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장소에서 나오면 성모 영면 성당이 바로 보인다.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간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다윗왕의 무덤을 향한다.
원래는 남자입구와 여자 입구가 다른데
여자 입구가 공사 중이어서 한곳으로 들어간다.
시온산에 있는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Coenaculum)의 1층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다. 이것은 십자군 시대 이후 다윗 왕의 기념 묘로 공경되기 시작했지만 그 기원은 초세기 그리스도 공동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고,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이곳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면서 구원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 “시온” 즉, “거룩한 시온”으로 인식되기 시작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시온”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오벨 산 언덕위에 도시를 세워 ‘다윗의 도성’이라고 칭했고(2사무 5,9) 키럇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와(2사무 6장) 정치적 ? 종교적인 중심지로 삼았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아 도성으로 삼았던 ‘다윗 성’은 키드론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이 만나는 오펠산에 위치한 작은 도성이었다. 그러나 “다윗 성”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공동체가 있던 “새로운 시온”과 동일시하게 되고 또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다윗의 무덤이 마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이미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이곳에서 거룩한 왕인 다윗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최후의 만찬 경당이 있는 시온산에 다윗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는 전승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후 프란치스칸들이 1335년에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을 지으면서 다윗에 대해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는 내용을 확증하며 기념성전 1층에 “다윗 무덤 경당”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족이(1517년)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한 후,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과 수도원은 다윗을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명으로 공경하는 오스만 터키 관리들에게 빼앗겼고,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 하였다.(1552년).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1층은 다윗의 무덤과 시나고가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었고, 2층의 성령강림 경당은 폐쇄시키고 최후 만찬 기념 성당만 개방 하면서 성목요일과 성령강림 대축일만 말씀의 전례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재 다윗의 무덤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고, 다만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공경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의 신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성지가 되었다.
1951년에 다윗의 무덤이 있는 곳에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을 하였고, 초세기 건축물인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시나고가-교회를 발굴하여 그리스도교 전승들을 확인하였다.
순례를 마치고 나간다.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여
베드로 회개 성당으로
베드로 회개 성당 입구이다.
베드로 회개 성당
옛 가야파의 집터 위에 세운 성당이다.
베드로 회개 성당에서 본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
시온 산 남동쪽 키드론 계곡과 게헨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갈리 깐뚜(Gallicantu)”라고 하는 “닭 울음” 성당이 있다.
1931년 프랑스 성모승천 남자 수도회(Assunzionisti)에서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사제인 카야파의 집터로 여겨지는 이곳에 베드로의 배반과 회개를 기념하여 기념 성당을 지었다.(대사제 카야파의 집은 현재 시온산 아르메니아 정교회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신약시대 윗도시에 해당한 이곳은 성모승천 수도회에서 발굴작업을 하여 예수님 시대에 주거지역으로 사용하였던 동굴과 물저장시설 그리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던 동굴들을 발굴 하였다.
이 동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체포하여 카야파에게 재판을 받기 전에 가두어 두었던 동굴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성당 위에 있는 닭형상
베드로 회개 성당에서 주님통곡 성당도 보인다.
이곳에는 비잔틴 시대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림을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졌었고, 그 후 12세기에 다시 교회를 세우면서 ‘닭울음 성당’(S.Pietro in Gallicantu)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닭울음 성당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윗도시와 아랫도시의 키드론 계곡으로 이어지는 로마시대의 돌계단이다. 이 돌계단은 예수님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시온산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 겟세마니로 기도하러 가셨고, 또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에게 체포된 후에는 이 길을 통해 카야파의 집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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