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과 : 죄론,삼덕론
예비자 교리 제 29과 : 죄론과 삼덕론
제 29-1과 : 죄와 양심.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을 심어 주시어 당신의 법을 따르도록 하셨으나, 인간은 하느님께 도전하고 반역하여 죄를 범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잊고 죄를 범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우리 스스로가 도덕의 절대적 기준으로 행세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행동, 범한 죄에 대하여 자신이 행위자인 동시에 심판자가 되고자 하는 그릇된 욕심에서 자신이 범한 죄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심에 있어서 내적 통로를 마련해 주셨다. 우리는 죄를 범하였을 때 수치감이나 책임감 즉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바로 이 양심이 하느님과 인간의 끓임 없는 사랑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신음이다.
이러한 양심의 기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신과의 유대를 유지한다. 그러면 인간의 죄, 하느님과의 단절을 만드는 죄라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1.객관적 윤리 규범인 자연 도덕률
인간은 선한 것을 식별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향하여 행동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인간다운 행위를 함으로써 자아를 성취해야 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근본적 규범이 주어진다.
인간의 최종적인 규범은 하느님이시다. 이 우주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은 이러한 법을 알아듣고 책임을 지고 지켜 나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 이 법이 인간의 윤리 행위, 즉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부합되게 행동하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행위를 규정지어 주는 객관적 규범이다.
2.주관적 규범인 양심.
인간에게는 윤리 행위를 위한 객관적 규범 외에 이러한 법의 요청에 호응하는 기능이 내부에 있어서 구체적인 윤리 행위를 하도록 이끈다. 이것이 양심인데, 행위자 주체에게만 소속되는 것이므로 주관적 규범이라 한다.
하느님의 법의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행하며 악을 피하라고 인간을 타이른다.
그리스도교적인 양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사물의 판단을 하느님 중심으로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심은 윤리 행위의 주관적 규범이다. 법의 요구를 파악하여 구체적인 윤리 행위를 하도록 이끌어 주는 내적 기능 즉 인간이 행한 행위나 행하려는 행위 중 어떤 것이 자신에게 선이 되고 악이 되는지 혹은 선이었는지 악이었는지를 실제적으로 판가름하는 직관력을 양심이라 한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을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의 귀에 들려준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 받을 것이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여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양심을 통해서 신법(神法)을 깨닫고 인정하며 자기 양심을 따라 삶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3.양심 형성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며 ‘하느님의 율법’이지만 사회 환경과 인간의 거부로써 그릇된 양심, 무딘 양심 등이 돌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 도야와 함께 양심도 바르게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는 자기 양심을 형성함에 있어서 교회의 거룩하고 확실한 교의(敎義)를 십분 유의해야 한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진리의 교사이며, 그 임무는 진리인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정확히 가르치고 동시에 인간성에 기인한 도덕적 질서의 원리를 권위로써 선언하고 확증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과 진리와 빛으로 살으신 성인들을 따라 양심을 형성하고 언제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4. 양심의 갈등 해소
인간의 행위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양심의 확실한 판단 하에 행동해야 하지만,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경우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첫째, 자기가 지닌 윤리 의식에 따라 신중하게 다른 계명들과 비교 검토할 것이다.
둘째,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을 것이다.
5.죄란 무엇인가?
성서에서 죄를 특징을 표현하는 주요 개념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인격적인 소외이다. 신학자들은 인류의 사상에 나타나 있는 죄의 개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죄를 외적인 규범으로부터 이탈로 보는 ①도덕적 관점, 죄를 인간의 피조성 내지는 육체적인 속성과 대체로 동일시하는 ②일원론적 관점, 그리고 성서의 경우와 같이 ③인격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죄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분의 계명과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며,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고 그분과 대등해지려 하며 그분께 용납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피조물이나 그 이외의 것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자세와 그분의 법을 따르느냐 거절하는 가하는 선택이 죄에 있어서 문제된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그릇된 줄 알면서도, 자유로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경우에 성립된다.
6.아담의 죄.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분을 잃었고 낙원에서 몰려났으며 인간은 거듭되는 죄에 빠졌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까지 보내 주셔서 세상의 죄를 없애고 인간과의 친분을 회복하도록 하셨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확보하게 되었다.
죄가 자유의지의 소산인 것처럼 하느님의 거듭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자유의지의 소산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결단의 표시로는 회개가 필요하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골고루 미쳐 있다. 하느님과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길뿐이다. 즉 자유의지가 창조주의 배려에서 있었음을 인지하고 주님의 주신 초대장에 과감히 응답할 수 있는 지혜를 모두가 가져야 한다.
7.인간의 응답.
죄로부터의 행방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손길이지만, 인간이 이 사랑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 죄가 자유의지의 소산이듯이 하느님의 사랑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로써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 본죄는 무엇입니까?
<답> 본죄는 계명을 알고도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본죄는 몇가지 모양으로 범하게 됩니까?
<답> 본죄는 여러 가지 말과 모양으로 범할 수 있는데, 특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천주와 타인과 자신을 거스려 범하게 됩니다.
▶ 본죄는 몇가지 있습니까?
<답> 본죄는 대죄와 소죄 두 가지 있습니다.
▶ 대죄(大罪)는 무엇입니까?
<답> 대죄는 계명이 중한 줄 밝히 알고도 온전한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대죄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답> 대죄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은총과 모든 공로를 다 잃고,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소죄(小罪)는 무엇입니까?
<답> 소죄는 계명이 중대치 않은 줄로 알고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소죄(小罪)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답> 소죄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천주를 사랑하는 열정이 점점 줄어들고 차차 대죄에까지 빠지게 되기 쉽고 또한 현세의 고통과 후세의 연옥의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모든 죄악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죄악의 근원은 대개 일곱가지를 말할 수 있으니, 교만과 인색과 미색과 분노와 탐욕과 질투와 게으름입니다.
▶ 우리의 신앙생활에 위험을 주는 것은 대개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신앙생활에 위험을 주는 것은 죄악으로 유인하는 세속적인 경향과 자신의 과도한 육육과 각가지 형태로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입니다.
제 29-2 믿음. 바람. 사랑의 생활
믿음, 바람,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희망을 갖게 되며 그분을 따르고 사랑하게 된다.
※ 모든 것을 믿고 바라게 하는 사랑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조건이며 결과이기도 한 믿음, 희망, 사랑은 또한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 태도이다.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지 않으신다. 거꾸로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에게 신앙과 희망과 사랑이 없다. 교황 레오 1세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짧지만 아름답게 표현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갖지 않으면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오, 그러면 나를 갖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초보적인 믿음이거나 아니면 붕괴 상태에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 서간에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죽은 신앙”(야고 2,26)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1-13).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우리는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1고린 13,11). 신앙 생활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갓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어린이였을 때에는 '나'의 생각이 앞서고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남에 따라 이제 하느님의 뜻하심을 먼저 살피게 되었고, 우리의 관심 역시 하느님과 이웃에게 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느님 중심으로 생활하고, 하느님께 먼저 시선을 돌리게 하여, 하느님의 성숙한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 주는 덕성이 곧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시는 믿음의 덕(신덕), 희망하는 덕'(望德),그리고 '사랑하는 덕(愛德)이다.
"향주덕(向主德)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며 생명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드러내게 해 준다. 향주덕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시는 덕이다. 향주덕은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과 또한 그분의 역사 하심을 보증해 주는 덕이다. 이러한 향주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다”(참조1고린 13,13).
1. 믿음의 생활
1)믿음.
믿음이란 인간에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다한 응답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선물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이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이다.
그런데 믿음은 감상적인 어떤 느낌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지 확실히 안 뒤에 믿고 따르는 지적 행위요, 자유의사로 하느님께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고 경배 드리며 주님의 말씀과 행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의지 행위이며,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그분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또한 사랑의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 행위는 전인적인 행위이다.
믿음은 이성이나 논리적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닌 서로 믿고 의지하는데서 비롯된다. 믿음은 감각이나 이성이나 의지 그 이상의 인간 능력에 속하는 것으로 알지도 체험도 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의 권위를 보아 인정하고 믿겠다는 나의 인격적 선택과 바람 그리고 결단의 행위이다. 또한 세상 사물과 현세를 초월하는 유일한 가치 기준이기도 하다. 믿음의 가치관은 윤리보다 믿음이 우선 이며 과거, 현재, 미래에 희망을 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하느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선물이며 인간의 응답이다. 신앙이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믿고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응답인 것이다. 신(信)이란 한자를 보자. 사람인 변에 말씀 언이다. 요한 복음 1장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셨다 라고 하셨다. 우리는 바로 이분이 사랑으로 오시었고 인간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분의 사랑과 구원에 우리가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응답하고 온전히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응답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강제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적을 통해서라도 세상 모든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시는 가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적을 통한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아니다. 보고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 본 것이다. 믿음은 무조건 신뢰이다.
현세를 보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믿는 사람들은 무능하게 보이며 고지식하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남에게 헌신하는 생활이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 생명까지 인간에게 내어 주는 삶이다. 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생명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지 한다. 귀중한 생명의 길로 가는 우리는 그 목적을 잃고 방법에만 혼을 빼앗길 때가 많다. 돈, 명예, 권력, 학력 등 여러 가지 욕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들게 한다. 이때 기도가 필요하다.
2)믿음은 생활이다.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진 믿음은 계속 자라 알찬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숙을 위해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더욱 깊이 알도록 공부하고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성사에 참여해야 한다. 아울러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믿음은 노력 없이 보존되지 않는다. 계시에 응답해야 하고 받아들인 후에도 계속해서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은 끓임 없이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을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되풀이하며 체험해 나가야 한다. 믿음의 3요소는 기도, 봉사, 공부이다. 끝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묵상하며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 1절에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집과 고향 모든 것을 버리고 명하신 당으로 묵묵히 갔다. 그러므로 인하여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묵상하며 믿음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한다.
3)굳센 믿음의 생활
신덕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 그리고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권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하는 덕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가 언제나 당하고 있는 박해 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가지라고 이르신다. "하느님을 믿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23).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어라,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실 때마다 매번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의 권능으로써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의탁한 사람들의 믿음으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 10,52)라는 말씀으로 사람들의 강한 믿음을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 믿음에 대한 증거가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구 든 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마태 10,32-33).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믿음에는 시련이 바른다고 가르친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1,6-7).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에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소용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권고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담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믿음이라는 선물은 믿음을 거슬러 죄를 짓지 않는 사람 안에 머문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26). “희망과 사랑이 없는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결합시켜 주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살 뿐 아니라, 담대하게 고백하고 확신을 가지고 그를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가 언제나 당하고 있는 박해 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겠다.” 믿음에 대한 봉사와 증거는 구원을 위해 요구된다."
풍랑이 심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마태 14,22-33; 요한 6,16-21)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마태 14,26-29).
예수께 대한 신앙의 힘으로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다. 깊고 큰 바다보다 신앙의 힘이 더 강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겁에 질려 물에 빠져 버린다. 거센 바람과 발 밑에서 사납게 요동치는 바다가 그의 약한 믿음을 흔들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구해 주시며 말씀하셨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마태 14,31). 예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자고 배는 해변에 닿았다.
우리의 생애도 베드로의 이 모험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오너라”하는 말씀을 신뢰하여 우리는 거친 바다 위를 걸어나간다.
2.바람의 생활
1)바람.
바람은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며, 이같이 전적인 바람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인의 바람은 하느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느님께 근거를 두고 있어서, 인간적인 실패로 패망해 버리는 그런 희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희망은 막연히 미래에 올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느님 나라의 상속, 영원한 생명, 현세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구체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모든 사람들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희망은 미래적인 선 꼭 얻어질 수 있다는 확신이다. 현세는 도피한 것이 아니 현세의 고통을 승화하여 살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덕이다. 다시 말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희망이다. 이 희망이 없으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희망의 표현은 믿음과 희망이 같은 성질, 같은 뜻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살았다. 선조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이것이 희망이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면 얻어진다는 믿음과 희망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희망을 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희망은 돈, 명예, 권력, 인간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불안하며 부족감에 사로잡혀 있다. 희망은 출애굽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포기이다. 나를 죽이고 남을 위하여 즉 완성을 위하여 거는 희망이다. 주체는 내가 아니다.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해 보자.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예수를 배반한 제자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를 포기하고 잘못을 뉘우쳐 교회의 으뜸이 되었고 유다는 자기 안에서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에 실망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다. 잘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언제나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용서를 청하며 한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2)희망하는 생활
우리는 어려움에 부딪치면 쉽게 좌절하고 실망한다. 때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심하여 인간 세상에 절망하고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 인간 현실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의 포기는 커다란 잘못이며, 믿음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희망할 수 없을 때 희망하는 비결은 주님이 누구 신지 믿는 믿음에서만 가능하다.
3)꺼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희망
믿음과 희망은 동전의 앞뒤와도 같다 사실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칼과 행실이 떳떳하며, 그래서 항상 유유자적하다. 그러니까 '희망'은 '믿음'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희망하는 덕(望德)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하늘 나라를 갈망하게 하는 덕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히브 10,23). “하느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총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디도 3,6-7).
"희망하는 덕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에 대한 갈망에 부응한다. 희망하는 덕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하나로 모으며, 그 활동들을 정화하여 하늘 나라를 향하게 한다. 사람들을 실망으로부터 보호하고, 버림받을 때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고, 영원한 지복에 대한 기다림 안에서 마음을 부풀게 한다. 희망의 약동은 사람을 이기주의로부터 보호하여 사랑의 행복으로 이끈다"
희망은 구원을 위한 싸움에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무기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1데살 5,8). 희망은 시련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억하십시오”(로마 12,12).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님의 전도 시작 때부터 진복팔단 안에 제시되었다. 진복팔단은 우리의 희망을 새 언약의 땅으로 들어올리듯이 하늘로 들어올린다. 진복팔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참고 로마 5,5)을 잃지 않게 하신다. 희망은 확실하고 든든한 '영혼의 닻'이며, 예수께서 우리보다 앞서 들어가신 그곳으로 들어가게(참조: 히브 6,19-20)해 준다. 희망은 기도로 표현되며 기도에서 영양을 얻는데 특히 우리가 희망하여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 요약된 '주의 기도'가 그러하다.
3.사랑의 생활
1)사랑.
인간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이 그분을 배반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졌을 때도 무조건의 사랑으로 다시 찾아오시고 구원하시어 당신 사랑의 상대자로 삼아 주셨고, 인간을 위해 외아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시며 사랑의 관계를 맺자고 찾아오시는 하느님께 인간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2)사랑하는 생활
하느님은 과거에 우리를 사랑하셨던 분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다.
믿음, 바람,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에 굳은 희망을 갖게 되며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게 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뿌리로 하고 희망을 줄기와 한가지로 한 나무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된다.
3) 사랑의 실천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진 첫째가는 소명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네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51-35).
바울로 사도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4-7).
이어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고린 13,2)라고 한다. 특은과 봉사와 덕행까지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다."(1고린 13,3)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든 덕들보다 앞선다. 사랑은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덕 풍에서 으뜸가는 덕성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예수님은, 어떤 이들을 당신을 따르던 이들로 여기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사랑은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게 하는 향주덕이다."
"성령의 열매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하느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키게 한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참조: 마태 22,40; 로마13,8-10).
“모든 덕의 실행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사랑으로 고취된다. 사랑은 로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끈(참고 골로 3,14)이고, 덕의 바탕이며, 덕들을 연결하고 질서를 짓는 그리스도인 수덕의 근원이며 귀결이다.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확고하게 하고 정화한다 사랑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으로 들어올린다."
▶ 덕행은 무엇입니까?
<답> 덕행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한결같은 마음가짐이니, 결코 일시적인 태도가 아니고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각오와 노력입니다.
▶ 덕행은 몇가지가 있습니까?
<답> 덕행은 두가지가 있으니, 향주덕(向主德)과 윤리덕(倫理德)입니다.
▶ 향주덕은 무엇입니까?
<답> 향주덕은 사람을 직접 천주께로 향하게 하는 덕입니다.
▶ 향주덕은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까?
<답> 향주덕의 분류는 세가지로 볼 수 있으니, 신덕, 망덕, 애덕입니다.
▶ 신덕은 무엇입니까?
<답> 신덕은 천주께서 내려주신 초성(超性)한 덕행이니, 천주께서 계시하시어 천주교회에 맡기신 모든 진리를 천주의 진실하심을 인하여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 망덕은 무엇입니까?
<답> 망덕은 천주께서 내려주신 초성한 덕행으로서, 예수의 공로를 보사 허락하신 천당영복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 복락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천주의 성실하심을 인하여 또 자비하심을 인하여 굳세게 바라는 것입니다.
▶ 애덕은 무엇입니까?
<답> 애덕은 천주께서 내려주신 초성덕행으로서 만선(萬善)미호(美好)하신 천주를 그 지선하심을 인하여 만유위에 사랑하고 또 천주를 위하여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 향주삼덕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향주삼덕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이 삼덕을 자주 발하며 특별히 유혹을 당할 때와 더욱 임종때에 발한는 것입니다.
4.감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다 해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 고마움을 느낄 때 신망애 삼덕은 더욱 증진되고 감사의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풍성하게 한다. 하느님은 은총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드릴 것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완덕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였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 의무요 구원이로소이다”하며 하느님께 최상의 경배를 드리고 있다.
5.겸손
자기의 재능이나 장점이나 덕행을 올바로 알고 이런 좋은 점들을 자비하신 하느님께 무상으로 베풀어주신 선물임을 인정하는 겸손은 즐겨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수덕의 기본 덕성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장점을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과소 평가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그 장점을 기른다.
6.명랑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고 있지만 참 진리이시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고 있기 때문에 명랑하게 살아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비관론자나 염세가가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흘러 넘치는 낙천가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내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7.지덕
매사에 좋고 나쁜 것을 식별하여 피할 것은 피하고 행할 것은 행하는 습성이다. 어떤 일을 성급하게 서두른다던가 정상은 살피지 않고 함부로 판단한다던가 의견을 자주 바꾸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지덕이 부족한 것이고, 남을 속이기 위해 술수를 쓴다던가 세상일에 지나치게 걱정한다던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꾀를 부리는 것은 지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알고 사물의 진위와 가치를 바르게 식별할 줄 아는 지덕을 길러야 한다.
8.의덕(義德)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습성이다.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교환 정의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역량에 따라 평등하게 주는 분배 정의와 공익을 위해 사회에 환원해야 할 것을 환원하는 사회 정의가 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을 드려야 하고, 자녀로서 부모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효성을 드려야 하며, 지위나 덕행이나 지혜가 탁월한 사람에게 드려야 할 존경을 드려야 한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밝혀야 할 때에는 밝히고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책벌 할 때에는 책벌해야 하고, 자기가 잘못했을 때에는 사과하고 뉘우쳐야 한다.
9.용덕(勇德)
마땅히 행해야 할 좋은 일이면 비록 어렵고 괴로움이 따르리라고 예측되지만 그 일을 시작하는 굳센 습성이다. 어떤 한 일이나 사건, 상황 앞에서 지나치게 무서워해서도 안되고 함부러 덤벼 만용을 부려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정확한 관찰과 판단 하에 하면 된다는 확신과 항구심을 가지고 인내롭게 행하고 처신하되 자만과 허영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10. 절덕(節德)
사욕을 절제하여 중용을 지키는 습성이다. 지나치게 절제하여 기계처럼 되어서도 안되고 유혹과 욕구를 따라 방종해서도 안된다. 예를 들면 음식은 건강 유지에 알맞게 먹을 것이고, 술은 때와 장소에 따라 마실 것이며, 성의 사용도 부부의 사랑을 증진시킴에 합당해야 한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몸치장이나 생활 양식을 단정히 할 것이고 지나친 호기심을 삼가 할 것이다.
▶ 윤리덕은 무엇입니까?
<답> 윤리덕은 직접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바른 도리에 맞도록 하는 것입니다.
▶ 윤리덕 중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답> 윤리덕 중에 중요한 것은 4추덕이니, 곧 지덕, 의덕, 용덕, 절덕입니다. [지(智) 의(義) 용(勇) 절(節)]
▶ 복음삼덕은 무엇입니까?
<답> 복음 삼덕은 청빈 정결, 순명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의한 것이며, 수도자들이 허원을 하여 닦고 지키는 덕입니다. [청빈(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