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자 교리 제 26과 : 그리스도교의 덕행론(德行論)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제 26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잘 살고자 하는 선한 욕구가 있으며, 삶의 현장(現場)인 공동체안에는 이러한 욕구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규범들이 있다. 이 규범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성격이나 모습들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두가 사람답게 골고루 잘 살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러한 인간 공통의 윤리 규범 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규범들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규범들은 구약의 십계명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이 계명들을 실현하는 근본 정신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마태22,36)라는 질문을 받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두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참고 신명 6,5; 레위 19,18)라고 하셨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다.”(로마 13,9-10)라고 구체적으로 해석하여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규범의 바탕이되는 십계명은 이처럼 이중적이면서도 하나이고 율법의 극치인 사랑의 계명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을 사랑하고 의로운 행실로 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불렸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을 자신의 이웃으로 대하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이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아"라는 계명이 있고또 그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다”(로마 13,8-10).
1.인간의 양심
인간이 동물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양심 때문이다. 이 양심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본분을 충실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이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게 하는 실천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 간 본성에 박혀진 창조주의 율법이기 때문에 인간이 마음대로 바꾸어 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신앙인도 궁극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하는 인간의 길을 일러주시기 위해서 그 윤리 도덕의 규범으로 십계명을 주셨다.
2. 십계명(十誡命)의 유래
1)유래 : 구약의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군중을 거느리고 가나안이란 땅으로 돌아오면서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이 십계명은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윤리 도덕이므로 더욱 가치가 있고 그 내용이 풍부한다.
십계명은 참다운 인간 생활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이루어진다는 종교적 윤리 원칙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친교의 생활을 하라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으로써 십계명을 완성시키셨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 주신 참다운 삶의 길이다. 이를 실천함으로써 사람은 참다운 자기를 실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계명은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드러내 줄 뿐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이 본성적으로 타고난 기본 권리들까지 밝혀 준다. 또한 십계명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규범 제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자연법'의 뼈대까지도 나타내 주고 있다.
십계명은 출애 20,2-17과 신명 57,6-21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 약성서의 이 십계명을 더욱 간단하고 명료하게 다듬어서 '교리문답의 십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다.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교리문답에서 가르치는 십계명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출애굽기의 십계명(20,2-17) |
현대 교회에서의 십계명 |
1.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
1.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 |
2.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
2.천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
3.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
3.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
4.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
4.부모에게 효도하라 |
5. 살인하지 못한다. |
5.사람을 죽이지말라 |
6. 간음하지 못한다. |
6.간음하지 말라. |
7.도둑질하지 못한다. |
7.도둑질하지 말라. |
8.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을 못한다. |
8.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
9.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
10.이웃의소유는무엇이든지 탐내지못한다. |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
십계명의 핵심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것이고, 다른 일곱 계명은 이웃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십계명은 조목마다 외따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각 조목은 다른 조목들과, 그리고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된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한 사람은 결국 계명을 어긴 자가 되고 맙니다”(야고2,10-11)
3. 십계명(十誡命)
1)첫째 계명 :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 하라.
하느님을 최대로 공경하고 최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행복의 원천이고 사랑의 원천이며 우리 최후의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이외의 다른 잡신에 대한 믿음을 미신이라고 하며 모든 미신은 우리의 신앙에 용납될 수 없다. 미신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불신 배교 행위와도 같은 것이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첫째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하느님 모상대로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자신을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며 찬미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만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으므로 인간은 하느님과 결합할 때 완성될 수 있다. 그 밖의 것들은 우리의 삶에 아무리 가치 있고 중요하다 해도 결국 2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온통 몸과 마음을 빼앗긴 채, 마치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인 양 살고 있다. 인간이 흔히 빠지기 쉬운 돈, 권력, 명예 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그 자체로는 모두 필요하고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인간은 눈이 멀게 되고, 그것들을 만들어 주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느님 아닌 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우리가 그것을 섬길 때 곧 우상 숭배를 하는 것이다. 미신, 마술, 신령주의 등이 드러난 우상이라면 금전에 대한 지나친 애착, 물질에 대한 소유욕, 명애욕, 오만, 불손 등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더 무서운 우상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점괘나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부적 등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하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때문에 자신을 송두리째 타락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불경죄를 범할 수 없다. 나아가 하느님과 관련된 사람, 장소, 물건들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흐리게 하는 무신론자, 또 하느님을 왜곡시켜 말하고 가르치는 거짓 종교나 교리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그런 이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 교회 용어로 보면 하느님께 최상의 공경 즉 흠숭지례라 하고 마리아에 대한 것은 상경지례라 하고 성인들에 대한 것은 공경지례라 한다. 이렇게 하느님과 마리아와 성인들께 대한 공경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라 할 때에 부모에 대한 사랑이 다르고 이웃집 할아버지에게 대한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드릴 때 보면 그 공경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직접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를 바치나, 성모마리아나 성인들에게는 의례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뜻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마리아도 성인들과 우리와 같이 사람이니까 하느님과 같이 절대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당이나 천주교 신자 가정에 가면 물론 성화를 그려 놓고 또는 동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서 기도를 하고 하는 데 외인들은 이것을 우상 숭배라고 하나 이는 국민들이 국가의 경축일 기념식에서 국기를 보고 경례를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기에 경례함은 국가를 사랑한다는 뜻인 것과 같이 성화나 동상 공경은 그것이 표시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이다. 예건데 성모상에 대한 존경은 그 상이 표현하는 성모님께 대한 존경을 말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성상이나 성화는 성인 성녀를 공경하는 방법도 되지만 또 하나는 시청각적인 종교교육의 뜻이 있다. 우리가 십자가 형틀을 눈으로 봄으로써 더욱 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도 있다.
명하심 : 우주를 창조하신 주재자 하느님을 주님으로 알아 흠숭지례로 그분에게는 최대의 경신 행위와
최고의 공경을 바치라.
금하심 :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바치지 말라. 하느님께 대한 신덕, 망덕, 애덕을 거스르는
모든 죄를 금한다.
신덕을 거스림 : 고의적인 무신앙이나 미신(우상 숭배, 마술, 마법, 신강술,굿, 점, 관상, 토정비결 등) 또는
축성된 거룩한 것을 매매하는 행위, 하느님의 지혜, 모든 신앙을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신앙을 해치는 독서를 즐기며, 신앙을 업신여기는 행위
망덕을 거스림 : 하느님의 약속에 대하여 신뢰치 않음,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미루어 의탁하기만 하고 자기의
할 본분을 소홀히 함.
애덕을 거스림 :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거나 갖가지 죄를 범하는 행위
성화(聖畵), 성상(聖像)에 대한 존경 : 예수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여러 성인의 성화나 성상을 존경함은 우리가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을 더욱 공경하게 하고 그들을 본받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불타게 해주는 것이지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경조사(慶弔事) : 가톨릭 신자는 다른 종교 예식에 참여하거나 종교단체에 금품을 바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다만 가족이나 사회의 예의로써 다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즉 습관에 따라서 결혼,
장례 등의 예식에 친족, 친구 또는 시민으로써 참여하여 헌화나 분향을 하거나, 종교적 의무를 떠나서 금품을 기부함은 괜찮다.
▶ 구원받기 위해서 교리를 믿기만 하면 넉넉합니까?
<답> 구원받기 위해서 교리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반드시 천주의 십계명과 천주교회의 모든 법규를 잘 지키고 덕을 닦으며 죄를 피해야 합니다.
▶ 천주께서 내리신 십계명은 무엇입니까?
<답> 천주께서 내리신 십계명은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반포하신 열 가지 계명입니다.
▶ 제 1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1 계에 명하시는 것은 흠숭지례로 천주를 만유(萬有)위에 공경하여 높임입니다.
▶ 제 1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1 계에 금하시는 것은 천주께만 드려야 할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게 되는 경우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 천주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드리게 되는 경우는 바로 온갖 미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와 잡신을 섬기거나 마술과 마법을 쓰거나 헛 징험으로 길흉을 믿는 것입니다.
▶ 성모 마리아나 성인성녀들, 혹은 그 성해(聖骸)를 공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답> 성모 마리아나 성인성녀들, 혹은 그 성해를 공경함은 올바른 일입니다. 이것은 천주께만 드리는 흠숭지례(欽崇之禮)와 크게 다른 것으로 성모 마리아께는 상경지례(上敬之禮)를 드리고 성인성녀들과 그 거룩한 유해에는 공경지례(恭敬之禮)를 드려, 그 전달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 십자가나 거룩한 석상 같은 것을 공경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답> 십자가나 거룩한 석상 같은 것을 공경하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이러한 공경은 그 물건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표상하는 자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2)둘째 계명 : 천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둘째 계명은, 내가 하느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어떠한 마음 자세로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준다. 하느님의 이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지극히 성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우리 겨레는 아버지, 할아버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아름답고 좋은 풍습을 지니고 있다. 이분들은 우리가 항상 존경하고 겸손된 태도로 받들어야 할 분들이기 때문에 이분들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적인 인연으로 존경하는 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스럽고 외경스러운 분이다.
이른바 신성 모독은 둘째 계명을 직접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나 말로써 하느님을 증오하고 비난하거나 반항(멸시, 도전)하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며, 그분께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등이다(참조: 교회법, 제1369조). 사도 야고보가 불의한 행실로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이들을 비난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야고2,7)라고 했듯이, 인간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녀야 함은 물론이고 말로써도 이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나아가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의 이름을 어떤 경우에도 무례하게 불러서는 안된다. 그분들은 신앙의 길잡이이며 삶의 참된 스승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인들, 거룩한 물건들을 거스르는 모든 말은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죄가 되는 행위를 감추고, 백성을 노예로 만들며, 고문이나 살인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도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남용하면 많은 선량한 미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게 되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거짓 맹세를 금한다. 하느님을 위해, 그분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 곧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다. "너회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신명 6,13).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존경스럽게 불러야 하고 하느님과 약속한 바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 동양 사상에서도 어른의 이름을 함부러 부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윗사람에게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절대적인 존재라면, 그 이름도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어떤 좋은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실천해야 하며 이것을 이행치 않는 것은 실례가 되는 것이다.
명하심 :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정성 되이 부름과 맹세와 허원을 지킬 것을 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한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의를 갖추어 기구의 형식으로만 하느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금하심 :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이나 성인들 또는 거룩한 것에 대해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거나 멸시하여 말함. 또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남에게 재앙이 닥치기를 비는 것, 불의 한 일, 헛된 일, 악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것.
▶제 2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2 계에 명하시는 것은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정성되이 부르며, 맹서와 허원을 지키는 것입니다.
▶ 맹서는 무엇입니까?
<답> 맹서는 전지하신 천주를 사실의 증거자로 부름입니다.
▶ 허원은 무엇입니까?
<답> 허원은 어떤 선행을 하기로 천주께 약속하는 것으로, 실행치 않으면 죄가 되는 줄 알면서 하는 것입니다.
▶ 제 2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2 계에 금하시는 것은 상당한 연고 없는 맹서와 거짓 맹서와 욕함과 저주입니다.
3)셋째 계명 :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 쉬셨다는 성서의 내용에 따라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쉬신 날 안식일(토요일)을 거룩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이었고 성신 강림 축일이 또 일요일이었기에 부활이 신앙의 핵심이 된 이 시대에는 예수 부활을 상징하는 일요일을 제자들이 주님의 날로 제정했다. 그래서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일요일을 휴일로 지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날은 주일 즉 주님의 날로 정해 놓고 거룩하게 지내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요일 미사에 참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미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주님의 날(主日)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지내는 그리스도의 빠스카 기념 잔치요,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의 하느님께 대한 공동 예배이며 감사제이다.
1)안식일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일깨워 준다.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출애 31,15).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출애 20,8-10;참고 신명 5,12-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에 대해서 성서는 창조를 상기시킨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 20,11).
하느님은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의 표로 간직하라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다(참조 출애 31,16).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그분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해 주신 구원 행적을 기리기 위해 따로 거룩하게 남겨 둔, 주님을 위한 날이다.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 행동의 모범이다. 하느님께서 이렛날 "쉬며 숨을 돌렸으니”(출애 31,17)인간도 역시 '쉬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도 "숨을 돌리게”(출애23,12)해 주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일상의 일을 멍추고 쉬는 날이다. 이 날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날이다(참고 느헤 13,15-22; 2역대 36,21).
2)하느님의 날
(1)부활의 날: 새로운 창조
예수님은 '주간의 첫날‘(참고 마태 28,1; 마르 16,2; 루가24,1; 요한20,1)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첫째 날'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첫 창조를 상기시킨다.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참조: 마르 16,1; 마태 28,1)인 이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주일'이 되었다.
“우리는 해의 날(일요일)에 모두 함께 모인다. 이 날은 하느님께서 암흑에서 물질을 끌어내시어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유대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이면서 또한 주간의 첫째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며, 또 이 날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디다.”
(2)주일 : 안식일의 완성
주일은 매주 시간적으로 앞에 있는 안식일과 분명히 구별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 의식에 관한 규정을 대체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빠스카를 통해서, 유다인 들의 안식일의 영적인 참 의미를 완성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고한다. 율법에 따른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니, 율법을 따라서 행해지던 것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것들을 예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참고 1고린10,11)
주일을 지킴 :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과중한 노동을 피함으로써 단순한 휴식일로써가 아니라 바른 정신으로 주를 섬기며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한 날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1)우리는 주일을 보다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육체적 노동을 피하고 진정한 휴식관 신심의 휴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생계 유지나 공익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는 가능한 한 거룩한 몸가짐으로 노동의 참가치를 주님의 뜻 안에서만 발견하기로 노력해야 한다.
2)토요일 특전 미사에 관해 :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교회는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이들에게 주일 의 본분을 다른 날에 이행할 수 있도록 특전을 베풀고 잇다. 그러므로 안이함과 편이함을 생각해서 이 특전을 사용한다면 주의 의무를 다른 날로 채운다는 경건한 마음과 태도가 결여된 그릇된 행위라 하겠다.
(3)주일의 성찬식
주님의 날을 경축하고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사도 전승에 따라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경축하는 주일은 보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지켜져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 주의 공현 대축일, 주의 승천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과 성모 승천 대축일, 성 요셉 대축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날 대축일도 지켜져야 한다.
▶ 제 3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3 계에 명하시는 것은 천주께 공식 기도와 예절을 바치고, 육신의 일을 피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입니다.
▶ 천주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천주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지키는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께 받은 권으로 그 렇게 정한 것으로, 신약을 구약과 구별하고 또 신약서에 새 교회의 기원이 되는 예수 부활과 성령강림이 일요일에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4)넷째 계명 : 부모에게 효도하라.
첫째, 둘째, 셋째 계명은 우리가 하느님께 해야 할 계명이었고 이제 네 째 계명부터 마지막까지는 사람들끼리 서로 지켜야 할 계명이다. 특히 우리 동양 사상의 삼강오륜 사상이 넷째 계명에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동양의 윤리는 한가지 큰 결함이 있다. 즉 삼강에서 보면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가르치는데 여기서 공통적인 결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야 할 것은 말했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윤리 문제는 한마디도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있어서 신하는 무조건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요구하지만 임금이 신하의 관계에 있어서 신하는 무조건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요구하지만, 임금이 신하에게 해야 하는 윤리는 없고 또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있어서도 자식은 무조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윤리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리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여자가 무조건 남자를 섬겨야 한다. 여자는 소위 삼종 지도니 칠거지악이니 해서 조금만 잘못하면 쫓겨나는 판인데 남자는 외도를 해도 관계없고 첩을 두셋씩 두어도 관계가 없는 이런 윤리 때문에 우리 한국의 자녀들과 여인들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계약은 가정에도 반영되는데, 넷째 계명은 자녀들과 부모관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부모 자식 사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관계로 모든 인간 관계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자기를 낳고 길러 주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하는 자녀들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에게 존경과 순종과 예의와 감사를 드려야 한다. 나아가 이 계명은 혈족과 인척까지 연장되어 부모뿐 아니라, 조상들과 친인척 어른들에게 존경과 애정과 감사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또한 형제 자매들도 서로 인내와 존경과 친절로 대함으로써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계명의 범위를 더 넓히면 스승에 대한 제자의 의무, 고용주에 대한 고용인의 의무, 지도자들에 대한 아랫사람의 의무, 자기네 고장과 그 고장의 행정가나 위정자들에 대한 시민의 의무까지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의무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갖는 의무로 좁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부모 또한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자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제자들이 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애정으로 지도하고 고용주는 진정한 인간애로 피고용인들의 생계와 복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자녀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일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이다. 그 약속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고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것이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만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느님의 듯을 실천하십시오.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종이든 종이 아니든 각기 주님께로부터 그만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주인된 사람들도 자기 종들에게 같은 정신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종들을 협박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나 여러분에게 주인이 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며 또 그분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1-3)
넷째 계명에서 규정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보면 부모는 자녀들을 낳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특별히 종교교육에 힘써야 하며 좋은 표양과 말로써 올바로 교육해야 할 중대한 임무가 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해야 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가정은 참다운 인간이 형성되는 학교와도 같다. 그러나 가정이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서로 화목하고 마음의 정을 나누며 자녀 교육에 다같이 의논하고 성심껏 협력해야 한다.”
부부의 도리를 보면 부부는 하느님 앞에 서약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이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무시한다든지 자기의 소유물처럼 다룰 수 없고 인생 여정에 가장 가까운 반려자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아내는 가장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며 지님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안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에페소5,33)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스승은 학생의 부모들로부터 교육의 일부를 위임받고 사명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좋은 표양으로 인격교육을 해야 하며 가르치는 과목에 태만해서는 안되며 학생들을 무리하게 또는 감정적으로 학대해서도 안된다. 학생들은 스승을 존경하며 순종해야 하며 스승을 조롱한다든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윤리 관계를 보면,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야 하며 정당한 일을 정당하게 시켜야 한다. 그리고 정당한 임금을 제때에 주어 그들의 생활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용인은 고용주를 존경하고 그의 정당한 지시에 따라 주어진 일에 성실하며 고용주에게 어떤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보면 국가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국가의 권리를 주관하는 사람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인권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또한 국민은 국가에 해야 할 교육, 납세, 국방의 의무에 성실해야 하며 국권에 순종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와의 관계에서, 교회의 존재이유는 인류 구원이란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기에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교직자들은 최선의 노력으로 양떼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는데 노력해야 하며 신도들은 교회 사업으로 적극 참여해야 하며 특별히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 제 4 계에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4 계에 명하시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할 본분입니다.
▶ 자녀가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은 효도하여 순종하고, 부모의 영혼과 육신에 관한 모든 긴요한 일을 정성껏 보살펴 드리는 것입니다.
▶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특히 종교와 덕행에 관한 교육을 시키며, 진실히 사랑하고 앞날을 잘 주선하여 주는 것입니다.
▶ 직공과 회사원이 해야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직공과 회사원이 해야 할 본분은 근면하고 절약하며 자기 자신의 가정일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 공장주인이나 기업가들이 직공이나 회사원에게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공장주인이나 기업가들이 직공이나 회사원에게 할 본분은 그들의 작업환경을 위생적으로 완비하여 주고, 생활에 충분한 임금을 제 때에 주며, 자기 아들이나 동생처럼, 즉 가족처럼 여기고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국가의 책임을 맡은 이들을 존경하고, 정당한 국법을 준수하며, 타당한 세금을 성실히 바치는 것입니다.
▶ 신자들이 교회에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답> 신자들이 교회에 할 본분은 교회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기울이고, 특히 성직자를 존경하고 그 생활을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5)다섯째 계명 : 사람을 죽이지 말라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윤리 계명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이 말씀에 따라 자기가 남의 생명을 살해할 수 없고 자기나 남의 육신을 손상하여 해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죄가 없고 올바른 사람을 죽이지 말라.”(출애 23,7)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살인을 금지하는 법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에 대해 교회는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성 초기부터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특별한 관계를 영원히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을 직접 파괴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다섯째 계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신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도록 노력하게 한다. 인간은 먼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의 육신을 돌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적당한 음식을 먹고,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가지며, 해로운 물체나 위험한 운동 등은 피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의 생명, 특히 죄없는 어린 생명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사랑을 쏟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면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구체적으로 이 계명과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하나 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다섯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자살 : 어떤 모양으로든지 직접 자살 행위는 중죄이다. 우리의 생명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에 그 분의 뜻을 함부로 거르셔 자기의 생명을 처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공익을 위해서 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 순교 행위는 자살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생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명의 최고 주권자는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보존할 의무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그런데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원히 잇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어긋나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에도 크게 벗어나는 행위이다.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도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가정, 국가, 인류 사회와 갖는 연대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난다.
2)지체 절단 : 아무런 이유 없이 지체를 절단할 수는 없다. 지체도 생명과 같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 만큼 우리는 그 주인이 아니고 보관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의 진단에 따라 썩어 간 팔다리를 같은 것을 자는 것은 죄가 아니다.
3)불의한 침략자의 살해: 불의 하게 나를 해치려고 덤비는 사람들을 원칙적으로는 죽일 수 없다. 더구나 집안에 들어오는 도둑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침략자가 틀림없이 나를 죽이려 하고 나는 도무지 그 환경에서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자신의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정당방위로 침략자를 죽일 수는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도덕성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살인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으로 폭력을 물리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정당 방위를 단념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다른 이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돌볼 의무가 더 크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친다
4)낙태: 이것은 무죄한 자에 대한 살해 행위이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말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어린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 낙태는 뱃속에 들은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중죄에 해당된다. 부모가 낙태하는 것은 무죄한 자식의 생명 이는 가혹한 죄이다.
성서에서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고 했듯이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교회는 1세기부터 모든 인위적인 낙태를 도덕적인 악으로 단정하였다. 사회의 많은 가치관들이 변해 온 것과는 달리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아직도 불변하는 교회의 중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생계 때문이든 대를 잇기 위한다는 남아 선호 때문이든 목적이나 수단으로 하는 직접 낙태는 살인 행위로 도덕률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5)인공 피임 : 교회는 부부 관계의 의미가 생명 전수라는 면에서 인공 피임을 반대한다. 또한 생명 전수라는 성교의 본래 의미를 망각한 어떤 방법의 가족 계획도 용납하지 않는다. 가족 계획을 위한 불임 수술과 인공 피임은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교회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6)안락사 : 그리스도인은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불치의 병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특별히 존중해야 한다. 또한 난치병이나 신체적인 불구 때문에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을 가능한 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치병으로 도저히 아픔을 감당할 수 없다거나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는 심한 기형, 불구라는 이유로 안락사를 시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살아 계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존중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 나아가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거나 위험하고,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방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 기구의 사용을 중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 경우는 소위 '필사적인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가 자격과 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법적 보호자들이 결정해야 하는데, 항상 환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
7)무절제한 생활 :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식사, 술, 담배, 약물의 남용 등 온갖 형태의 무절제를 피해야 한다. 술에 취했거나 속도에 대한 무절제한 취미 때문에 도로, 바다. 하늘에서 다른 이와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들은 중죄를 짓는 것이다.
마약은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그러므로 치료를 위한 처방에 의한 것 외에 마약을 사용할 때는 중죄를 짓는 것이다. 마약의 밀조와 판매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도덕률을 심각하게 어기는 행위를 교사(敎唆)하기 때문에, 마약의 밀조와 판매는 범죄에 직접 협력하는 것이다.
8)평화의 보호 : 그리스도인은 "살인하지 말라.”(마태 5,21)는 계명을 생각하며 살의를 품은 분노와 증오를 경계해야 한다.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만일 분노 때문에 이웃을 죽이거나 이웃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기를 원하게 된다면 사랑을 크게 어기는 것이므로 사죄(死罪)에 해당된다 예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마태 5,22)고 하셨다.
(9)전쟁 방지 : 교회는 모든 전쟁이 초래하는 불행과 불의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끊이지 않는 전쟁의 예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도록 모든 이들이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간곡히 촉구한다. 또한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을 그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전멸시키려는 전쟁 행위는 모두 다 하느님과 인류 자체를 거역하는 범죄이므로 단호히 단죄하기를 주저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전의 위험은 과학 무기, 특히 원자 무기, 생물학 무기, 화학 무기의 보유자들에게 이러한 범죄 행위를 저지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기를 비축하는 것이 가상의 적(敵)에게 전쟁을 단념하게 하는 필요악 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유효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 항상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드는 엄청난 재원 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으며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 더구나 과잉 군비는 분규의 원인들을 증가시키고, 분규가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
생명과 신체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값진 재산이기 때문에 다른 이의 필요와 공동선을 참작하면서 이 재산을 분별 있게 돌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는 이들을 자라고 성숙하게 해 주는 생활 여건인 음식과 옷, 주거, 보건, 기초 교육, 직업, 사회 복지 등 사회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 제 5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5 계에 금하시는 것은 살인 뿐 아니라,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남이나 혹은 자신의 영혼 육신을 해하는 일입니다.
6)여섯째계명: 간음하지 말라
예수께서는 창조된 만물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순수성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엄격하게 해석하신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 5,27-28). 교회는 전통적으로 여섯째 계명을 인간의 성 전체에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구약에서 자주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 비유되는 계약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혼인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불 충실은 사랑의 계약에 어울리지 않는다. 결혼에서 간통은 불충실의 가장 큰 범죄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계명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주셨던 생식 능력을 지켜 나가야 할 사명도 받았다. 성적인 결합은 하느님이 하신 창조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이용만 하거나 이기적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행동들은 하느님의 자녀 자격을 스스로 내팽개쳐 버리는 행위이다.
(1)정결의 소명
여섯 번째 계명이 결단하는 덕성은 '정결'이다. 이 덕성은 사랑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키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존경해야 할 자세(姿勢)이다. 인간이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세계에 속해 있음을 표현하는 성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 줄 때에 비로소 인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정결은 자제력을 키울 때 지닐 수 있다. 이 훈련은 인간의 자유를 배우는 교육이다. 인간이 욕정을 지배하여 평화를 얻느냐, 아니면 그 욕정에 자신을 맡겨 불행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참고 집회1,22). 교회는 "인간은, 그 품위에 적합하게, 의식적 자유 선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즉 맹목적 본능이나 순 외적 강박에 의하지 않고 인격적인 패적 동기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욕의 온갖 압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유효 적절한 수단을 슬기롭게 마련할 때 인간은 이런 품위에 도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성은 자녀의 출산뿐 아니라 부부애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혼인 생활에서 부부의 육체관계는 정신적 일치의 표징과 보증이 된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인 유대는 성사를 통해 거룩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성서 말씀 한 구절을 들어보자.
토비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시오. 우리 주님께 기도드리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함께 기도를 드리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기 시작하였다. 토비아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 조상의 하느님, 찬양을 받으소서,,,. 주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를 돕고 받들어 줄 아내로서 하와도 창조하셨다. 그 둘에게서 인종이 퍼졌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닳은 짝을 만들어 그를 돕게 하자'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이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은 음욕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참되게 이루기 위해서이다. 나와 내 아내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늙도록 함께 살게 해 주소서." 그들은 소리를 합하여 "아멘"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그 밤을 지내기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토비 8,4-8).
그럼으로 교회는 "오로지 부부에게만 허용된 특유한 행위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성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성과 관련된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기로 하는 그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이다.”라고 가르친다.
(2) 이혼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강조하시며(참고 마태 5,31-32; 19,3-9; 마르10,9; 루가16,18; 1고린7,10-11), 당시 옛 율법 속으로 들어와 있던 이혼의 관행을 폐기하셨다(참고 마태 19,7-9). 이혼은 부부가 죽을 때까지 서로 함께 살기로 자유로이 합의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으로 자연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다. 이혼은 성사에 의한 혼인이 표징이 되는 구원의 계약을 거스른다 교회는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들사이에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은 사망 이외에는 어떠한 인간 권력이나 어떠한 이유로도 해소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혼을 하고 새로 혼인하는 것은 비록 민법이 인정하더라도 혼인을 통해 드러나는 구원 계약 파기의 심각성을 증대시킨다. 이 때 재혼한 배우자는 공공연히 계속해서 간음을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혼인 유대를 유지하는 상태의 별거는 경우에 따라서 합법적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민법상의 이혼만이 정당한 권리들과 자녀 양육이나 또는 상속 재산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된다면 도덕적딘 죄가 성립되지 않고 허용될 수 있다.
(3)동 거
오늘날 서로 혼인할 뜻이 있을 때 이에 대해 "실험해 볼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의 결심이 아무리 단호하더라도 "너무 이른 성관계는 남녀 인간 관계에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장해 줄 수 없으며, 특히 엉뚱한 행동과 일시적 기분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육체적 결합은 남녀 사이에 결정적인 생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 된다. 인간의 사랑은 '실험'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가 결정적이고 전적으로 자신을 내 줄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그들의 가치관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볼 때 남편과 아내의 성적 결합은 영예로운 것이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그 순결한 사랑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면과 마찬가지로 성의 사용도 창조적일 수도 있고 파괴적일 수도 있다. 오직 혼인에 의한 성적 결합만이 도덕적이며 선한 것이다. 혼외 정사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혼전 성교, 혼외 성교, 매춘, 동성 연애, 강간이나 자위 등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정숙한 행동과 말씨와 옷차림에서 겸양을 길러야 한다. 음란한 욕망과 유혹을 물리치며, 온갖 외설 오락물과 음란한 춘화(春畵) 등을 멀리해야 한다. 나아가 성에 대해 진정한 존경심을 가지는 사회적 법적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할 때 참다운 정결덕을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 제 6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6 계에 금하시는 것은 간음과 사음뿐 아니라 온갖 부정한 행실과 그 위험한 기회까지입니다.
(7)일곱째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불의 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지 못하고 도둑질하지 못한다.
①불의 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지 못하고
②남에게 어떤 형태로든 손해를 끼칠 수 없고
③물건을 빼앗고 손해를 끼치는 일에 직접, 간접으로 협력할 수 없고
④자기 재산을 함부로 낭비하지 못한다
도둑질이란 남의 물건을 불의 하게 주인의 뜻을 거슬러 가지는 행위를 말한다. 예컨대, 남의 주머니나 보따리에서 금품을 끌어내는 것, 남의 전답에서 곡물을 훔쳐내는 것, 남을 사기하여 불의 하게 남의 돈을 착취하는 것,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가지는 것, 장사꾼들이 헌 물건을 새 물건이라고 속여서 엄청난 값을 받는 것 등이다.
재산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 방법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은 살아가는 방법에 알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수전노가 되어 노부모의 병을 치료하는데 돈을 쓰지 않는다든지 교회 헌금에 지나치게 인색한 것 등은 인색한 죄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자기의 돈이라고 해서 함부로 돈을 낭비하여 사치 허영에 들뜨는 것도 일곱째 계명에 규정하는 죄가 된다.
일곱째 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부당하게 취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웃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정의와 사랑으로 현세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을 관리할 것을 명한다. 더불어 공동선을 위해 재산을 정당하게 쓰는 것과 개인의 소유권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재물을 하느님과 형제의 사랑을 위해 사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1)재산의 보편적 용도와 개인적 소유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땅과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라고 맡기셨으므로 인류는 그것들을 돌보고, 노동을 통해 관리하고, 결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참고 창세 1,26-29). 창조된 모든 재물은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난해지고 폭력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인간 생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땅이 분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보장하고, 각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여, 그 사람이 책임지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교회는 재산 소유에 대해 "누구나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정당하게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 곧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할 수 있도록 사용하라는 뜻이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재산에서 생기는 이익을 자기의 친척들과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2)인간과 재산에 대한 존중
경제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려면, 현세 재물에 대한 애착을 조절하기 위해 절제의 덕을 닦아야 하고,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서 의덕을 실천해야 하며,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참조 2고린 8,9)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따라 연대 의식을 길러야 한다.
어떤 종류의 도둑질이든 그것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창조의 선물들을 정직하게 얻어야 할 책임이 있다. 훔치는 것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원만한 인간 관계들을 부숴 버린다. 속이는 것과 들치기하는 것 또한 오늘의 사회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고 있는 도둑질의 두 양상이다.
그런데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도 이 계명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필수적인 것(의식주)을 조달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때, 곧 다른 이의 재산을 차지하고 사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는 급박하고 절실한 경우를 말한다.
다른 이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보유하는 일체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민법의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곱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빌려온 재물이나 주운 물건을 고의로 간직하거나, 장사할 때의 속임수(참고 신명 25,13-16), 부당한 품삯을 지불하는 행위(참조: 신명 24,14-15; 야고5,4),다른 이의 무지나 필요를 틈타서 물건값을 올리는 행위(참조: 아모 8,4-6)등이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며, 물가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행하는 투기, 법에 따라 결정해야 할 사람들의 판단을 뎃마가게 하는 매수, 기업의 공유 재산을 가로채서 사적으로 유용 하는 것,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탈세, 수표와 계산서의 위조, 과도한 지출, 낭비 등도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개인 소유물이나 공공 소유물에 대해 고의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행위들은 도덕률에 어긋나기 때문에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한다.
도박이나 내기 자체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이나 이웃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박탈할 때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게 된다. 도박벽(賭博癖)은 그 사람을 도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심각한 위험이 있다. 손해를 입은 사람이 그 손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정하게 내기를 걸거나 노름에서 속임수를 쓰는 행위는 중대한 죄가 된다.
일곱째 계명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인간을 예속시키고, 인격적 존엄성을 무시하며, 인간을 상품처럼 사고 팔거나 교환하게 하는 행위나 계획을 금한다. 폭력을 써서 인간을 이용 가치나 이득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거스르는 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 주인에게 그리스도인 노예를 "이제는 종이 아니라 종보다 나은 이로 곧 사랑스러운 형제로... 주님 안에서”(필레 1,16)대우하도록 명한다.
(3)자연계 전체에 대한 존중
나아가 이 계명은 모든 피조물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등은 본성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류 공동선을 위한 것들이다(참조 창세 1,28-31). 인간은 주주의 광물, 식물, 동물 자원을 이용할 때 도덕적인 요구도 동시에 중시해야 한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무생물과 다른 생물에 대한 지배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배권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이웃에게 쾌적한 생활 환경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배려로 제한을 받는다. 이 지배권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능력들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의 한 양상이다.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지 않는 것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그대로 묶어 두는 셈이기 때문이다.
▶ 제 7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7 계에 금하시는 것은 불의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음과 손해를 끼침과 그러한 일에 협력할 뿐 아니라, 자기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8)여덟째 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
우리의 명예를 보호하는 계명으로 거짓말을 하여 남에게 물질적 또는 정신적인 손해를 끼치는 모든 거짓 증언이라 함은 모욕적인 말, 이간질, 작은 것을 크게 침소 봉대하는 말 등을 뜻한다.
명하심 : 말과 행동을 성실히 하고 남의 명예와 육신과 영혼을 존중하라.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이웃 앞에서도 정직해야 하며 남의 명에를 존중해야 함은 물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남의 모범이 되고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라. 자신의 명예도 존중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금하심 : 거짓말, 위증, 비방, 옳치못한 억측, 또는 말로써 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모든 행위를 금한다. 자만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또는 남의 악담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겸손을 거스리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마태 7,1-2)
여덟째 계명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말한다 이 도덕적 계명은 진실 자체이신 하느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거룩한 백성의 소명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에페 4,24)이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말이나 행실로써 도덕적인 엄정함을 지키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하느님께 대한 크나큰 불성실이고, 계약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악행과 온갖 기만과 위선자 시기, 모든 험담을"(1베드2,1)버려야 한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일체의 태도와 말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니다."(1요한 1,6)라는 성서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모범을 따르고 그분의 진리를 지켜 솔직하게 살아야 한다.
(1)진리를 거스르는 거짓말
거짓말은 진실성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명백한 폭력이 된다. 거짓말은 모든 판단과 결정의 조건인 다른 이의 인식 능력을 해친다 거짓말에는 사회 불의와 그 불의로 야기된 모든 악의 싹이 포함되어 있다. 거짓말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밑에서부터 무너뜨리며 사회 관계의 구조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본질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고의적으로 진실에 어긋나는 말을 해서 이웃을 오류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는 정의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속이려는 의도가 진실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다줄 위험이 있을 때, 그 죄는 더욱 크다.
거짓말의 경중은 왜곡되는 진실의 성격과 상황,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의향과 거짓말의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따라 평가된다. 거짓말 자체는 소죄이지만, 그것이 의덕과 애덕 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는 사죄(死罪)가 된다. 또한 정의와 진실을 거슬러 지은 모든 죄는 범죄자가 용서를 받았더라도 보상할 의무가 있다.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할 수 없다면 피해자가 정신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 보상의 의무는 타인의 명예에 끼친 피해에도 해당된다.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이 보상은 가해진 손해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으로 양심상의 의무이다.
한 사람의 인품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의 정직성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직은 진실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웃 사랑은 때때로 진실을 증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진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복수, 험담, 추문과 거짓말들은 모두 인간의 공동체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계약의 사랑을 깨뜨린다.
명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 증거이며, 인간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에 대한 천부적인 권리를 누리며 존경을 받을 권리를 누린다 그런데 비방과 중상은 이웃의 명성과 명예를 해치며 의덕과 애덕을 모두 손상시키므로 해서는 안 된다. 한편 아부나 지나친 찬사나 아첨을 통해서 다른 이의 악행과 나쁜 품행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어떠한 말이나 태도도 버려야 한다 중대한 악습이나 죄를 방조하는 찬사는 중죄이다. 비록 도와주려는 마음이나 우정 때문이라도 위선적인 말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단지 다른 이의 기분을 좋게 하고, 악을 피하며, 불가피한 일에 대비하고, 정당한 이익을 얻기를 바랄 때 행한 찬사는 소죄가 된다. 자랑이나 허풍은 진실을 거스르는 죄이다. 또 어떤 사람의 행동의 이러저러한 면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헐뜯으려는 빈정거림도 마찬가지이다.
(2)진실의 존중
진실을 전달받을 권리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에서 진실을 요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선익과 안전, 사생활의 존중, 공동선 등은 알려져서는 안 될 것들에 내해 침묵하거나 조심스러운 어법을 구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진실을 알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추문을 알려 주어야 할 의무는 아무에게도 없다.”
화해 성사의 비밀은 신성한 것이므로 어떠한 구실로도 누설할 수 없다. "참회 성사의 비밀은 불가침이다. 따라서 고해 사제는 말로나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참회자를 조금도 발설하여서는 안 된다.”
정치가, 군인, 의사, 법률가 등이 간직하고 있는 직업상의 비밀과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에서 알게 된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는 것이 그 비밀을 맡긴 사람이나 그것을 맡은 사람이나 또는 제삼자에게 매우 중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고, 진실을 누설 함으로써만 손해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예외가 된다. 비록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에서 들은 말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사사로운 정보를 중대하고 합당한 이유 없이 누설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하여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 정보 전달의 책임자들은 공동선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 존중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정치 활동이나 공공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에 언론이 개입하는 일은 그들의 사생활과 자유를 해치는 정도에 따라 비난받아 마땅하다.
(3)대중 전달 수단
현대 사회에서 대중 전달 수단은 정보, 문화의 향상, 교양의 확산 등의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중 매체에 의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으로, 사회는 진실과 자유,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는 '기 권리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보도되는 내용은 언제나 진실해야 하며 정의와 사랑을 지니는 한도 내에서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그 외에 보도 방법에 있어서도 윤리적이라야 하며 합당한 것이라야 한다. 즉 뉴스의 취재나 전달에 있어서 윤리 원칙과 각자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정부 당국에 대해서도 "공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공권력도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정부 당국은 공정하고도 참된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하여 매체를 남용하여 공중 도덕이나 사회 발전에 중대한 위험을 주는 일이 없도록 감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공권력은 명예와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아야 할 각 사람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제재해야 한다. 또한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대중 매체를통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공권력의 이러한 개입으로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언인 순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언은 순교이다. 순교란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순교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일치하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용기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참아 받는다. 그래서 이냐시우스 성인은 "나를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놔두십시오, 나는 짐승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7)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대해 증언할 때 사도 바울로가 재판관들 앞에서 보인 모범을 따라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이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2디모1,8). 이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사도 24,16) 노력해야 한다.
9) 아홉째 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열째 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감각적인 욕구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원하게 된다. 배고플 때 먹기를 원하고, 추울 때 몸을 따뜻하게 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욕망들 자체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이러한 욕망들은 우리로 하여금 합리적인 한도를 넘어서서 자신의 것이 아니고 다른 이의 것이거나 당연히 다른 이에게 주어야 할 것을 부당하게 탐하게 찬다.
열째 계명은 육체의 탐욕에 관한 아홉째 계명과 중복되면서 그것을 보충한다. 이 계명은 일곱째 계명이 금하는 도둑질과 약탈, 사기(詐欺)의 근원인 다른 이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금한다. 사도 성 요만은 탐욕 또는 사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즉 육체의 탐욕, 눈 의 탐욕 그리고 재산을 자랑하는 것이다(참고 1요한 2,16).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아흡째 계명은 육체의 탐욕을 금하고, 열째 계명은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을 금한다고 가르쳐 왔다 . "눈의 탐욕”(참고; 1요한 2,16)은 다섯째 계명으로 금지된 폭력과 불의(참조 미가 2,2)로 이끈다. 탐욕의 삐원은, 배교와 같이, 율법의 처음 세 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우상 숭배에 있다(참조: 지혜 14,12). 열째 계명은 마음속 의향을 대상으로 한다. 이 계명은 아홉째 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요약한다.
(1)아홉째 계명
세례는 세례 받는 사람에게 모든 죄를 정화하는 은총을 준다. 그러나 세례 받은 사람은 육체의 사욕과 부당한 탐욕과 계속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이 싸움에서이길 것이다.
아홉째 계명은 정숙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정숙한 사람들은 부부 관계에서 인내와 절제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정숙한 남자와 여자는 거로 내어 주는 일'과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정숙한 사람은 단정하게 살며 점잖은 옷을 골라 입고 남의 이목을 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불건전한 호기심의 위험이 엿보이는 때에는, 침묵을 지키거나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스도인은 육체만이 아니라 감정도 정숙해야 한다. 감정이 정숙한 사람은 인체에 대한 변태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광고물이나 사생활의 비밀을 지나치게 들추어내려는 대중 매체들의 유혹을 거부할 뿐 아니라, 유행과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다.
▶ 제 9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9 계에 금하시는 것은 온갖 부정하고 음란한 욕망과 원의입니다.
(2)열째 계명
열째 계명은 탐욕과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한다. 또 이 계명은 이웃의 재물에 해를 끼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도 금한다. 그러나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정당한 방법으로 손에 넣기를 바라는 것은 열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열째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기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한다. 시기심은 반드시 버려야 할 악습이다.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다른 이의 재산을 볼 때 침울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크나큰 재앙이 닥치기를 바라는 시기심은 사죄(死罪)가 된다. 예언자 나단이 다윗 왕의 회개를 촉구하고자 했을 때 자식과도 같은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과,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을 시기하여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는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참고 2사무 12,1-4). 시기심은 매우 심각한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참고 창세 4,3-7; 1열왕 21,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기심과 싸워야 한다. 시기심은 흔히 교만에서 나오기 때문에 겸손하게 사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이 시기심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훌륭한 말을 남겼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형제의 향상을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로 여러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당신의 종이 다른 사람들의 공적을 기뻐함으로써 시기심을 이길 수 있었으니, 하느님은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10)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부르시는 하느님.
계명은 억압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며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사랑의 의무를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명시하신 것이다.
▶ 제 10 계에 금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 10 계에 금하시는 것은 불의하고 부당하게 남의 물건을 탐하는 것입니다.
▶ 제 5,6,7,8 계명 어느 것이든지 범하면 무슨 특별한 의무가 생깁니까?
<답> 제 5,6,7,8 계명 중 어느 것이든지 범하면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할 의무가 생깁니다.
▶ 십계명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답> 십계명의 대의는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정신과 모든 힘으로 주 천주를 사랑하고 또 자기에게 가까운 이를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니, 첫 번째부터 세 계명은 천주 사랑하는 관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 일곱계명은 사람 사랑하는데 관한 것입니다.
4. 종 합
1)인간의 본성과 현실
우리 인간은 남에게 잘해 주기 보다 먼저 내가 남에게서 잘 대접받으려는 습성이 있고 또한 나에게 잘해 준 사람에게 잘해 주고 직접 나와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홀하게 마련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본래 마음은 선하고, 착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착하게 살아야 겠다고 말하고도 착한 일을 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함을 느끼게 하는 선의 본성을 갖고 있다.
2)이웃은 누구일까?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될 수록 인간은 사회에서 고독하고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서로의 이웃을 점점 잊어 가고 있다. 심지어 핵가족 제도로 하여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노부모를 모시지 않아 외로움을 달랠 길 없는 그들이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거나, 골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례들이 허다하다. 이러한 엄연한 사살 앞에서, “나의 이웃이 누구이며, 누구를 도와주고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서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엣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동일성
십계명의 내용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를 강제로 구속하는 법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서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며, 성사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느님은 여러 가지 표징들을 통하여, 특별히 외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 뵈시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살아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해 주셨다. 옛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하셨다.
여기서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된 두 개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결코 분리된 두 개의 계명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뵈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가능해 집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4)사랑의 실천
남을 도와주어도 나 먹을 만큼은 여유 있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만 도와주고 나의 시간이 여유 있을 때에만 남을 생각하는 습성을 지닌 우리에게 예수님은 가진 것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 하셨으니 지금 이 사회에 이런 생활을 하려면 나는 물론 나의 가족 모두가 굶어 죽어야 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심부름꾼만 되라는 무서운 말씀이 아닌가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재물이 잇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재물과 하느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바로 우리 마음의 주인을 누구를 모실 것이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비록 가진 것 모두를 남에게 준다 해도 나는 또 활동할 수 있는 몸, 그러나 강도 당하여 반죽음이 된 그 사람은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렇게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다.
“너희에게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가난한 이웃에게 조그마한 정성, 사랑을 베푼 것이 바로 하느님께 바친 사랑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나의 조그마한 생각으로 또는 성급한 판단으로 오히려 남을 죄짓게 하는 예가 적지 않다. 남을 용서해 주지 않거나 선도해 주지 않으므로 인해서 이웃을 더욱 악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까? 또 굶주림에 지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오히려 꾸지람과 자주 자립을 설교하였다면 어쩌면 그는 돌아서서 빵을 훔치는 범죄를 범하지 않았을 까? 나의 순간의 판단 잘못이 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많은 죄를 범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예가 허다하다. 예수님께서 나만 깨끗하면 된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교리 > 교리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8 과 : 종말론 (0) | 2006.10.19 |
---|---|
제 27 과 : 덕행론 (0) | 2006.10.19 |
제 25 과 : 전례와 기도 (0) | 2006.10.19 |
제 24 과 : 혼인,신품 (0) | 2006.10.19 |
제 23 과 : 고해,병자성사 (0) | 2006.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