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수 2일
3일차: 조식후 출애굽 여정을 따라서 시나이 산으로 이동,
수에즈 운하, 마라의 샘, 르비딤 골까기를 경유하여 시나이 산으로
수에즈 운하 (6)
지중해와 수에즈만·홍해·인도양을 잇는 세계 최대의 수평해양운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인 수에즈지협(地峽)을 관통하며, 지협부의 길이는 162.5㎞, 남북의 진입용 수로설비를 포함하면 전체길이 195㎞에 이른다.
역사
BC 2000년경 고대 이집트 제12왕조의왕인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강 동단의 지류의 요지인 자가지그에서 팀사호수·비터호수를 거쳐 수에즈만·홍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였다. 이 운하는 계속 사용되다가 8세기 이후에는 방치되어 토사로 메워졌다.
15세기에 희망봉항로가 발견되면서 동서교역이 활발해지자, 지중해의 통상민족 베네치아인이 이집트의 술탄에게 수에즈지협을 파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단거리항로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럽인에 의해 제기되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대가 작성한 수에즈지협 조사보고서에는 지중해와 홍해의 수위차를 9.9m로 잘못 측정되어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32년 이집트에 영사대리(領事代理)로 부임한 프랑스인 F. 레셉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로마대사를 지낸 뒤 외교관을 그만 둔 그는 직결운하의 구상을 추진하여, 이집트에서 근무할 때 친분이 있었던 사이드 파샤가 부왕(副王)이 된 것을 계기로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854년 레셉스는 부왕으로부터 건설허가서를 받았으나, 영국은 자국의 권리와 이익이 위협받는 것을 염려하여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집트 부왕과 종주국인 오스만제국은 영국의 압력을 받았고, 이로 인해 오스만제국 황제가 최종적인 공사허가서를 내주지 않아 이 계획은 여러 차례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레셉스는 1858년 12월 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 25일 지중해 쪽의 출발점인 현재의 포트사이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영국의 방해가 계속되면서 오스만제국 황제와 수에즈운하회사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1864년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1866년 <수에즈운하회사는 이집트의 회사이며,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는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협정이 조인되었고, 같은 해에 오스만제국황제의 최종공사허가서가 나왔다.
이리하여 운하는 개통되었고, 1869년 11월 17일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귀빈·명사가 초대된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다. 운하 개통 당시, 영국의 자유당 글래드스턴내각은 운하 건설을 반대한 자유당 파머스턴내각과는 달리 이 운하의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레셉스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영국은 이후 최대의 운하이용국으로 운하회사에 대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1875년 이집트 부왕 이스마일 파샤가 재정상의 이유로 운하회사의 총주식의 반에 가까운 17만 7000주를 팔려고 내놓았을 때 영국은 이것을 사들였다. 이어서 발생한 이집트국고의 적자 증가(1876),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재정 관리(1878), 부왕 이스마일의 강제 퇴위(1879)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을 촉진시킨 반면, 이집트국민의 민족의식에 불을 붙였다.
그 결과 188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럽인폭동이 일어났고, 민족주의자인 아라비 파샤가 지휘하는 군대가 개입하여 약 50명의 유럽인이 사망하였다. 이에 영국은 유럽인의 안전과 수에즈운하의 통항 확보라는 명목으로 이집트에 출병하여 수에즈운하지대를 점령하고 2일간 통항을 금지시켰다.
통항 금지는 레셉스의 강력한 항의로 곧 해제되었지만, 통항의 자유에 관한 여러 나라 사이의 협정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어 1888년 유럽 열강 9개국에 의한 조약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조인되었다. 각국은 이 조약을 즉시 비준하였지만, 영국은 군사점령을 위해 이를 연기하였다.
영국이 비준을 하고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1904년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조인 이후의 일이다. 그 후에도 영국은 점령을 계속하였으며, 제1차세계대전 때 1일,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단속적으로 76일간 운하가 페쇄되었다. 영국은 1936년의 영국-이집트 조약으로 운하지대의 주둔을 합법화하였으나, 1952년 이집트혁명으로 등장한 나세르정권이 영국에 대해 군대의 조기 철수에 관한 협정을 승인하게 하고(1954), 1956년 6월 영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운하지대는 이집트의 주권하로 돌아왔다.
같은 해 7월 미국이 아스완하이댐 건설을 위한 융자를 철회하고 영국과 세계은행도 이에 뒤따르자, 나세르대통령은 수에즈운하회사의 국유화를 선포하고 그 수익금으로 댐을 건설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제2차중동전쟁)이 단행되었지만, 이집트의 저항과 국제연합의 개입으로 3국의 군대는 철수하고 수에즈운하회사의 국유화가 확정되었다.
이 전쟁으로 수에즈운하는 5개월간 폐쇄되었고, 1967년 6월의 제3차중동전쟁 때도 다시 폐쇄되어 1973년의 제4차중동전쟁이 끝난 뒤인 1975년 6월, 8년만에 통항이 재개되었다.
공사기술상의 역사
수에즈운하는 수평식운하이므로 토목기술상의 새로운 시도는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 1세는 지중해와 홍해의 수위차를 9.9m로 오인하여 운하 건설을 단념하였지만, 실제로는 불과 25㎝였다. 또한 굴착한 육지의 가장 높은 곳도 해발고도는 15m에 불과하였고,
운하의 약 1/5은 천연호수였으며 노선(路線)도 단조로워 북쪽은 대부분 직선이었다. 토질은 모래와 점토여서 사람에 의한 굴착이 가능하여 1859년의 공사개시 후 1863년까지는 이집트부왕 사이드 파샤에 의해 매달 2만 5000명의 노무자가 동원되었고, 낙타에 의한 토사운반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스마일 파샤가 이집트의 부왕이 되었고, 1863년에는 오스만제국의 외무장관이 레셉스에게 강제노동을 폐지할 것, 노무자를 6000명으로 감축할 것, 노무자의 급료를 인상할 것 등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 후로 기계의 도입이 적극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60대의 버키트 준설기였다. 마침내 1869년 수에즈운하는 약 7500만㎥의 토공량(土工量)을 굴착하여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운하는 얕은 대형(臺形)의 단면형태로 되어 있으며, 1869년 개통 당시에는 깊이 약 8m, 흘수깊이(선체가 물에 잠기는 깊이) 약 5m였으나, 점차 확장되어 1956년에는 깊이 13∼15m, 흘수깊이 11m가 되었다. 1980년에는 평균 수면나비 약200m, 깊이 15m가 되어 만적시(滿積時)에는 6만t, 공선시(空船時)에는 15만t급의 유조선도 통항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