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illa - Huelva(84km) - 국경(137km) - 고속도로(213km) -
Alcacer do sal(362km) - Landeria(393km) - Lisboa(450km)
▶리스본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의 삼각 하구 우안(右岸)에 위치한다.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양항(良港)이기도 하다. 일찍이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해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동부의 알파마 지구에는 성(聖)조지성(城)이, 서부의 벨렘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렘의 탑, 바스코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 및 아주다 궁전(현재의 외무성)·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고, 1290년에 창립된 대학이 있다.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 등 항만시설은 테주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렘 서쪽에, 대서양 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하나, 1966년에 테주강에 가로놓인 현수교(懸垂橋:2.3km)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左岸)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유럽공동체(EC)는 1994년도의 유럽문화도시로 이곳을 지정했다.
■예로니모수도원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마누엘 1세(행운왕(Venturoso)이라고도 부른다. 후계자가 없던 주앙 2세의 종제로서 즉위하였다. 선왕의 항해사업을 계승하여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도착(1498)과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1500)에 이어 장대한 포르투갈 해상제국(海上帝國)을 실현하였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왕녀(장녀 이사벨, 그가 죽은 후 3녀 마리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친(親)에스파냐 정책을 써서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에 대해 강제개종의 압력을 점차 강화하였다. 그의 치세(治世)에 꽃피운 르네상스 건축장식은 ‘마누엘양식’이라 부르며, 해산물과 항해용구까지 곁들여 있어 웅장하다.)가 선조인 항해왕 엔리케(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주앙 1세(아비스왕조 창시자)와 형 두아르테, 그리고 조카 아폰수 5세 등 세 명의 왕을 섬겼다. ‘그리스도 기사단장(騎士團長)’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확보하고 카나리아 ·아조레스 ·마데이라 제도(諸島)에 대한 식민사업을 하였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공포의 바다로 알려진 아프리카 서해안의 보쟈도르곶에 1422년 이후 탐험대를 파견하여 1434년 그 돌파에 성공하였으며, 계속 남하시켜 1441년 흑인 노예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서아프리카 항로가 개척되고, 1446년 북위 8도의 기니에 이르러 자비도항자(自費渡航者)를 인가하였다. 이로부터 남쪽은 바람과 해류의 역조(逆潮) 등 악조건 때문에 탐험은 진전되지 못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더욱 저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 남단, 서글레스에 천문 ·지리 ·항해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앞으로의 희망봉 우회(迂回)의 기초 조건을 만들었다. )를 기리기 위하여 착공하여 1551년 완공하였다. 석회암으로 된 건물은 1변의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며 웅장하고 화려한 노르만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수도원의 산타마리아성당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내부 공간구성을 표현하는 것과 내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 등이 있다.) 가운데에는 마누엘 1세와 왕비 마리아, 성 제로니무스, 세례 요한 등의 조각상이 있고, 남문 회랑에는 후기 고딕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성인과 고승들의 조각상 24개가 세워져 있다. 수도원 왕실묘지에는 마누엘 1세와 왕비의 돌널, 바스코 다 가마와 루이스 데 카몽이스(리스본 출생. 학업을 위해 교육도시 코임브라에 1542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앙 3세의 조정 근무 중 그 곳에서 만난 카타리나와 연애를 한 탓으로 궁전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후 군인으로 1547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로 출정,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다. 3년 후 리스본으로 돌아왔으나, 1552년 궁정에서의 결투죄로 체포되어 1년간의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후 인도로 건너가 오랫동안 인도와 중국에 체류하다가 1570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년에 빈곤과 병에 시달리다가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이름을 불후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 Os Lusiadas》(1572)인데, 1545년부터 1570년까지 쓴 것이라 한다. 작자 자신의 체험을 살리고 인도항로의 발견과 바스쿠 다 가마의 제1회 원정을 주축으로 삼았으며, 또한 극적인 에피소드를 묘사하면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곁들여 그 국민의 영웅적 위업을 찬양한 애국적 대서사시이다. 그는 서사시인으로서는 로마의 베르길리우스와 비견되고, 서정시인으로서는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에 필적할 만한 시성(詩聖)이다. 서정시는 소네트가 가장 뛰어났는데,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교묘하게 잘 표현하였다. 그 밖에 《주인역(主人役)》(1587) 등 3편의 희극이 있다. )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6세기 포르투갈 전성기의 영광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수도원은 마누엘 1세(1469~1521)가 바스코 다 가마의 해외원정에서 벌어온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건설했다고 한다.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고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타호 강쪽의 남문 위쪽 벽에는 항해왕 엔리케의 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의 생애가 조각되어 있다. 남문을 통해 들어가면 성모마리아 교회가 있다. 25m의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대항해시대의 작품답게 해양과 관련 있는 모티브로 장식되어 있다. 천장의 장식도 아름답고 입구 오른쪽의 주제단의 장식 역시 일품이다. 주제단 반대쪽 상단은 성가대실이다. 그 아래에 2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오른쪽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의 관이고, 왼쪽은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활약상을 서사시로 읊은 국민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의 관이다. 성가대실에는 마누엘 1세와 주앙 3세의 관도 모셔져 있다. 바스코 다 가마와 카몽에스 관 사이를 지나면 서문으로 나오게 된다. 본래 이 문이 정문이었지만 19세기에 건축된 문앞의 건물에 가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한 변의 길이가 55m인 정사각형 회랑으로 둘러싸인 뜰이 나온다. 여기서는 석회암을 사용한 회랑기둥에 새겨진 정밀한 조각과 정원의 아름다움에 누구나 압도당한다. 열대식물과 바다짐승, 그리고 이국적인 동양의 특산물을 조각한 회랑기둥과 정교하고 환상적인 정원공간의 배치는 하나의 예술품을 연상하게 한다.
타호강 근처에 있는 벨렘탑은 4층의 등대로서, 1515∼1521년 프란시스코 데 알다가 가마의 업적을 추모하여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었다.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 양식을 띠고 있으며 밧줄·조개·바다풀 등의 장식을 새겨넣고 총안을 둔 흉벽 등을 설치하였다. 탑의 안뜰에는 '성공의 성모' 조각상과 인도 양식의 작은 첨탑을 설치하였다. 지하감옥 위에 있는 '총독의 방'은 고딕 양식으로 꾸몄고, '찬란한 방'이라는 거실도 만들었다. 1983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벨렘 탑(Torre de Belem)
벨렘 탑(Torre de Belem)은 발견기념비에서 테주 강 하류 쪽으로 1km 거리에 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이 탑은 당초 물속에 세워졌으나, 테주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1515~19년에 건설된 이 탑은 하얀 나비가 물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 양식의 건축물로, 3층 구조이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 상'이 서 있다. 1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만조 때에는 물이 들어오고 간조 때에는 물이 빠지는 이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생가 성당
작은 형제회 소속 신부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는 설교가이며 교회학자로 ‘복음적 박사’라 불렸고, 가난한 사람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이다. 축일은 6월13일.
안토니오는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몬에서 태어나 페르난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심 돈독한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5세 때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 입회했고, 1212년에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 등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코임브라에 있는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8년 동안 공부와 기도생활에 전념했다.
그 후 1220년 1월 모로코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는데 이때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그해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는 모로코에 도착한 직후 병에 걸려 이듬해 봄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폭풍우를 만나 잠시 시칠리아 섬에 머무르게 됐다. 안토니오는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아시시의 포르치운쿨라에서 개최된 작은 형제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런 후 그는 영적생활과 수련에 몰두하기 위해 포를리 근처의 몬테파울로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이날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자 안토니오가 맡게 됐다. 그는 열정에 사로잡힌 채 성경의 깊은 의미를 해박한 지식과 함께 차원높은 교리 지식을 곁들여 거침없이 설명해 모든 사람들을 감동케 했다. 그때부터 그는 가타리파가 성행하던 북부 이탈리아와 알비파가 성행하던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볼료냐, 몽펠리에, 툴루즈 등에서 설교가로서 활동했다. 이 당시 많은 이단자들을 회개시킨 안토니오는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에밀리아 관구장 대리로 선출됐다. 그러나 그는 설교에 더 전념하기 위해 1230년 사임하고 이탈리아 파도바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 그의 사순 강론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강론을 마친 후 기력이 약해진 안토니오는 파도바 근처의 캄포 산 피에로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돌아오던 중 베로나 아르첼라 클라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에 안치돼 있다. 그해 3월15일 파도바에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들을 돕는 법률이 통과됐는데, 이는 안토니오의 특별한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선종 직후 베르첼리 수도원의 갈로 원장에게 발현했다고 한다. 이례적으로 사망 이듬해인 123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또 1946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으로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어느 수련자가 허락 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 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그의 이름을 따 19세기에는 ‘안토니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됐다. 이 단체는 지금도 개발도상국의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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