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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과 : 종말론

월요일은자유인 2006. 10. 19. 20:40
 

  예비자 교리 제 28과 : 종말론


  제 28-1과 : 그리스도인의 죽음

        

  1.죽음의 문제


  죽음의 문제는 신비이다.


  2. 비현존(非 現存)


  또 하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영원으로부터 이 세계에 살지도 않았고, 또 영원히 이 세계에 살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 세상에 없었다.  이것을 「과거 비현존」이라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이것을 「미래 비현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삶은 과거와 미래의 비현존 사이에 잠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때, 나는 태어나기 이전에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고 물어 봐도 우리는 대답할 수가 없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과거 비현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만이 내가 나의 삶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3.  출생의 신비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계획하거나 자유로이 선택함이 없이 완전히 타의(他意)에 의해서 우리는 지금의 자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마치 내 손 안에 있는 돌이 아무리 서쪽으로 가려고 하더라도 내가 동쪽으로 던지면 동쪽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듯이 인간도 자기 자신의 태어남과 자신의 상태와 조건에 대해 조금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없다. 


  살아가는 것인가? 죽어 가는 것인가?

  언젠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없었다는 것이 확실한 것만큼, 또한 언젠가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라는 점도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다.  이것이 “미래 비현존”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을 위한 존재”, “죽기 위한 존재(Sein Zum Tod)”라고 표현했다.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듯이 인간도 죽음에 대하여 일종의 거부 반응을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누가 죽었다는 부고(訃告)가 오면 그것을 집 안에 두지 않고 대문밖에 꽂아 둔다.  죽음의 神이 그 쪽지에 따라서 집안에 들어올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50 ~ 60세가 되면 벌써 생의 허무감이 온 몸을 감돌며 가슴에 스며 오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아무리 싫어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살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외면할 수 없는 한 모습인 죽음을 더욱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음미하고, 생의 참모습을 추구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된다.

  한 평생을 꿈과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이 성취되어 가는 기쁨 속에 생활하는 사람에게 불쑥 죽음이 찾아온다면 당사자는 물론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죽음을 거부하고 두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꼭 어떤 이유를 달지 않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그 생각 자체를 회피하고 맙니다.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생명의 소멸, 즉 죽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대개는 ‘사람들의 죽음’이지, ‘나 자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어하는데 보통 우리의 태도이다.

  세상에 태어난 존재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언제인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있어 죽으면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그 모든 것들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보통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훨씬 앞서는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게 된다.

  이러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동안 현세적인 가치인 명예나 부, 권력과 같은 것들을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알고 거기에 절대적인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크게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절대적인 가치로 알고 있었던 그것들이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아무런 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이점은 아주 오래 전  진시황의 예를 들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벌하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 줄 만리장성을 쌓아 이제는 세상에서 무엇하나 부럽거나 무서울 게 없이 자기의 세계를 완전하게 구축하고 대단한 만족감으로 살았던 그 사람도 결국 죽음을 두고 생각할 때 자기가 애써 건설한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평생을 들여 이룩한 아방궁의 편안함이 물거품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기 노력과 성취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에 각처로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들을 보냈지만 결국 죽고 만다.  그 진시황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이 얼마나 괴롭고 아쉬웠겠는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막을 내려 버린다고 생각는 사람들이 쉽게 빠져 들 수 있는 오류는 짧은 인생,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구태여 심혈을 기울여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선하게 살면서 의미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주어진 생명의 시간 동안 즐기면서 살아도 되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이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이 현실이다.

  다음으로 사후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이 사후 세계 에로까지 연장되어 현세 생활에 대한 공과 실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복이나 형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다 착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모든 인간들을 이 두 가지의 범주에 의해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이 생래(生來)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심의 소리, 즉 인생을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아무튼 인간의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양하다.


  4. 죽음의 성격


 1) 죽음의 필연성 : 필연(必然)이란 자유(自由)라는 개념과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을 필연이라 합니다.


  2) 죽음의 보편성 : 모두 죽는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男女老少 貧富貴賤)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음이라는 불청객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 때와 상황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가장 민주적이라는 농담도 한다.


 3) 죽음의 영원성 :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한다.  이것은 애인과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와 은인의 죽음 앞에 기적을 바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통곡한 모든 울음소리가 아무 반응 없이 허공에 메아리치고 말았음을 말한다.  참으로 죽었다면 현실 안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다.


  4) 죽음의 현실성 : 이 점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점이다.  인간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의 사건이 당장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한달 후에 있을 수학여행 때문에 지금부터 기뻐할 수 있고, 또 몇 개월 후에 있을 예비고사를 위해 지금부터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이 분명히 미래의 사건이지만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당장 애석한 감을 금할 수 없다.  말하자면 미래의 죽음은 지금의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5.  생의 문제


  이상에 든 몇 가지 죽음에 대한 고찰로 우리는 생의 모습을 조금 더 확실히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피할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것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을 실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인간이 가진 소명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의 의지(生의 意志)이다.  인간이 지닌 욕망 중에 영원히 살고 싶은 것만큼 크고 강한 욕망은 없다.  그런 반면에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미래는 인간이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가장 큰 소망과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필연성 사이에서 인간은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떤 때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돼지의 행복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까뮈는 이것을 인생의 최대 부조리라 했습니다.

  태어남이 우리의 의지(뜻,意志) 밖의 일이고, 또 죽음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일컫는 일생(一生)은 완전히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6.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다.

  예수께서 인간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시고 활기 차게 하신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셨고,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다가 마침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믿음과 희망을 고백하게 됨.


  7.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1)천국 : 하느님이 계신 곳, 하느님과 함께 있는 상태

  천사와 성인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완전한 행복을 끝없이 누리는 희망의 나라이다. 인간이 염원하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 영원한 사랑의 나라, 영원히 사는 곳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절망뿐이다. 천국은 인간이 바라는 마지막 희망의 나라이다. 우리는 인생 여정을 통해서 종착하는 아버지의 집이 있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모름지기 영원한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2)지옥. : 하느님과 분리되는 단절된 상태

  악마와 악인들이 혹독한 형벌을 끝없이 받는 곳이다. 지옥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보상을 치르는 영원한 감옥소이다. 영원히 구원이 없는 끝없는 암흑과 절망의 세계이다.


  3)연옥: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용서받은 죄에 대한 잠벌을 받음.

  이 세상에서 죄의 보상을 다 치르지 못한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벌을 받는 곳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죽은 다음 즉각 천국을 얻을 수 있도록 착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한 벌인 지옥으로 가야 할  사람도 아닌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고 보상을 치르는 천국으로 가는 곳이 있어야 합리적이다.

  지옥이 영원한 사형 선고라면 연옥은 잠정적인 유기형을 치르는 곳 임. 연옥의 단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와 죄의 벌에 따라 기간이 다르다. 이렇게도 하느님은 공의 하시기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 심판하실 정의의 하느님 앞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하시고 영원한 삶의 길을 개척하신 분이다.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후에 따르는 , 이 세상에서의 삶을 총결산하는 심판 앞에서 초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랑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재의 삶을 매 순간 순간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 사람의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사람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신이 서로 갈림을 말합니다.


▶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가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답>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가끔 생각해야 할 것은 곧 죽음은 죄의 벌이고, 영원한 복락과 징벌이 죽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되고, 죽을 때가 일정하지 아니하여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죽은 후 그 상이나 벌을 누가 결정합니까?

<답> 죽은 후 그 상이나 벌을 천주께서 심판으로 결정하십니다.

  

▶ 심판은 몇가지가 있습니까?

<답> 심판은 두가지가 있으니 사심판과 공심판입니다.

  

▶ 사심판은 무엇입니까?

<답> 사심판은 사람이 죽은 후, 육신을 떠난 영혼이 천주대전에서 혼자 자기 일생에 대하여 받는 것입니다.

  

▶ 사심판의 판결은 어떠합니까?

<답> 사심판의 판결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은총의 상태에서 있어서 아무런 보속할 것이 없는 이는 바로 천당에 오르고, 대죄 중에 있는 자는 바로 지옥에 내려가고, 소죄나 혹은 보속할 죄벌이 남아있는 자는 연옥으로 갈 것입니다.

  

▶ 천당은 무엇입니까?

<답> 천당은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천주를 모시고 완전한 복락을 무한히 누리는 곳입니다.

  

▶ 지옥은 무엇입니까?

<답> 지옥은 마귀와 악인들이 혹독한 형벌을 끝없이 당하는 곳입니다.

  

▶ 연옥은 무엇입니까?

<답> 연옥은 세상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떠난 이들이 천당에 들어가기까지 단련을 받는 곳입니다.

  

▶ 공심판은 무엇입니까?

<답> 공심판은 세상이 마친 후, 모든 육신이 부활한 다음에 예수께서 내려오시어 천사들과 만민앞에서 각 사람의 사심판의 판결을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 공심판의 판결은 어떠할 것입니까?

<답> 공심판의 판결은, 예수께서 의인에게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을 창조할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차지하라"하시고, 악인들에게는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악신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불로 가라"하실 것입니다.


▶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현세와 후세에서 서로 도와줄 수 있습니까?

<답>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현세와 후세에서 서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현세와 후세에서 어떻게 서로 도와줍니까?

<답>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천국과 연옥과 현세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비롭게 일치단결하여 있음으로, 기도와 희생과 온갖 선행(善行)으로 서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현세와 후세에서 서로 돕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답>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현세와 후세를 통하여 서로 돕는 것을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라고 합니다.

  

▶ 모든 성인의 통공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누구입니까?

<답> 모든 성인의 통공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은 대죄중에 있는 이들과 파문을 당한 자들입니다.

  

  제28-2과 : 모든 사람의 완성.


  하느님은 세상과 인류를 완성하시어 당신 정의로 지배하시고 인간들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실 것이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은 알 수 없다.


  1.종말에 대해서


  가톨릭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최종 완성을 위하여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 기대해 왔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종말 사건이 발생하여 모든 것이 최종 완성된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 실 것을 믿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1데살 4,13-17)


  2.그리스도의 인격 : 그리스도의 재림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사도 신경).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신뢰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대해 왔다. “주여 어서 오소서”(1고린 16,22)라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최후 승리를 보고자 하던 강한 열망을 표현한다. 그리스도는 오시는 주님이고 그리스도인은 주도권을 갖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신앙의 근본 사실을 전례로써 표현해 주는 시기가 대림절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궁극적 일치를 열망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상의 개념으로 묘사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시작과 끝이다’ ”(묵시22,12)


  1)<사람의 아들>로서 재림하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수난 예고 후에, 대사제 앞에서 재판 받으시던 때에 당신 자신을 재림하실 <사람의 아들>로 소개하셨다:“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신다”(마태16,28): 그리스도 친히 당신은 주님, 심판관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영광스런 재림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최종적 계시, 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 그리고 우리의 선행과 고통에 대한 보상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은 신비에 가득찬 인물이다. 그는 천상적 존재(하늘, 구름,영광,권능)이고 동시에 지상적 존재(고통의 인간,인간과 동화된 존재)이다. 상반되는 대조를 지니고 있는 신비에 찬 인물이다.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천상 존재이면서 인간 조건에 적극 동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 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을 인자(人子)소개하신다.  그리고 <인자>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고 영광스럽게 재림하여 모든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2)삼중 도래(三重 到來)


  그리스도는 오셨고(과거) 오고 있으며(현재) 오실 것이다(미래),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다”(묵시4,8) 사람으로 태어나 오셨고(강생) 성령 안에서 또 성자들을 통해 오고 계시며(성사적 방식의 현존) 마지막날에 다시 오실 것이다(재림) 그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님이다. 두 유형의 도래는 대조된다. 즉 감초임과 드러남의 대비이다. 비하와 영광의 대비이다.

  강생 때에는 인간성 안에서 신성을 철저히 감춘 은폐의 방식으로(종의 모습으로)오셨으나 재림 때에는 영광과 권능 속에서 신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하느님의 모습으로)오실 것이다. 겨자씨에 비유되는 하느님의 나라는 곧 강생과 재림 사이의 현격한 대조를 드러낸다.


  3)영광스런 재림의 목적 : 하느님 나라의 최종 완성

  악마, 죄, 악에 대한 최종 승리를 가져오는 하느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께 심판주로 와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고 난 후 그 나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림으로써 악, 죄, 죽음에 대한 최종 승리를 이루신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완전한 다스림, 통치, 지배가 실현된다. 주님의 재림은 비단 구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주금(살인과 살해)착취, 지배 불의를 의미하는 것과 맺는 관계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재림에 대한 성서의 진술은 구원을 위한 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현존과 심판과 결정적 개입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승리자의 모습으로 위엄 있게 나타나신다.  예수께서는 재림이 언제, 어떻게 또 어는 순간에 실현될 것인지에 관해 언급하기를 거부하시며 항상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신다.


  3. 육신 부활 : 마지막 부활, 몸의 부활, 죽은 자들의 부활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심판의 조건으로서의 부활이 있고 최종 구원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있다. 전자는 그 자체가 구원 사건이 아니며 최종 구원을 결정짓는 심판을 위한 한 전제일 뿐이다. “죽은 이들이 모두 그(사람의 아들)의 음성을 그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5,29)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 자체가 최종 구원 사건으로 간주된다.


  1)부활 신앙의 형성


  ①<야훼> 하느님 신앙이 부활 신앙의 시발점이고 바탕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 인격자들의 하느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②하느님과의 일치 체험 : 무고한 고통을 겪는 의인들은 불행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과의 친교를 체험함으로써 행복을 맛보다. 그들은 이 친교가 고통과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해준다는 확신을 가졌다.

  ③정의의 하느님에 대한 신념 : 예언자들은 신앙 때문에 겪는 고통이나 부당한 고통에 완전히 보상해 주시는 하느님을 역설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야훼는 고아와 과부의 하느님 곧 약자들과 부당하게 고통 당하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④박해 순교의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


  2)예수의 부활 신앙


  부활 신앙은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 위에 근거한 것이다.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곧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최종 구원에 투사시켜 형성된 것이다. 성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그리고 따라서 그분을 믿는 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잇다.


  3)그리스도의 육신 부활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상황 내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복음 선포, 신앙, 구원의 바탕이 되는 예수 부활의 근거이며, 예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 신앙의 토대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해준 출발점이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지적한다. 즉  인격의 동일성과 변형된 육신을 역설한다. 부활하신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 위에서 수난하고 죽음을 겪은 바로 그 육신이다. 즉 육신을 지닌 채로 부활하였다. 그렇지만 예수의 육체는 전적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4)육신 부활의 의미


  영혼 불멸성과 전혀 다르다. 희랍인들의 내세관인 영혼불멸성에 따르면 영혼은 주거 없어지는 육신과 달리 불멸한다. 죽음에 의해 영혼은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본향인 신적 세계에로 복귀한다. 이 영혼 불멸성은 죽음을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 간주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인간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의한 구원을 가정하고 또 인간의 한 부분인 영혼의 구원 즉 구령(救靈)만을 전제한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에 의한 구원, 영혼과 육신을 구성된 단일체인 전인의 구원, 인간과 더불어 완성에 도달하는 전체 세계의 구원을 뜻하는 육신 부활을 주장한다.

  <몸의 부활>은 인간이 자신의 불멸하는 영혼의 능력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의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상에서 육신을 통하여 노력하고 겪은 모든 일(고통,희생, 선행)이 하느님에 의해 후하게 보상받을 뿐 아니라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선하게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능력(성령)에 의해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은 창조주 하느님이 손수 빚어 만드시고(창세2,7) 살이 되신(요한1,14)의 죽음에 의해 속량되고 또한 성사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몸이다.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는 지체이며 성령이 거처하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적극 협조하며(노동, 직업,수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누리며(성사 생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고(인격 성숙)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함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한다. 육신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도덕적 처신), 고통, 희생, 봉헌 및 순교를 확증해 주는 궁극 보증이다.


▶ 죽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까?

<답> 죽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데, 천지가 마칠 때에 천주의 전능으로 본 영혼과 육신이 다시 결합하여 부활한 후 공심판을 받습니다.

  

▶ 부활한 육신은 어떠할 것입니까?

<답> 부활한 육신은 모두 다시는 죽지 않게 도리 것이지만, 간선자의 육신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닮아 네가지 특은을 입어 빛나고 아름다울 것이고, 악인들의 육신은 추악하고 흉칙할 것입니다.

  

▶ 영화로이 부활한 육신의 네 가지 특은은 무엇입니까?

<답> 영화로이 부활한 육신의 네 가지 특은은 상(傷)을 받지 않음과 빛남과 빠름과 무엇이나 관통하는 사무침입니다.

  

  4. 최후의 심판 : 하느님과의 결정적 상봉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이는 사도 신경의 마지막 대목이다. 최후의 심판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최종적 행위, 죄와 악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 선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보상을 의미한다.


  1)심판주 하느님


  <심판>은 ‘판결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뜻한다.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심판이 하느님의 결정적 다스림, 인간의 하느님과의 결정적 상봉이라면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심판 하에 있다. 하느님이 심판은 일정한 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잇는 지속적 과정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작용한다. 우리는 날마다 양심과 대결하는 가운데 심판을 받는다. 우리는 현세 생활 중에 하느님의 심판이 세례 성사 안에서 실현되고 화해의 성사 안에서 단죄의 판결이 아니라 은총의 판결로 나타남을 체험한다.

  <사심판>과 <공심판>은  그 종말론적 사건의 두 가지 차원으로서 제시된다.

  <사심판(私審判>:죽음의 순간에 집행되는 이 심판은 하느님의 선과 의로움을 충만히 드러낼 것이다. 그 때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을 받아들인 모든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이르게 되며 그분을 배척한 모든 이에게는 단죄로 드러날 것이다.

  <공심판(公審判)>:마지막 부활이고 역사에 관한 마지막 말씀이며 인간적 실재에 관한 최종적 심판이다. 선인, 악인에 내려지는 판결문 선포 이상의 것이다. 악을 섬멸할 선을 보상함으로써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이루어 내는 하느님의 최종 행위이다.


  2)그리스도 : 심판의 기준(마태 25,31이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 분부하셨습니다(사도10,42). 그리스도는 심판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요한5,22).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마음대로 심판하시지 않는다(요한5,30).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사랑의 행동을 따라 심판 받을 것이다.(마태25,35)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리는 불쌍한 이웃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심판 받는다. 우리 중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보여준 사랑에 따라 심판 받는다.

  하느님의 심판이란 세세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지닌 태도 곧 책임을 확증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임 있는 태도는 개별 행위들에 의해 결정된다. 심판은 인간 인격에 대한 최종적 확증이다. 인간은 인격으로서 결단에 대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와 관련하여 어떤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은 모든 결단에 대한 책임을 확증 받는다.


  3)최종 계시 : 하느님과 역사 및 인간 인격의 최종 계시


  (1)하느님의 최종 계시 :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개입이 최종적으로 밝혀진다.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항상 게셨음을 그때에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완전한 모습(찬란한 영광, ;놀라운 권능)이 드러날 것이다.


  (2)역사의 최종 계시 : 역사는 불명료하고 단편적이고 지속적이다. 불명료성, 단편성, 지속성으로 인해 역사 안에서 만사가 은폐될 수 있다. 역사 안에서 선과 악이 뒤엉켜 있다. 선 악의 구별이 힘들다. 따라서 선악의 분리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역사는 선 악의 대결장이고, 역사 안에서는 선이 악에 패배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폭로된다. 희미했던 선이 뚜렷이 나타나고 언제나 선이 악을 이겨냈음을 드러낼 것이다.


  (3)각 인격의 최종 계시 : 현세 삶 동안에 우리는 자신을 감출 수 있다. 역사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감추는 위장술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동질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종말에 우리 자신의 숨겨진 면도들,  내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잇고 이해될 수 없는 면모들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한 내 행위의 궁극 의미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모든 행위, 관계, 인연이 드러날 것이다.  심판은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자아(自我)를 대면하고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4)우리가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할 대에 항상 두 가지 기억 사항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1)후한 보상 :“내 후한 처사가 ”(마태20,1이하) 하느님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방식으로 후하게 보상하신다. 

  (2)판단 포기 :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태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