침내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여 서양 선교사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워 오게 한다. 그때 1783년 마침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북경 가는 셋째 사신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가기로 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곳 북경 주교인 알렉산델 고배를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묻고 또 필요한 교리를 배웠다 1783년 12월에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북경에서  영세를 하여 한국의 첫 신자가 되었다. 1784년 이 베드로는 여러 가지 성물(聖物)과 성서를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다. 이 베드로는 우선 학식이 많고 덕행이 높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전하였다. 제일 첫째로 가장 열심하게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던 이덕조에게 세를 주어 요한 세자의 본명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이덕조는 다시 권일신에게 세를 주어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들 세 사람은 한국의 첫 사도로서 모든 힘을 다하여 천주교를 전파해서 단 시일 내에 많은 신자들을 모았다.

 이승훈은 귀국하여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갖게 됨으로써 조선에 학문이 아닌 종교로서 천주교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철저한 삶을 찾던 실학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다.

 

  3)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선교

 

  이벽, 권철신 형제, 정약전 형제, 이승훈 등은 학문, 혈연, 지연적인 연결을 사랑과 평등의 새로운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회 의식으로 승화시켰다. 이들은 신분의 차별을 없애는 새로운 가치관을 수용한 사회 집단으로 성장해 갔기 때문에 당시 기존 체제와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에게 새 시대의 구체적 표징이 되었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제도적 모순 속에서 방황하는 서민층에게 현세와 내세를 통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설파함으로써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성리학적 가치관에 젖은 집권 세력에게는 천주교 신앙이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 질서를 그르치는 도전적 체계로 간주되어 초기부터 격렬한 박해를 받았다. 감시와 색출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대담하게 선교 활동을 하고 관헌에게 붙잡혀서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기란 보통 사람들로서는 엄두를 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굳센 증거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고, 더욱더 천주교를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들은 복음 선교를 천주의 명으로 알고 직접 선교에 나섰다. 지식층에게는 직접 교리를 가르치고 한역 교리서(漢譯敎理書)를 주어 천주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나아가, 어려운 한역 교리서를 쉬운 한문으로 요약 정리한 한문 교리서와 서민과 부녀자를 위한 한글 교리서를 저술 -간행하고, 문자를 깨우치지 못한 서민 대중을 위해서는 '천주가사' 같은 노래를 만들어 이들을 주님의 길로 이끌었다. 이처럼 초기의 신자들은 스스로 공부하여 천주 신앙에 도달하고 교회를 창설하는 기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선교의 중요함을 깨달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4천 명의 신자를 갖는 교회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3.가성직 제도와 조선 교구 설정

 

  목자 없이 교회를 창설한 이벽을 비롯한 남인 학자들은 1786년부터 북경 교회를 본떠 소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2년 동안 주일 미사를 거행하고 세례, 견진, 고해성사 등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들은 교리 연구에 더욱 노력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거행하는 성사 집전의 타당성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였는데, 북경 주교가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금지시키자 이에 순종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 행하던 모든 성사의 집행을 중단하고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거세지는 가운데 북경에서는 1794년, 조선인과 생김새가 비슷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켜 활동하게 하였으나,1801년에 체포되어 순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의 신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선교에 더욱 노력하는 한편 성직자 영입 운동을 일으켜 성직자를 맞아들이려는 헌신적 노력을 하였다. 거듭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북경 교회가 성직자를 파견할 형편이 못되는 것을 알게 된 정하상과 유진길은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831년, 조선이 교구로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소 주교가 초대 주교로 임명됨으로써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로서 새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비록 소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도 못하고 안주에서 사망하였으나,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가 입국하여 조선 교회는 활기를 띠게 된다.


  4. 조선 교회 박해

 

  1)박해의 원인

 

  천주교가 이 땅에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첫째, 사상적으로 유교의 신분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 사상이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교리는 천주의 명을 부모의 명보다 우위에 두어 효의 개념을 상대화시켰다. 또한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비롯한 내외(內外), 여필종부(女必從夫) 등의 남성 우위 체제를 거부하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남녀 평등 사상은 수직적 관계인 부부 관계를 수평적으로 전환시키려 하였고, 금기시하던 과부의 재혼을 정당하게 보았으며, 자유 의사로 혼인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들이 전통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는 조상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고 거부한 것이 삼강오륜과 조상 제사를 근본 과제로 삼던 조선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인륜을 어기는 죄로 간주되었으며, 나아가 천주교가 반체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셋째, 정치적으로는 당파 싸움에 천주교가 이용당한 것이다. 신해 박해 때 홍낙안이 반대파인 채제공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한 것이나, 신유 박해 때 대왕대비 김 씨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를 탄압한 일, 흥선 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박해한 일 등이 예이다.

 

  2)을사추조적발사건

 

   1784년에 창립된 한국 교회는 이듬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잡혀가고 교회 서적, 성물, 성화 등을 압수 당하였다. 이 때 김범우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사망하여 조선에서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 되었다. 이벽과 같은 양반들은 목숨을 건지기는 하였으나, 집안에 갇혀 외부와 접촉을 못하는 등 신앙 생활에 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 종교가 상류 사회에 전파되니까 외교인 들은 질투와 의심을 갖기 시작하여 마침내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1785년  즉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온지 겨우 1년만에 형조 판서 김하진이 천주교를 미워하여 이덕조, 정약종 같은 이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오직 김범우 도마를 잡아 왕의 명령도 없이 혹형을 주어 충청도 단양에 귀양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김 도마는 한국 사람으로서 첫 순교자이다.  이때 1882년 신교 자유가 있을 때까지 약 100년 한국 천주교는 큰 박해를 받았다.


  박해가 계속되었으나 그러나 신자들의 수는 늘어갔다. 양의 무리는 많으나 목자가 없으므로 그 필요성을 느끼고 신자들이 1790년 북경 고배 주교께 편지하여 전교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고배 주교는 처음에 요한 도스레미디우스 신부를 조선에 보내기로 정하였으나 신부가 의주까지 왔다가 한국 신자들을 못 만나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2년이 지나 1793년 중국 신부 주문모 야고보를 한국에 보냈다. 주 신부는 1795년 1월에야 비로소 서울에 와서 그 해 4월 5일 예수 부활 주일에 미사를 거행하고 다른 성사를 집행하였다. 한국 신자들이 처음으로 미사에 참례한 날이다. 주 신부는 6년간 한국에 있으며 많은 고통과 박해를 무릅쓰고 전교 하여 많은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1800년 정정 대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니 나이 아직 어리므로 정종 대왕의 계조모 김대비가 섭정하게 되어 정사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에는 사색 당파가 서로 맹렬히 싸우던 때이므로, 신자들이 거의 다 남이파의 선비들이었음을 우선 남인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서인 벽파의 괴수 심환지는 김대비를 이용하여 1801년 신유년 정월부터 천주교를 금한다고 하면서 많은 신자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교우들을 위하여 자수하여 그해 5월 31일 순교하였다. 그는 33세를 일기로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그때 교우로서 순교한 이 중에 유명한 이는 강 골롬바와 동정녀 이 누갈다와 그의 남편 유 요한 등이다. 주 신부가 순교한 후 33년간은 한국에 신부가 없었다.


  3)박해 시대


  (1)신해 박해

  교회 재건에 힘을 쏟던 조선 교우들에게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도의 부당성과 아울러 조상 제사는 미신이므로 금지하라는 의견을 보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 리 북경 주교의 지시대로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들의 엄청난 행동을 본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 이웃 사람들이 고발하여 이들은 순교하였다. 홍낙안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사건을 확대하자 이의 여파로 이승훈이 파직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권일신, 원시장 등이 순교하였다.

 

  (2)신유 박해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권철신, 정약종, 최창현 등에 의해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자가 2만 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순조 즉위 후인 1801년, 순조의 조모인 대왕대비 김 씨가 남인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시파와 가까 웠던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이 때 권철신, 정약종,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300여 명과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

 

  (3)기해 박해

 

  10여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성직자가 없는 가운데서도 정하상 등이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되었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하면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방인(邦人) 사제 배출을 준비하였다. 이어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조만영이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긴 시작하였다. 외국인 성직자가 입국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1839년, 정부는 척사윤음을 반포하고 세 명의 성직자와 정하상을 비롯한 신자 200여 명을 처형하였다.

 

  (4)병오 박해

 

  1845년, 페레을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쥐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한국 교회는 교회 재건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활발하게 성무를 집행하다가 1846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키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한국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는 1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고 말았다.

 

  (5)병인 박해

 

  철종 즉위 후 십여 년 동안 박해가 뜸하였다. 최양업 신부와 열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2만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자 홍선 대원군이 자신의 집권 기반을 다지려고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중국도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놓고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의 수난 가운데 이 때의 박해가 가장 혹독하여 1866년, 아흡 명의 성직자와 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우리 나라의 모진 박해와 순교자들의 열렬한 순교 자세가 서양에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선 신자들의 순교 정신들 찬양하였고, 교황도 이를 격려하는 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5. 종교 자유와 일재 시대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은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을 기점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한불 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l00여 년간의 걸친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제 7대 교황 대리 감목으로 백 주교가 임명되었다. 백주교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말레이 반도에 있는 피낭 신학교 조선 학생21명을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성당을 건축할 목적으로 지금의 명동 대성당 터를 확보한 것이다. 1890년에 백주교는 별세하였다. 그때의 신자 수는 1만7천5백 명이고 신부는 19명이고 신학생이 40명이나 되었다.

  하느님과 조선 교회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79위의 순교자가 1925년, 마침내 복자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입증하게 된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신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1893년, 한국 최초의 양옥 성당인 약현(지금의 중동) 성당이 준공되고, 1898년에는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에 명동 성당이 세워졌다. 1906년에 경향 신문, 1907년에는 경향잡지가 창간되었다. 또한 성모 병원을 세우고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이 땅의 문화 창달과 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부딪히지 않으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교회는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다만 안중근을 비롯한 개인들의 독립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그쳤다. 일본은 많은 핍박과 구속으로 교회 활동을 제약하였다. 대륙 침략 전쟁이 확대되면서 외국인 성직자를 체포하여 추방시키거나 연금시키고, 신학교를 폐쇄하고, 교회의 재산을 징발하거나 몰수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억압에 교회는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한 채 일제 말기에는 신사 참배의 강요에 굴복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징병 , 징용 참가를 권유하는 등 부끄러운 과거를 남기게 된 것이다.

 

  6. 현재의 한국 천주교회

  해방을 맞아 남한 교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로이 선교 활동에 열중하면서 교육, 문화, 빈민 구제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교회는 공산당의 종교 말살 정책으로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순교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당하는 비극을 당하였다.

  1968년에는 1925년에 이어 24위의 순교자들이 복자 위에 올랐다. 앞서 복자 위에 오른 79위와 이들 24위 순교자는 1984년, 교회 창립 200주년 행사에서 성인 품에 오르게 되어 이들을 비롯한 모든 순교자들의 피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50만 신자가 운집한 가운데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성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거행되었는데 이는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밖에서 이루어진 시성식이라고 한다. 1989년,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거행함으로써 교회의 외적 성장을 확인하고 내실을 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사회 정의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교회는 1970년대이래 인권 회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제 정의 실천 운동을 통해 실질적인 민족 복음화에 앞장서 교회의 참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맞추어 다른 종교와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갈라진 형제들과도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가난한 외국 교회를 물질적으로도 돕고 있다. 즉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이 호든 노력들은 온 겨레가 진정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려는 복음 정신의 구현인 것이다

 

  종 합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학문 연구와 신앙으로 자발적으로 창립된 교회이다. 초기의 순교 선열들은 교회의 창설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배려라는 것을 굳게 믿고 복음 선교를 천주의 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직접 말과 글과 노래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으며,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하였다. 아무리 교회를 탄압하고 교우들을 수없이 죽였어도 죽이면 죽일수록 교우들은 늘어만 갔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영광을 대신 받고 있다. 지금은 순교 선열들처럼 목숨 바쳐 순교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신앙에 직접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 해도 주님의 복음을 실천하기에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겉으로 종교 자유가 보장돼 있다고는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불의하고 불공정한 삶을 조장하고 강요하는 현실은 주님의 복음 말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불의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악을 물리쳐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이야말로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나아가 교회 창설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배려라는 것을 깨닫고 복음 선교를 '천주의 명'으로 알았던 선열들을 본받아 이 겨레의 구원을 위해 지속적인 선교에 힘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