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유럽성지순례

스페인성지순례(똘레도:Toledo)01

월요일은자유인 2009. 8. 17. 06:33

TOLETUM(안전지대, 방어지대)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된 톨레도는 1561년 펠리페 2세에 의해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의 스페인의 수도였던 곳이다. 이름이 의미하듯 섬같은 도시를 타호강이 에워싸며 흐르고 있어 천연 요새화 되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도로써의 명예는 빼앗겼으나 아직까지도 종교, 역사, 예술에 있어서는 그 찬연한 빛을 발하는 톨레도는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살아있는 유적도시로 고대 로마에서부터 고트, 이슬람 정복시대와 카톨릭 군주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와 문화유산을 남겼다. 똘레도의 중앙에 우뚝 솟은 대성당은. 톨레도의 상징이다. 이 성당은 본래 회교도 사원이던 것을 13세기에 개축하였으며 1277년부터 1493년까지 266년을 걸려 완공된 성당이다. 정교한 조각,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홍포를 입은 그리스도, 베드로의 참회 초상화, 12사도 초상화 등이 있고 순금의 성체 현시대, 성경의 글자를 금으로 입힌 성경도 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엘그레꼬는 이곳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생애를 마감하기도 했다.똘레도는 마드리드 남쪽 약 77km 지점의 타호 강가의 구릉지대에 있으며, 마드리드가 수도가 되기 이전의 스페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고, 총대주교좌의 소재지이기도 하며, 역사적 건조물이 많은 고도다. 시가의 북반은 일부가 이슬람 시대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시가는 미로와 같은 좁은 길과 막다른길이 많고, 갖가지 모양을 한 석조의 집들이 들어차 이슬람 지배시대의 색채가 짙게 남아 있다. 건조물로는 고딕 양식의 똘레도 대성당(13-15세기 건조), 산토 토메 수도원, 산 후안 데 로스 레이에스 수도원, 알카사르(王城, 13-16세기), 이 도시에서 활약한 화가 엘 그레코의 기념관, 이슬람의 사원을 전용한 엘 크리스트 데 라루스 성당등이 있다.

 

▶스페인 중남부 카스티야라만차 지방 톨레도 주의 주도.

마드리드에서 남남서쪽으로 67㎞ 떨어진 지점에 있다. 타호 강으로 돌출하여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암석질의 갑에 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 도시를 가리켜 '우르브스 파르바, 세드 로코 무니타'(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기록했다. BC 193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에게 정복된 후 톨레툼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주요식민지이자 카르펜티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6세기에는 서고트 왕국의 왕궁 소재 도시였다. 이곳에서 유명한 공의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는데, 특히 제3차 공의회(589)는 레카레드 왕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선언한 중요한 공의회였다. 무어인들의 점령기간(712~1085)에는 한 중요한 모자라브 공동체(아랍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집단)의 본거지로서 툴라이툴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085년 알폰소 6세에게 점령당한 후 카스티야 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아랍·유대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도시인데 그 대표적인 예로 13세기에 현명왕 알폰소 10세에 의해 설립된 통역사학교인 에스쿠엘라데트라둑토레스를 들 수 있다. 1560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를 수도로 선택한 이후 시의 중요성이 쇠퇴했다.

    톨레도는 스페인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곳으로 간주되어 시 전역이 국립기념지로 선포되었다. 도시가 암석지대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소코도베르를 중심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가 가파르고 지면이 울퉁불퉁한 것이 특징이다. 타호 강에는 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북동쪽에 있는 알칸타라 다리는 중세의 산세르반도 성 기슭에 놓여 있는데, 이 성의 일부는 로마 시대와 무어 왕국시대에 건축되었다. 북서쪽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산마르틴 다리가 있다. 성벽은 대부분 무어인이나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서고트족이 축조한 것도 있다. 1085년에 알폰소 6세가 관례적으로 사용했던 푸에르타비에하데비사그라(10세기)를 비롯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건축된 출입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중요한 건축물로는 흥미로운 십자궁륭을 갖춘 비브알마르돔(크리스토데라루스, 10세기) 모스크와 라스토에르네리아스 모스크, 무데하르 양식(스페인과 이슬람의 혼합 건축양식)의 유대교 회당들인 산타마리아라블랑카 시나고그(12세기)와 엘트란시토 시나고그(14세기, 일부는 세파르디 박물관으로 쓰임), 무데하르 양식의 교회들인 산로만·크리스토데라베가·산티아고델아라발·산토토메 교회가 있다. 산토토메 교회에는 훌륭한 탑과 엘 그레코가 그린 〈콘데 데 오르가스의 묘지 Burial of the Conde de Orgaz〉가 소장되어 있는 예배당이 있다.

    고딕 양식의 스페인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시의 대성당은 1226년 페르난도 3세와 대주교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가 착공했다. 예술성을 갖춘 이 대성당의 많은 건축작품들 가운데 성가대석, 대형 레타블로마요르('커다란 제단 뒷장식'), 화려하게 장식된 돈알바로데루나 부속 예배당, 모자라브 예배당, 참사회의회장 등이 특히 뛰어나다. 또한 엔리케 데아르페가 제작한(1524) 일련의 성체용기(성체 현시대와 성체를 보관)와 엘 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모랄레스와 그밖의 화가들이 그린 여러 점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는 훌륭한 박물관도 있다. 정교하게 지어진 산후안데로스레예스 교회는 후안 과스가 이사벨라 양식으로 건축한 것이다. 같은 시대에 지어진 카사데라산타에르만다드는 현재 일부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6세기초 엔리케 데 에가스의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된 오스피탈데산타크루스가 복원되어 현재 주립 고고학·미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내를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알카사르(요새)는 1531년경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했고, 프란시스코 비얄판도가 조경한 훌륭한 안뜰을 갖추고 있으며, 그 안에 군대 박물관이 있다. 1936년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이 요새의 방어는 스페인 내란중에 벌어진 가장 영웅적인 투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밖에 아윤타미엔토(18세기초), 바로크 양식의 많은 교회들, 신고전주의 양식의 오스피탈델눈시오와 톨레도 중학교, 엘 그레코 저택 박물관과 타예르델모로 박물관, 현대적 양식의 아카데미아밀리타르데인판테리아 같은 건축물들과 공원 및 산책로들은 모두 이 시의 성가를 입증하는 것들이다.

    톨레도에서 생산되는 강철과 특히 (劍)은 오랜 시대에 걸쳐 명성을 얻어왔는데, 이미 BC 1세기 그라티우스 '팔리스쿠스'의 키네제티카에 언급되어 있다. 톨레도에는 중요한 무기공장과 다마스크강(鋼), 조각용 금속판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무데하르의 전통양식으로 장식된 금속세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산품으로 아몬드와 설탕으로 만드는 크리스마스용 사탕과자인 마지팬이 있다. 인구 68,382(2001).

 

 

■스페인에서 18회에 걸쳐 열린 로마 가톨릭 공의회.

    400년경부터 702년 사이에 톨레도에서 열렸다. 이 가운데 적어도 11회는 전체적인 공의회로 간주되며, 나머지는 국지적·지역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제18차 회의를 제외한 모든 회의의 내용이 보존되어 있다.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주교였지만 몇몇 수도원장, 사제, 부제도 참석했고, 평신도 귀족들도 참석했다. 이 공의회는 성격상 교회에 관한 것이었지만, 스페인의 국가적·정치적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거의 모든 경우 왕이 소집했으며, 주로 스페인 교회로부터 정치적인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소집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589년에 열린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이전까지는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레카레드 왕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는 신앙고백서를 낭독하고 아리우스를 저주했다. 왕이 개종하자 많은 주교와 백성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무렵 서고트족이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은 통일되었고, 가톨릭 신앙이 국교가 되었다. 공의회들 가운데 675년에 열린 제11차 공의회는 그때 공포한 신앙고백 때문에 신학적으로 특별히 중요했다. 매우 이른 시기에 열린 이 18회 공의회 외에도 11~16세기에 적어도 10회의 다른 공의회가 톨레도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들은 스페인의 교회법 역사상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