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산의 마리아 영면(Dormitio) 성전은 이곳에서 성모님께서 ‘잠드셨다’고 해서 “마리아 영면 성전”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마리아 영면 기념 성전은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의 마지막을 제자들과 함께 했음을 기념하는 성전이며 또한 성모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고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성전이다.
초세기 사도들의 전승을 모아 전하고 있는 2세기경의 위경에서는 “동정녀의 승천” 또는 "마리아의 잠드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맡겼던(요한 19,26-27)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사도 요한에게 직접 들은 것 이라며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마리아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계시를 통해 아셨는데, 모든 사도들이 기적적으로 그녀의 주위로 모여왔고, 예수님도 그녀의 임종을 돕기 위해 발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육신을 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영혼을 거두어 가셨다. 제자들이 성모님을 매장 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다시 발현하셨고, 사도들이 그녀를 부활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한 천사가 무덤을 열었고, 마리아는 무덤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하였다.’
이미 4세기부터 마리아의 임종에 관한 신학적 사유가 전개되면서 성모승천을 고백했으며, 5세기에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이 하느님의 모친의 날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13세기경에는 보편적인 믿음이 되어 신앙생활에 자리 잡았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선포했다.
성모 승천은 이처럼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과 특히 구원의 역사인 구세사(救世史) 안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탁월한 역할을 바탕으로 교회가 선포한 믿을 교리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셨음”(교회헌장 59)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이 “성모승천” 교의는 마리아가 사망하였는지 아니면 직접 천상 영광에로 올림을 받았는지 하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마리아는 아들 예수처럼 사망 하였으며, 그 얼마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부활하셨다는 즉, 마리아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승이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경당에 이른다.
지하 층계를 내려가면 오른쪽에 마리아의 무덤이었다는 곳에 빈 석관과 제단이 자리하고 있으나 역사적인 신빙성은 희박하다. 일반적으로 전승에서는 성모님이 돌아가신 곳을 두 곳으로 얘기하는데, 예루살렘과 터키의 에페소 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는지, 아니면 요한 사도가 에페소로 피신해 갈 때 마리아와 함께 떠났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전승들이 있지만 확실한 대답은 없다.
4세기부터 신앙인들은 마리아의 임종에 관한 신학적 사유가 전개되면서 성모승천을 고백했으며, 5세기에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이 하느님의 모친의 날로 제정되었다.
마리아 무덤 성전은 겟세마니 동산의 "사도들의 동굴"과 함께 4세기 말경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의해 보존된 마지막 보루였다.
마리아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는 이 자리에 422-458년경 마리아의 매장과 승천을 기념한 기념 성당이 세워졌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적으로 선언된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후 6세기에 무덤 성당위에 두 번째 성전을 지었으나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서 이 성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십자군들이 들어와 지하 성당을 발굴하고 1130년경에 분도수도회에서 성전을 크게 확장하여 다시 지었지만 1187년 살라딘은 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지하 성당만을 남겨두고 모두 파괴 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마리아를 “예언자(예수)의 지극히 복된 어머니”로 공경했기 때문에 지하 성당은 파괴하지 않고 경배했다고 한다. 그 후 1363년경 부터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 이 지하 성당을 관리해왔었으나 1757년 그리스 정교회에게 관리권을 탈취당했고,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성지순례의 바쁜 여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출을 길게 잡았다.
이런 성지에서는 1시간 이상 머무르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어야 하는데
워낙 순례할 성지가 많은 에루살렘이라서 스쳐 지나가듯이 가야만 한다.
다시 1층을 올라와서
동상 모습으로 다윗의 동상 같다.
인근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
성모 염면 성당을 빠져 나와서
인근에 있는 최후의 만찬 장소로 이동을 한다.
이곳은 별거 아니고 화장실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건물 통로를 지나서 가면
최후의 만찬 다락방 가는 곳에 다다른다.
성지 지킴이 고양이
입구
왼쪽으로 올라가면 최후의 만찬 장소로 들어간다.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본 모습
이럴 경우 순례객이 다 들어가고 나서 마지막에 들어가면 찍음.
최후의 만찬 다락방(?) 다락방이라고 하기에는 커도 너~무 크다.
시온산은 예수님께서 ①수난 전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만찬을 행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②발현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성령강림) ③교회의 발상지가 된 곳이기에 아주 소중한 성지이다.
또한 성령강림 때에 성모님은 사도들과 함께 이곳에 계셨으며(사도 1,12-14)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교회 전승은 전한다.
시온산은 335년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 위에 “부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예루살렘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였으며 주교좌가 있었던 곳이다. 시온산 위에 지어진 4세기초의 대성전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고, 그 후 십자군 시대에 다시 최후의 만찬 기념성전(Coenaculum)을 지었지만 다시 이슬람에 의해 파괴 되었다.
그 후 폐허가 된 이곳을 1333년 나폴리 왕이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매입하여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 봉헌 하였고,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는 이 부지에 수도원과 고딕식 양식의 2층 기념 성전을 지어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Coenaculum)이라고 불렀고, 이곳 수도원을 2백 여년 동안 본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은 1551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빼앗겼고, 기념 성전은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 되었다.
그 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1층은 다윗의 무덤과 시나고가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었고, 2층의 성령강림 경당은 폐쇄시키고 최후 만찬 기념 성당만 개방 하면서 성목요일과 성령강림 대축일만 말씀의 전례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작은형제회에서는 1936년, 원래의 기념 성전 터 바로 옆에 부지를 구입하여 오늘날의 최후만찬 기념 성전과 수도원을 지었고,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최후의 만찬 및 성령강림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복음의 내용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그 장소와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지만 이미 비잔틴 시대에 시온산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장소(마르 14,12-31)로 여기고 성역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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