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자 교리 제 4과 : 인간론(1)
1. '나'는 어떤 존재인가?
1) '나'는 유일한 존재이다
사람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나 처지가 다 다르다. 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없고, 나와 똑같은 모양으로 사는 사람도 없다. 인간은 본능대로 사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고도로 발달된 사고를 하며 복잡한 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나'는 사회적 존재이다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동안 행복과 불행을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어떤 사람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 주고 인정해 줄 때나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나와 같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기뻐하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해 한다.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맛보여 살아가는 존재이다.
3)'나'는 무한한 욕망을 지닌 유한한 존재이다
인간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라도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지니고 있고 할 수 있는 게 많은 훌륭한 존재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2.'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1)'나'는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불굴의 의지와 끝없이 샘솟는 지혜로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 간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하고 궁리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잘살아 보려고 몸을 아끼지 않건만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하고 한숨 돌리기도 전에 또 다근 일이 들이닥친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인가 생각되어 한층 더 힘을 기울여 보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을 버리기 어렵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행복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자문하기 시작한다. 원한 적도 없는데 왜 이 괴로운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사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안한가? 이 괴로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사는 것도 벅찬데 알 수 없고 두렵기만 한 죽음의 나락(那落)으로 떨어져야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2)'나'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한다 어렵기 때문에 때로는 포기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다른 존재의 힘을 빌어 해결해 보려 한다.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 주는 존재를 찾는다 내가 여기 있게 된 원인과 목적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내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이끌어 툴 존재, 갈등과 괴로움이 빚어내는 불안,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줄 어떤 분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자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3.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인간학
1) 영육(靈肉) 두 요소의 단일 유기체인 인간
성서는 언제나 ‘영혼’과 ‘육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한 자입니다.
▶영혼은 무엇입니까?
<답>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체(體)이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된 인간
구약성서 안에서 묘사되고 있는 인간은 갖가지 관계 속에 얽혀져 있는 존재로 이런 관계의 기초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그 근본을 읽는데 이 하느님과의 관계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성서는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떻나 처지에 있든지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고 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 보면 천주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상대로 내셨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답> 성경에 천주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의미는 바로 천주께서 사람에게 본성에 적합한 지능과 의지와 자유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과성은혜(過性恩惠)와 초성은혜(超性恩蕙)로 신성하게 꾸며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천주께서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는 무엇입니까?
<답> 천주께서 원조에게 주신 초성은혜는 은총과 성덕이니 이것으로 원조들은 천당영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주께서 원조에게 주신 과성은혜는 무엇입니까?
<답> 천주께서 원조에게 주신 과성은혜는 사욕편정이 없고 지혜가 밝고, 고통이 없고, 죽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과성은혜와 초성은혜를 원조들에게만 주시려 하셨습니까?
<답> 천주께서는 과성은혜와 초성은혜를 인류의 시조되는 아담으로 시작하여 온 인류에게 다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3)공존의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존 관계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이다.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이 하느님과의 일차적 관계 안에서 드러나고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하느님과의 관계 :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시고자 한다면 인간은 그 순간부터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철저히 매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2)타인과 공존하는 인간 : 인간이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나 혼자 산다면 존엄성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특성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인간 각자가 속한 단체 안에서 그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4)기도(祈禱)하는 인간.
인간은 그 생명이 하느님이 손에 달려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부단히 쫓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따른 다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이 때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여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도이다.
5)죄 많은 인간과 인간 회복
죄악이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위대함을 잊고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나약으로 죄에 빠졌지만 하느님의 용서는 다시 인간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서 인간 고유의 품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또 하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은총이다.
▶인류의 으뜸 조상은 누구입니까?
<답> 인류의 으뜸조상은 아담과 에와로 천주께서는 이들을 낙원에서 살게 하시고, 주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죽지 않고 바로 천당에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천주께서는 원조 두 사람을 어떻게 내시었습니까?
<답> 천주께서는 원조 두 사람 중에 아담의 육신은 진흙으로 만드시고, 에와의 육신은 아담의 한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셨으며, 그 둘의 영혼은 당신 생명의 신령한 능력으로 그냥 창조하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조의 충성을 낙원에서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답> 하느님께서는 원조의 충성을 낙원에서 지선악수(知善惡樹) 실과(實果)를 먹지 말라는 계명으로 시험하셨습니다.
▶원조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까?
<답> 원조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마귀의 유혹에 빠져 금한 실과를 먹음으로 교만하고 순종치 아니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원조를 어떻게 벌하셨습니까?
<답> 하느님께서는 원조에게서 초성은혜(超性恩蕙)와 과성은혜(過性恩惠)를 도로 거두시고, 낙원에서 내쫓아 마귀 지배하에 두셨습니다.
4. 신약성서(新約聖書)의 인간학
1)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하고도 한계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래 출발점에서부터 삐뚤어진 비 자연의 상태에서 원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마음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인간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써 죽으셨고 부활하셨듯이 우리 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을 맞이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최대의 희망이요 신비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요, 하느님의 신성에 동참할 수 있는 성성(聖性)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남과 여로서의 인간
두 성의 관계는 비교에서 오는 우월성이라든가, 불평등한 힘의 차이라든가, 사회 가치 기준에 의한 두 서의 우열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두 성에 대한 고유한 영역과 능력을 인정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비교 우열 관계 아니라 동반 협조 관계로서 받아들여 하겠다.
3)구원(救援)받은 인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것 하나 만으로도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당시에는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대중이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됨으로써 하느님과 보다 친밀한 위격적 관계가 이루어졌고 하느님과 가깝게 통교(通交)를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위치가 보다 들어 높임을 받게 되었다.
5. 인간학의 종류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현대에 와서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1)물질적이고 신체적 측면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신체적 인간학,
(2)인간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민속 지리학적 문화적 인간학,
(3)인간의 궁극 원리를 찾는 관점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이다.
6. 신학적 인간학의 전개
신학적 인간학은 하느님의 현존을 확신하며 하느님을 인간의 존재와 의식과 행위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다음의 통찰들은 그 전제가 된다. “인간에 대해 말한다 함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무신론자는 인간을 놓친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은 수수께끼로 머문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로 신을 부르짖는다.
1)하느님을 찾는 인간
(1)질문 작용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모든 물음은 모르기 때문에 물어지는 것이지만, 묻는 대상을 전혀 모르고서는 물을 수조차 없다. 즉 물음에는 묻는 대상에 대해 일종의 사전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일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질문 작용을 가능케 하는 의미에서 절대 존재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선험적 지식 속에 이미 하느님은 그 원리와 능력으로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신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질문의 대상으로 삼고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이미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함께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아는 근본적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인간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2)인간의 자유 행위에서 드러난 하느님
오늘날 인간은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그리하여 신은 인간의 자유에 반대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인간 자유의 방해나 경쟁자가 아니라 오히려 기초요 보장이다. 즉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말해 주는 표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구상을 따라 산다. 그는 이 목적을 향해 사는데 이 목적은 다시 인간이 자유로이 성취하려는 여러 목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인간이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그 외의 것들은 포기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게 목적을 정하기는 하였지만 결국 그 목표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유한한 목적에서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해방시켜 준다. 하느님은 인간을 속박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유롭게 해주고 그 자유를 완전하게 해준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생각할 때 하느님은 그 기초로서 반드시 가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 그것에 매혹된다고 말한다. 또 유명한 강론을 들을 때 연사가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꼼짝없이 그들에게 묶이면서도 참된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 음악이나 연극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군중들이 그 말씀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완전히 매혹되었고 완전한 자유를 체험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데서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본래의 인간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데서 가능하다. 여기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가 있다.
(3)인간의 의미 추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을 체험한다. 일생 동안 수고하여 이루어 놓은 일이 순식간에 허사로 돌아갈 때가 있다. 평화를 위해 수고한 필생의 사업이 전쟁으로 깡그리 망쳐진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회오리 바람은 농장을 결딴내고, 가옥을 부수고, 가축을 죽이며, 수확을 망치고, 토지를 앗아간다. 인간은 이러한 무의미하고 부정적인 체험 앞에서 쉽게 절망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사건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많은 사회적 비리의 현실이 우릴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 앞에서 그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어떤 염원을 가지게 된다. 어떤 온전한 세상을 찾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 맞추어진 짐승과는 달이 인간에게는 그러한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이 주어져 있다. 인간은 그러한 절망에도 의미가 있기를 추구한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리 부정적인 체험을 거듭해도 다시 새로 출발할 용기를 갖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 인간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인생의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포괄하고 규정하며 인간에게 다가오는, 따라서 인격적이며 의미를 부여하며 기초해 주는 하느님이라는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4)인간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인간은 체험을 통해 성숙한다. 그리하여 노년은 지혜가 무르익은 때라고 한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년에 이를 문득 글쓰기를 그만 두었다 라는 이야기 있다. 그 때 비서 수사가 그에게 쓰고 있던 저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못마땅해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기를 “형제여 몇 달 전에 전례를 거행하는 도중에 난 하느님의 무엇인가를 몸소 겪었는데 그날 그만 글쓰고 싶은 의욕이 싹 가셔 버렸소. 사실 지금 나로서는 일찍이 내가 하느님에 대해 썼다는 게 죄다 북데기 같이만 여겨진다네”하였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유한성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매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인간의 체험은 유한성의 체험이며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7)결론
우리 인간은 하느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능력이 있다. 인간의 상황 자체가 하느님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별도로 인간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이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게 밝혀진다. 그것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다.
성격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고귀한 품위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각 사람은 이웃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과 그 생활을 인간답게 영위하기에 필요한 수단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할 의무가 있다. 예컨대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노인, 불의 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피난민, 불법 혼인에서 태어나 부모의 죄 때문에 탓 없이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생아, 우리 양심을 재촉하는 굶주린 사람, 이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 줄 의무가 있다. 또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 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유형,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다. 그것은 인간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써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
<종합>
오늘 배운 내용을 요약해 보인다. '나'와 같은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뿐인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는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함께 어울려 살기 때문에 기쁨도 생기지만 고통도 생겨 난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만들고 이겨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지만, 무한한 욕망에 비해 착쳐오는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다른 동물처럼 본능대로만 살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며 사는 존재이다. 이 근원적인 문제를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대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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