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자 교리 제 7과 : 하느님 나라
1. 삶의 기쁜 소식
1)나는 누구인가?
만일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음을 던진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물음의 근저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후 세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등등의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와 신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내가 어떤 삶을 영위하느냐 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물음이 되는 것이다.
2)삶의 의미
사람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에 대한 기준과 인식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없다.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일단 발견된 의미는 우리 삶에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의미 있는 삶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도 남을 보람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상처를 주어도 그 속에 의미가 있는 사람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삶의 형태를 문제삼는다. 심지어 삶의 형태를 두고 삶의 의미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3)‘삶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발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러한 삶의 의미는 사람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창조하셨고 당신과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창조하셨다. 즉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명(誡命)’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사랑함으로써만 ‘하느님을 공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뜻이며, 우리의 삶의 의미, 목적이다. 서로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이다. 서로 사랑하는 삶 안에서 사람은 자기 영혼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는 길’은 자기 혼자서 죄를 짓지 않으면서 다만 착하게 사는 소극적인 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애를 쓰는 적극적인 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접근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성서(聖書)를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예언자(預言者)>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하셨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통치의 개념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다. 즉 정의는 사회 정의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공평함,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
1)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난 구원의 기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길 바라십니다”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은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이란, 병이나 태어날 때부터의 결함이나 노쇠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 받아 신체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상태뿐 아니라, 나아가 육체적인,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고립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유 받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는 사람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도 회복케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희망에 찬 사랑의 삶을 살게 한다.
2)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는 ‘구원’의 의미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본래적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신비스런 실재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당신만이 그 나라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다. 그 나라는 주로 스스로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알려진다.
3)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로의 초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결코 이 지상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삶을 준비하는 자리는 분명 우리의 이 지상에서의 삶밖에는 없다. 또한 우리는 지상의 세계와 손을 끊고 사후의 세계만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는 구원이 다만 내세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구원이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비 종교가 달콤한 말로 약속하는 행복은 아니지만, 진정한 행복과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4. 오늘날에 있어서 기쁜 소식.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을 한다면, 그 기쁜 소식은 참된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수님이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 인생에 삶의 의미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예수님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경멸 당하고 축출된 죄인이라 할지라도 다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5.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직접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시다.
1)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예언자들이(구약)에서부터 선포됨. “온다”는 개념에서 “도래함”이 예수와 예언자의 차이이다. 예수께서 오심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되고 있으며, 이미 실제로 도래했다고 가르치신다.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자가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권위와 노력을 가지고 말씀으로 병자의 치유도 말씀으로, 죄의 용서도 말씀으로,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심.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백성에 대한 사랑의 표현. 하느님의 손길이다> 기적의 사용은 이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 삼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기적은 믿음으로 인도한다.
6.하느님 나라의 이해
하느님 나라는 실재(實在)이다. 가상의 나라가 아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들로부터 해방(인간 생명, 자유가 억압 잘못 행사)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오는 것.
-하느님 나라는 지상 적인 세상 왕국과는 다르다.
7.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
모든 이가 초대됨. 언제 온다는 시간이 예정된 것도 아니며,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판단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용서와 자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8.회개(悔改)
회개는 전환을 뜻한다. 기존의 삶에서 돌린 삶을 말한다. 길을 걸으면서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완전히 돌려서 걷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고
-기도를 하고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천하는 삶
-결론 :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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