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성지순례의 시작...
인천에서 마드리드로 날아가서 시작된다.
■마드리드 개요 스페인 최대 도시이자 문화예술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프랑코 시대 이후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새 행정구역상 한 지방이 되었고 그 이름은 시와 같은 마드리드로 명명되었다. 마드리드가 수도로 정해진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와 그 후손들의 중앙집권적 통치의 결과이다. 즉 마드리드가 수도로 선택된 것은 전략적·지리적·경제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이 당시 반왕권적 세력과 연계가 없었다는 점이 보다 주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드리드는 수도로서의 역할에 걸맞는 특성이 거의 없다. 다른 유럽 국가의 수도처럼 큰 하천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광물이나 자연자원도 없으며 성지순례의 목적지도 아니었다. 이 도시가 당시에 보다 중요했던 톨레도 시를 방어하기 위한 조그만 요새에서 비롯된 점을 보아도 수도로서는 부적합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왕궁을 옮긴 지 거의 1세대가 지난 1607년에 펠리페 3세가 마드리드를 공식적으로 수도로 정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펠리페 왕조의 후원하에 마드리드는 오래되고 다소 번잡한 도심과 그 주위의 궁전·수도원·교회·공공건물이 좋은 대조를 이루는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 : 시 3,099,834(2004), 대도시권 5,804,829 (2004 추계).
자연환경
■ 위치와 기후
마드리드는 지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있다. 메세타라고 하는 해발 635m의 기복이 진 고원에 자리잡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수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입지적 특성과 인근의 카르페토베토니카 산맥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춥고 건조한 날씨가 나타난다. 여름에는 때때로 급작스런 기온변화도 있지만 대개는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더우며, 특히 7~8월에는 기온이 37.8℃ 이상 올라갈 때도 있어 매우 무덥다. 월평균기온은 5~24℃이며 월평균강수량은 7월의 12.7㎜ 미만에서 10월의 50.8㎜까지 다양하다. 연중 온화한 시기는 봄과 가을로 이 시기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때이기도 하다.
■ 도시구획
마드리드의 시가지는 각 시기들의 변화와 발전이 반영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마요르 광장 부근의 옛 도심은 미로와 같이 좁은 가로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구역의 모습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세운 당당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및 대로들과 대조를 이룬다. 도심의 현대적 빌딩들과 교외의 아파트 단지들은 오늘날의 발전모습과 경제적 수준을 보여준다. 마드리드의 많은 곳들이 비좁은 인상을 주는데, 그 이유는 마드리드가 수도가 된 초기시절에 왕이 주민들에게 외교사절이나 방문중인 고관들에게 그들의 집의 한 층을 제공하도록 명령하자 이것을 피하고자 단층집을 짓거나 실제로는 2층이지만 전면이 단층으로 보이는 이른바 카사스알라말리시아(앙갚음의 집들)를 지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계속적인 성장, 특히 공공건물과 수도원의 확장·건설로 인하여 토지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마드리드의 마지막 성벽은 1625년에 세워져 1860년에 파괴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도시의 인구는 4배로 증가했다.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는 더 많은 공지를 확보하기 위해 수도원들을 허물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제프의 별명인 '작은 광장의 왕'은 그가 만든 광장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가 받은 몇 안되는 찬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당국을 무마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관계가 나빠졌고 이는 그가 왕위를 물러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가 만든 광장의 하나인 오리엔테 광장은 집·도서관·교회·수도원 등을 철거하고 만든 곳이다.
로스마드리드(범마드리드)라는 말은 도시의 각 바리오(지구)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발달시켜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말이다. 또한 바리오스알토스(북부지구), 바리오스센트랄레스(중부지구), 바리오스바호스(남부지구)는 지리적·경제적으로 구분된다. 마요르 광장에서 톨레도 가를 따라서 강을 향해 펼쳐진 언덕에 형성된 남부지구는 아름답지만 빈곤한 지역이다. 그 너머 강 양편의 매립된 습지에 최근에 들어 개발된 지역 역시 빈민촌으로 지금까지도 값싼 주택들이 산재해 있다.
그 언덕 바로 뒤에는 유명한 벼룩시장인 라스트로가 있다. 수많은 도시개발계획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는 주위의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1948년까지는 만사나레스 강조차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 마드리드는 파리보다도 더 많은 넓은 공원을 갖고 있다. 사냥터였던 엘파르도, 카사데캄포와 옛 왕궁 자리에 들어선 레티로 등이 그 예이다. 마드리드 역시 현대 도시들이 겪는 공통된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특히 공해와 교통문제는 심각하고 시민들의 안전은 그 옛날 야경꾼 시절만도 못하다. 그러나 마드리드는 주민들에게 독특한 스타일을 제공하는 매력과 특성 그리고 생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모든 지역이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고자 노력하는 현대 스페인의 중요한 한 단면이다.
■주민
마드리드로의 인구유입은 무엇보다도 공업지대의 성장에 기인하는데 이는 스페인의 현대 인구구성의 전형을 창출했다. 마드리드인들의 전통적인 별명은 가토스(고양이들)이다. 이 말은 원래 중세때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잘 기어오르던 군대를 가리켜 지어졌으나 지금은 지역주민의 생활태도, 즉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절하다. 물론 이러한 생활태도는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도, 특히 뜨거운 여름에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마드리드의 사람들은 늦게 식사하고 당연히 극장도 늦게 상영을 시작한다.
지금은 물론 현대 경영방식의 도입과 외국자본의 유입과 함께 기나긴 한낮의 휴식을 없애는 이른바 영국식 주일 제도를 도입하는 추세이다. 도시는 또한 풍부한 문화행사와 오락을 제공한다. 마드리드는 세계적인 도시는 아니지만 교양있는 시민들이 많고 젊은이들도 최신 유행음악에 친숙하다. 경제 노동력의 원천인 외국인 취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사교모임의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외국인은 대체로 많지 않으며 뚜렷한 인종집단도 없다. 1970년대 초반이후 경제적 곤경과 정치적 갈등을 피하고자 북아메리카로 이주하던 라틴아메리카인의 역사적 이동이 변화되면서 스페인으로 이주해오는 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드리드는 그곳의 주민과 도시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붙드는 나름대로의 모습과 특징이 있는 도시이다. '마드리드에서 천국까지 그리고 천국에서도 작은 창을 통해 마드리드를 본다'라고 하는 지역의 속담에서도 나타나듯이 주민들은 이 도시에 산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
■ 공업·상업·금융
관광사업과 국가적인 교통중심지라는 점은 물론 행정·금융·보험의 중심지로서 수도 마드리드는 번영을 누려왔다. 전후 즉 스페인 내란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키기 시작한 1939년 이후 자동차, 항공기, 전기전자제품, 광학, 플라스틱과 고무 및 각종 소비재 등의 제조업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바르셀로나와 함께 스페인의 출판업도 석권하고 있다.
■ 교통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는 도로와 철도망의 중심지이며 지하철망인 메트로의 수많은 노선을 통해 도시 각 지역이 연결되어 있다. 바라하스 국제공항이 시에서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으며 5각형 형태의 고속도로망이 남쪽의 한 지점을 중심으로 도시를 순환하고 있다. 또한 이 순환간선도로로 연결되는 많은 도로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시가 직접 운영하거나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노선망이 수없이 발달되어 있고, 미니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자가운전자들의 편의를 우선으로 추진되었던 1960년대 도로건설계획들이 문제점이 있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기존에 건설된 고가도로들을 철거하기도 했다.
■정치·사회
1970년대 후반에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지방자치제가 발달함에 따라 지방협의회와 환경의 미래와 같은 이슈에 보다 많은 관심이 주어졌다. 1982년 시행정부는 사람들이 자신의 근린지역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결과를 수렴하여 만든 일반조례안(Plan General de Ordenación)은 생활하부시설의 근대화와 도시내 삶의 질적인 개선을 위한 장기적이고도 광범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지방자치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는 계속적으로 스페인 행정의 중심지이다. 대법원과 정부의 각 부처들이 이 도시에 있으며, 스페인 의회인 코르테스도 이 도시의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안에 들어 있다. 의회건물은 유럽에서 가장 작은 편에 속하는데 무어인의 대포를 녹여 만든 동사자상으로 유명하다. 지방행정부는 시장과 시 의회의 통제하에 있다.
■문화생활
오늘날 현대적인 생활방식이 확산되면서 마드리드의 유명한 노상생활이 퇴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민들은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특히 뜨거운 여름에는 카페의 테라스가 붐비고 사람들이 저녁무렵 거리를 배회한다. 주요대학교들과 연구기관들을 소재한 도시답게 영화·연극·음악회 등의 현대적인 문화행사도 폭넓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 유명했던 비공식적인 대화모임이나 비공식적인 사교집단인 테르툴리아스는 그것이 열렸던 고상한 카페와 함께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로페 데 베가, 칼데론, 세르반테스, 케베도, 페레스 갈도스, 라라, 바로하, 아소린 등 문인들과의 인연 속에서 이루어진 이 시의 문학적 전통은 다양한 문화생활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마드리드가 스페인어권 출판 중심지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서도 엿보인다.
현대 마드리드는 모든 면에서 매력을 지니고 있다. 2만 3,000석의 라스벤타스 투우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큰 곳으로 신참 투우사가 명실상부한 투우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주역 투우사(마타도르)가 되어 황소를 처음으로 죽이는 알테르나티바를 펼쳐 보여야 한다. 경기 시즌은 3~10월이다. 마드리드에는 주요축구 팀이 2개 있어 매년 바르셀로나 팀과 경기를 갖는데 이는 한 해의 주요행사로 꼽힌다. 중요한 축구 경기는 12만 5,000석 규모의 산티아고베르나베우와 7만 석 규모의 비센테칼데론 등 2대 경기장에서 열린다. 수호성인을 기려 매년 4차례 개최되는 성인의 축일 베르베나스는 5월 중순의 산이시드로와 함께 중요한 종교 행사로 꼽힌다. 시사적인 문제를 온건하게 풍자하는 마드리드 전통 경가극인 사르수엘라도 5월 중순경 노천에서 공연된다. 현재 40개 이상의 공원과 공공정원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레티로·캄포델모로·카사데캄포·오에스테 공원 및 아스완하이 댐 공사 당시 스페인이 차지한 고대 이집트 사원인 데보드 사원 등이 유명하다.
박물관도 많은데 그중 특이한 것들은 연극·철도·투우 등에 관한 박물관들이다. 이 시에는 훌륭한 예술품도 매우 많다. 시장의 사택인 카사데시스네로스와 팔라초레알이라고 하는 왕궁에 있는 태피스트리들, 데스칼사스레알레스 수녀원에 있는 부루에헬과 티치아노의 그림들, 알바 공작가문의 저택인 팔라초데리리아에 소장된 스페인 및 외국의 대작들 등이 그 예이다. 가장 유명한 수집품은 프라도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스페인 왕조가 수집한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고, 아울러 스페인의 대외협력관계의 역사도 함께 보여준다. 카를로스 5세와 펠리페 2세는 베네치아풍의 예술을 후원했고 펠리페 4세는 17세기의 위대한 수집가였다. 또 부르봉 왕가의 왕위승계로 프랑스 작품들도 들어오게 되었으며 네덜란드를 통치하면서 플랑드르 양식 작품도 갖게 되었다. 시 근처의 엘카손델부엔레티로에는 19~20세기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이다. 이 그림은 민주주의가 회복된 스페인에 옮겨달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에 비로소 뉴욕에서 스페인으로 옮겨졌다(→ 부엔레티로 궁전).
도서관이 많은데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국립도서관(비블리오테카나시오날)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왕궁도서관이 있다. 마드리드는 중고서점들과 봄에 개최되는 도서박람회인 페리아델리브로로도 유명하다.
스페인 고등교육의 최고 중심지인 마드리드에는 대학촌 내에 있는 개방대학, 마드리드콤플루텐세대학교, 종합기술대학교와 북부의 마드리드자치대학교 등 많은 우수한 대학들을 소재한다.
■ 역사
■ 초기
만사나레스 강을 굽어보는 언덕의 알카사르(성) 주위에 아랍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마헤리트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것은 그리스도교도 왕인 레온의 라미로 2세가 그 도시의 성벽을 허물었던 932년이지만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카스티야와 레온의 그리스도교도 왕인 알폰소 6세는 1083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이 시를 탈환했고 그후 많은 카스티야 왕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1466년 지진으로 알카사르가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후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그 자리에 중세풍의 왕궁을 세우고 계속 확장시켰다. 이 시기에 도시는 동쪽으로 지금의 마요르 가와 세고비아 가까지 성장했고, 그에 따라 1492년 스페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재탈환이 종결된 후 동쪽에 살고 있던 무어인들은 남서부로 밀려났는데 이곳은 지금도 모레리아라고 불린다. 당시 도시의 전체 면적은 약 0.36㎢에 불과했다. 현재는 16세기 이전의 도시도로망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 당시의 건물 중에는 보전된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가 감금되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카사데로스루하네스가 상당한 복원 작업을 거쳐 남아 있다. 1598년에 마드리드의 인구는 6만 명에 이르렀고 1656년에는 10만의 인구와 1만 1,000채의 건물이 있는 당당한 도시로 성장했다.
합스부르크 왕조하에서 마드리드는 보다 빨리 성장했다. 외무부 청사(1634), 시스네로스 궁정, 세고비아 다리, 산이시드로엘레알 교회 등이 이때 건설되었다. 후안 데 에레라와 프란시스코 데 모라와 같은 건축가들은 이 시기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었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설계하여 1617~19년에 걸쳐 건설된 마요르 광장이다. 1790년 대화재 이후 개축된 이 광장 주변에는 우아한 발코니와 첨탑이 있는 집들이 있으며 9개의 아치 길이 주위 도로에서 광장을 향해 사각(斜角)으로 나 있고 그 길들을 따라 가게와 음식점들이 들어선 아케이드가 있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했던 투우, 불꽃놀이, 연극 등 모든 행사와 종교재판과 같은 엄숙한 의식이 이 광장에서 행해졌다. 1765년까지는 공개처형도 이루어졌으며 이 광장에서 벌어진 마지막 투우는 1846년 이사벨 2세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 부르봉 왕조의 집권기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 당시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여 마드리드가 편들었던 부르봉 왕가의 집권하에서 마드리드는 다시 성장의 시기를 맞게 되었고, 과거에 못지않는 인상적인 건물이 이때 많이 건축되었다.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일어난 대화재로 알카사르가 파괴된 자리에 펠리페 5세가 왕궁을 세우기 시작했다. 23개의 내부 궁정을 지닌 왕궁을 지으려고 했던 그의 원대한 계획은 전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500개의 방이 있는 왕궁이 건설되었다. 이와 함께 그가 후원하여 이룬 업적으로는 왕립 스페인 아카데미, 국립도서관, 왕립역사 아카데미 등의 설립을 꼽을 수 있다. 우아한 석회암과 화강암의 벽을 가진 왕궁에는 티에폴로가 장식한 천장을 지닌 왕실과 멕시코·페루의 정복자들인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검을 비롯한 무기들을 전시한 세계적인 수준의 무기 전시실인 아르메리가 있다. 이곳에 실제로 살았던 마지막 스페인 왕은 알폰소 13세인데 그의 거처는 그가 1931년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와 똑같이 보존되어 왔다. 현재 왕족은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토지에 세워진 검소하고 조용한 라사르수엘라 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부르봉의 왕들이 좋아했던 다른 궁전은 부엔레티로 궁전으로 프랑스풍의 스타일로 유명한 이곳 정원을 지금도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부르봉 시대에 가장 위대한 건축사업을 펼쳤던 왕은 카를로스 3세(1759~88)로 도시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관심과 시가지 형성에 대한 공헌으로 그는 시장(市長)같은 역할을 한 왕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계몽주의시대였으며 카를로스 왕은 레저와 과학, 문화와 산업 간의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그의 건축 취향은 당시 유럽의 조류를 반영한 세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도시의 외양, 성문, 도로와 가로수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근대 도시로의 설계를 기대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 3명의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사바티니, 벤투라 로드리게스,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크게 의존했다. 이 시기 동안 도시는 동쪽으로 지금의 플라시데라인데펜덴시아(독립기념 광장)까지 성장했는데 1778년 이 광장에 건설된 푸에르타데알카라는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꼽힌다. 다른 유명한 건물로는 푸에르타델솔에 있는 중앙우체국이 있는데 스페인 전역의 거리가 이 건물벽 밑에 있는 표준지점을 기준으로 측정된다. 시민들의 사랑을 무척 많이 받는 이 광장은 특히 한해 마지막 밤 사람들이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를 듣고 새해에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12개의 포도알을 먹기 위해 모이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 광장은 초기에는 전국으로 떠나는 역마차들의 역으로서 중요했다.
도시가 가지는 매력으로 인해 마드리드는 1830년 최초의 가로등에서부터 최초의 노새궤도차, 공중변소, 최초의 전기가로등, 전차에 이르기까지 도시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수많은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고, 카를로스 3세는 물론 이 모든 혁신적인 시도들을 승인했다. 그는 통치시절 중에 식물원을 설립했는데 이곳은 누구나 약초를 얻을 수 있는 정원도 있었던 곳으로 지금까지 존재한다. 그는 식물원 곁에 자연사박물관 및 과학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마련했지만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마드리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으며, 나폴레옹의 동생 조제프를 왕으로 모셔야만 했다. 1808년 5월 2일에 조제프에 대항하는 시민저항이 일어나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1814년 나폴레옹의 구금에서 풀려나 돌아온 페르난도 7세는 '영웅적'이란 칭호를 마드리드에 수여했다. 카를로스 3세가 계획한 자연사 및 과학박물관을 수용할 건물이 1819년에 완성되었고 페르난도 왕은 그 당시 여러 왕궁에 흩어져 있던 왕족들의 소장품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주요한 예술박물관 중 하나인 프라도의 시작이다. 1830년 레온 힐 팔라시오스가 만든 뛰어난 도시 모형을 통해 그 당시 마드리드를 아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귀족 출신 시장이었던 호아킨 비스카이노의 지도 아래, 도시가 북쪽으로 확대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또한 건물에 대한 가로번호, 가로등, 도시쓰레기집하장 등과 같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파세오델프라도는 새로운 가로에 의해 확대되어 파세오데로스레콜레토스로 불리게 되었다. 큰 정원을 지닌 주택들로 둘러싸여 있던 이 지역은 수년 동안 전원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고층의 사무실 건물, 아파트, 호화 호텔, 대사관 등과 함께 국립도서관, 국립고고학박물관, 스페인 현대미술관 등이 입지해 있는 곳으로 변화했다. 지금은 은행으로 변한 이곳의 대저택 중 하나는 마르케스 데 살라망카의 소유였으며, 그는 알카라 거리에서 파세오까지 28개의 도로를 1872년에 격자 모양으로 건설함으로써 북쪽으로의 도시성장에 공헌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지닌 이 지역은 마드리드에서 가장 격조 높은 구역으로 남아 있다.
1860년에는 '확대'라고도 불리는 카스트로 계획에 따라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당시의 경제적·상업적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도시를 더욱 확장, 근대화시켰다. 이것은 마드리드 최초의 종합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현대적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인구성장, 토지투기 및 계획지구 외부로 뻗어나간 빈곤지역 등에 의해 좌절을 겪게 된다.
■ 현대 마드리드
카스트로 계획의 뒤를 이어 많은 계획이 있었다. 1892년에 완성된 아투로 소리아의 계획은 50km의 계획 가로축과 교외 철도망을 지닌 선형도시를 계획했던 것이고 1910년 누녜스 그라네스는 위성도시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후 주요한 도시건축물들이 나타났다. 알카라 거리에서 언덕 아래로 고층 상업건물이 최초로 세워졌던 에스파냐 광장까지 뻗은 넓은 길은 산베르나르도 구역을 양분했는데 이 거리는 그란비아라고 불렸으며 도시의 주요도로로 설계되었고, 극장·커피하우스·상점·은행 등으로 활기찬 곳이다.
내전 후 이 거리는 스페인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정당의 설립자를 따라 아베니다호세안토니오로 개명되었다. 그밖에 많은 도로와 광장이 이 당시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프랑코 사후에 모두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1931년 공화정의 실현과 함께 방사상형과 환상형의 도로체계가 이룩되었으며 카스테야나 가는 더욱 확장되었다. 마드리드는 내전기간 동안 크게 파괴당했는데 특히 폭격과 포격을 당하고 전선이 대학촌 가까이 형성되었던 2년 동안 큰 고충을 겪었다(→ 스페인 내란). 전쟁으로 파괴당한 공공건물들이 복구되었고 야심찬 재건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교외지역을 도시권으로 흡수하면서 마드리드는 확장되었다. 1948~51년에 마드리드는 대략 10배로 성장하여 531㎢의 면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토지투기, 무분별한 도시확대, 공업화 등으로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나타났던 변화를 겪었으며 종종 도시의 문화적 유산들이 치명적으로 손상되기도 했다. 현재는 도시의 소중한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법들이 제정되고 있으며, 오래된 건물의 보존에 대한 가치가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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