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성지순례/2010성지순례

프랑스 성지순례 파리03(파리외방전교회)

월요일은자유인 2009. 8. 18. 07:53

▶파리 외방 전교회

교황청 포교성성이 1658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포교상의 보호권을 분쇄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을 이용하여 선교단체를 창설하고, 주로 아시아 지역에 종신 선교사를 파견한 선교단체.

이 선교단체의 특징은 선교사들이 일정지역에 종신토록 머물면서 그 지역 회장을 임명하여 포교에 활용하고, 그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邦人) 성직자를 양성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것은 1827년 9월 1일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 교우들의 편지를 접한 교황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한국에서는 외국인 입국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선교는 곧 고난과 순교를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타이에서 보좌주교로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선교사를 자원했고,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을 서둘러 만주에 도착했으나 입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제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가 입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배출했다.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이후 조선정부의 지속적인 박해로 제3대 조선대목인 페레올을 비롯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계속 순교했고, 1866년 병인(丙寅)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기해사옥). 그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포교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게 되고 한국 천주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를 분할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주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했고, 이후 원산대목구, 평양·연길·전주·광주 등의 분할을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교계제도를 수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전교회는 현재 가톨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는 신학교를 이미 1885년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 형성했으며, 이로써 한국 성직자를 배출하여 천주교회의 근간을 마련했다.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 각종 서신과 보고서를 통해 한국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세계에 알렸다.

제8대 조선대목 뮈텔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순교자들의 사적을 조사함으로써 1925년 이들을 복자(福者)의 품(品)에 오르게 했다. 이같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전교역사는 곧 한국천주교 형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해 한국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전교회는 조선조의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활동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방인 노기남 주교에게 인계했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에게 인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이 희생당했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는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창립 후 오늘날까지 아시아 지역에 약 4,0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그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 또한 2,000여 명의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했는데 그중 한국인이 1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이곳에는 선교사들과 동양의 성직자, 회장, 평신도들 중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이 잘 보관되어 있다.  그림 중에 19세기 월남에서 있었던 대박해의 장면들은 그 시대의 베트남 미술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들인데, 박해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복자위에 올랐다. 

 진열장 안의 물건들은 치명자들의 것이거나 박해도구로 사용되던 것들이다.  목에 거는 쇠줄, 목칼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 그림에는 정부관리가 배교의 표시로 십자가를 밟으라고 호령하는 장면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순응했지만 대부분 그것을 거절하고 순교하였다. 

 우리 한국 순교자들의 유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김 대건 신부의 편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1984년 3월 김수환 추기경께 양도, 현재 한국에 보관 중임)도 있다.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들에게, 어떻게 입국해야 되는가 하는 방법을 알리는 내용이 라틴어 친필도 있고, 1839년 가해 박해 상황을 라틴어로 쓰시고 박해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린 복사필도 볼 수 있으며 베르뇌(Bemeux) 장주교 (조선교구 4大 교구장의 기도서, 십자가 중국, 옷, 전례에 사용했던 여러 성물들,

 그밖에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몇가지 유품들 이들중 장 주교의 성합, 오매트로 신부의 제병 굽는 기계와 회중시계, 브레트니에르 신부의 십자 고상, 그리고 도리/위앵/볼례/브레트리에르 신부등 1865년 한국에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들의 기념 사진등 5점은 1984년 한국에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들의 기념 사진등 5점은 1984. 5. 18 에 한국에 기증됨) 과 1981년 10월18일에 거행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여의도 신앙대회 사진도 있다.

 특히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의 석별의 정을 담은 그림 앞에서 가슴 뭉클함을 진하게 느낀다.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의 뒷 정원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그 당시 신학생들이 선배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떼 데움(Te Deum 감사가)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파리 외방 전교회

 파리 외방 전교회는 선교사를 아시아의 반그리스도 교국에 파견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지방 성직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1658년에 창설되었고 학교가 세워졌고, 오늘날까지 이 신학교에서 아시아로 4천명 이상의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현재도 이들 파리 회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동남아는 물론 우리 한국의 서울, 안동, 대전을 비롯한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24명)

 우리는 지난 1981년 10월 18일 서울 여의도 광자에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대회가 열렸다.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이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선조들은 북경의 주교님을 통해 멀리 로마 교황청에 선교사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띄웠다.  (1811년과 1827년 두 차례) 이런 사명을 띄고 성인 정하상(바울로)은 북경을 10여차례나 왕래했다니…이 편지를 받은 교황님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도와줄 수 없음을 못내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서 한국 선교를 맡아 달라는 교황청의 의견에 “돈도 없고, 조선에는 입국 하기가 힘들고, 다른 곳에 더 급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회람 소식에 접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일워이며 당시 샴 (Siam) 교구의 부주교로 방콕에서 포교에 종사하던 브뤼기에르 (Brugiere)주교는 그런 이유로 복음의 사자요 목자된 자가 물러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목자없이 박해 속에 버려진 양떼인 조신의 교우들을 생각할 때에 이는 살기위해 젖이 필요한 갓난 아기에게 어미가 젖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자원하는 편지를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와 교황청의 포교성에 띄우니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조선교구를 창성케 하는 결정적인 동기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1831년 9월 9일,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14세 (Gregoius, 1831-1846년) 조선교구 설정과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초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같이 조선교구의 설정은 우리 순교 선연들의 순교 정신과 아울러 소 주교의 목자로서의 사랑의 피흘림에서 설립 탄생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와 우리 한국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내용1658년 7월 29일 창설되고, 1831년 9월 한국에 처음 진출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 은 물론 교회를 통하여 한국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선교단체이다.1. 창립과 창립정신:17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세계를 통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 였고, 아울려 종교적으로 로마와의 계약, 이른바 포교상의 `보호권'에 의하여 복음전파활동에 잇 어서도 상당한 우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황청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이러한 종교상의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布敎熱)을 이용하여 1658년 선교단체의 설립은 문론,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L. la Motte) 두 신부를 주교[大牧]로 임명한 뒤 그들을 샴(오늘의 태국)으로 파견하였다. 1664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교구사제뿐만 아니라 선교사제 희망자를 모든 교구로부터 모집하여 성직자로 양성한 후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이 신학교의 설립은 포교사(布敎史)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포교지역에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활동을 하 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통역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각 지역에 회장(會長)을 임명하여 포교활동을 하고, 회 장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성직자(邦人聖職者)를 양성하게 된다. 결국 파리 외방전교회는 파견된 지역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현지인(現地人)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창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 4,00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170명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편 본회는 약 2,000여명의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한국인은 1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오랜 역사 동안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민족들과 함께 그 나라 역사에 참여를 했으며 선교사 17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 최근 50년 동안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 과 만주에서 추방되었고(1949∼1953), 1970년대에는 월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철수해야만 되었다.(1975∼1976)   2. 한국진출: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 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망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Brugui re,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大牧)으로 임염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 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 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 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 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 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남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때까지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micolaas, 朴), 푸르티에(Pourthe , 申), 페롱(F ron, 權), 블르트니에르(Breteni 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1887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생명은 보장되었고, 포교활동에 있어서도 그 전보다는 훨씬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1911년에는 대구 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할 선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즈(Demange, 安)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하였다.

이밖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정착할 수 있도록 원산(元山)대목구, 평양·연길·의란·전주·광주지목구(知牧區) 등을 분할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 교계제도가 수립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여 1910년 61명의 성직자 중 15명이 한국인이었는데 1920년에는 총 71명 중 30명이 한국인이었다. 1961년에는 총 516명 중 275명이 한국인이었다.3. 한국 내에서의 주요 활동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 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 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가톨릭 대학 신학부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1914년 대구교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근간을 이루게 하였다.

신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참여하여 1922년 `남대문상업학교'를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이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소신학교를 춘영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동성중고등학교로서 존속하 고 있다. 한편 박해시대 때 회장과 공소(公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본 신심서적(信心書籍)들을 저술해 냈다. 즉 1864년대에는 ≪신명초행≫(神命初行), ≪성찰기략≫(省察記略), ≪최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등의 목판본들을 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간행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80년에는 파리외방전교 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불자전≫(韓佛字典)이,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각각 간행되었다.

이들 모두는 한국 최초의 것들로서 한국의 언문(言文)에 있어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있던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를 서울 정동(貞洞)으로 이전함으로써 오늘날의 가톨릭출판사가 있게 되었다. 또 1906년 10월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과 부록 인 <보감>(寶鑑)을 창간하여 구한말 개화운동을 추진하다가 1909년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 >로 제호를 바꾸어 종교잡지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고, 대구교구의 드망즈 구교는 대구에서 <천주교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존속하고 있다. 제8대 조선대목 뮈텔(Mutel, 閔) 주교는 오랜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致命史蹟)을 조가함으로써 1925년 7월 79위의 치명자들이 복자(福者)의 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각종 서신을 통 하여 같은 회의 소속인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 glise de Cor e)를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한군문화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코스트(Coste, 高) 신부는 약현(藥峴)성당(현 중림동 성당)과 종현(鐘峴)성당(현 명동성 당)을 설계 건축함으로써 서양식 고딕식 벽돌건물을 한국에 소개시켰다.

이밖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포교활동 뿐만 아니라 교육활동 및 시약소(施藥所) 운영 등의 의료활동 등도 전개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포함한 한국 전체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4. 현황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활동 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주교에서 인계하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들 에게 인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들이 희생당하였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일부지역이 1959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목구로 설정 되었다가 1969년 안동지목구가 대구 대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안동교구로 승격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23명의 회원들이 서 울·대전·안동·인천·대구·광주(대건 신학대학) 등 6개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자체적인 주요 사업은 계획하고 있지 않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지부의 본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소재하고 있으며 지부장에 펠리스 (Rev. Marcel P lisse, 배) 신부가 임명되어 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빛나는 성인들

 성 앵베르(Imbert, 라우렌시오, 1796-1839년)

 성 모방 (Maubant, 베드로, 1804-1839년)

 성 샤스땅(Chastan, 야고보, 1804-1839년)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1814-1866년)

 성 랑페르 드 브레트니에르(Ranfer de Bretenieres, de 유스또, 1838-1866년)

 성 도리 (Dorie, 헨리꼬, 1839-1866년)

 성 볼례 (Beaulieu, 루도비꼬, 1840-1866년)

 성 위앵 (Huin, 루가, 1836-1866년)

 성 오매뜨르 (Aumaitre, 베드로, 1837-18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