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성지순례/2010성지순례

2010 성지순례 11

월요일은자유인 2010. 1. 7. 05:15

4

20

(화

일)

파티마

 

 

 

 

산티아고 데

콤포스델라

      

전용버스

전일

조식 후 전일 성모 발현지

파티마 성지 순례

십자가의 길,

세 어린이 생가 순례후

 

중세 3대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델라로

이동 후 휴식

 

1. Condeixa-a- velha(63km) - Porto(182km) - Valence(286:국경) - Puente de Rande(321:다리) - Pontevedra(340) -

Santiago de compostela(396km)

 

파티마에서 일정을 마감하고, 산티아고로 향한다.

이날 여정도 400km이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간다고 보면된다.

 

 

■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스페인어: Santiago de Compostela)는 갈리시아 자치 지방의 중심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스페인 북서부의 라코루냐 주에 있으며, 2000년도의 유럽 문화도시로 선정되었다. 이곳 도시의 대성당은 역사를 통틀어 9세기부터 지금까지 성 야고보의 길로 불리는 유명한 순례의 목적지이다.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한명인 성 야고보(산티아고)는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한 뒤 팔레스타인에서 순교하였고, 그 시신은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고 이야기되 왔다. 그의 묘가 9세기 초에 발견되고, 그곳에 카테드랄리 건축된 이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로마와 나란히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서 많은 순례자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지에 어울리는 장엄한 분위기의 카테드랄을 비롯해 교회나 수도원이 많다.

 

    역에서 북쪽으로 약 10분 걸어가면 관광 안내소가 있는 갈리시아 광장에 도착. 이곳에서 카테드랄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까지는 5분 정도, 오브라도이로 광장에는 카테드랄 뿐만 아니라, 원래는 락소이 궁전이었던 시청사, 현재는 파라도르가된 옛 왕립 병원, 산헤로니모 신학교등이 서 있다.

 

 

■산티아고(성 야고보)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사도 성야고보의 묘가 있는 산티아고(성 야고보)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한 순례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피레네 산맥 근처의 두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웃 나라에서 피레네 산맥으로 오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서면 하나로 모이는 이 순례길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며,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지금도 해마다 수만 명의 순례자가 다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8세기 동안 전세계 그리스도교도가 싸우지 않고 서로 깊이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지대한 구실을 했으며, 중세에는 에스파냐 북서부에 번영과 부를 안겨 주었다.

 

■중세의 순례길 - 지나는 길은 다르더라도 순례자들은 푸엔테라레이나(론세스바예스와 솜포르트 고개에서 시작되는 순례길 2곳이 만나는 지점)에서 로그로뇨, 산토도밍고 데 라카르사다, 부르고스, 카리온 데 로스콘데스, 레온, 아스토르가, 폰페라다로 통하는 코스를 좋아했다. 군주들은 이 길 연변에 순례자를 위한 무료 병원이나 숙박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중세 무렵에는 순례자가 순례길에 오를 경우, 출발하기 전에 고향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순례자의 소지품을 주었다.

    순례자는 거친 모직물을 몸에 두르고 짧은 망토, 넓은 차양 모자, 표주박, 식량 주머니, 거기에 순례자의 신분 표시라고 할 수 있는 가리비 껍데기를 몸에 달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인 성야고보(에스파냐명 산티아고)의 무덤을 찾아서 길고 험한 순례길에 올랐다. 순례자의 한결같은 소망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었다. 순례자 가운데에는 국왕과 대주교도 있었다. 순례 여행을 완수하고 속죄를 하고 일련의 경건한 계율을 지키면, 순례를 수행한 증거로 ‘콤포스텔라’라는 증서를 받는다.

 

■문화가 교류되는 길- 1150년 무렵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위한 최초의 안내서가 만들어졌다. [교황 칼릭스투스 2세의 고문서] 제5집에 들어 있는 ‘성야고보의 글’이 그것으로, 프랑스인 수도사 에메릭 비코가 집필했다. 이 안내서를 쓴 목적은 순례자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지켜야 할 성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베리아 반도와 다른 유럽 여러 나라를 이어 주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8세기 동안 이 길은 문화, 종교 정보를 교환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 밖에 있는 기술자나 상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순례길에 있는 여러 도시에 인정된 특권은 커다란 매력이었다. 그 결과 외부에서 온 그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중산층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순례길이 한창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16세기 이후에 이 순례길은 급속히 쇠퇴했다.

 

■로마네스크 예술과 순례길- 순례길은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클뤼니 수도회를 비롯한 많은 수도회 또한 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모든 수도원에 도입함으로써 로마네스크 양식을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으로는 하카의 산페드로 대성당, 프로미스타의 산마르틴 대성당, 레온의 산이시도로 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있다. 하카에 있는 산페드로 대성당은 순례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로마네스크 건축으로서 11세기 중엽에 짓기 시작했다. 삼랑식이며 신랑의 지주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고, 화려하게 꾸민 아름다운 기둥머리가 달린 둥근 기둥이 지주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익랑 윗부분에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그마한 팔각형 궁륭이 보인다.

 

■순례자가 나른 석재- 산티아고 순례길이 문화 차이를 넘어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연대 의식을 높이는데 얼마나 공헌을 하였는지는 순례길에 있는 산마르틴 성당 건설과 관련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성당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나바라 왕국의 왕 산초 엘 마요르의 왕비였다. 왕비의 기도가 순례자들한테 닿았던지, 유럽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날라온 석재로 이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산마르틴 성당은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1066년에 지었다. 이 성당은 십자 모양의 기둥으로 칸을 나눈 삼랑식으로, 익랑과 슈베(교회의 한쪽 귀퉁이에 나와 있는방)에 반원형 후진이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 대들보 사이에 있는 둥근 천장을 떠받치는 북통처럼 생긴 곳에는 창이 나 있다. 기둥머리에는 기하학적 소재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나 성서 장면을 나타내는 인물상을 새겼다.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옛 왕국의 도읍지였던 레온에 있는 산이시도로 성당은 페르난도 1세 시대의 건물을 기초로 지었다. 오래된 건물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왕실 묘지가 된 현관랑뿐이다. 이 현관랑은 12세기 후반의 로마네스크 양식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는데, ‘로마네스크 그림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문과 기둥머리에 있는 조각, 부속 시설에 보관된 금은세공, 알안다루스(안달루시아) 시기의 직물, 세밀화가 그려진 고문서 등이 있는 이 성당 전체가 귀중한 문화재이다. 또한 고딕 양식의 산타마리아 데 레글라 대성당은 ‘기품 있는 암사자’라고도 부르며,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빛의 굴절을 이용해 독특한 금빛을 내며 시시각각 변하는 매혹적인 빛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중하는 성야고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예술의 최고 경지에 이른 건물이다. 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디에고 파라에스가 주교로 있던 1078년이었지만,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척된 것은 1100년 무렵부터였다. 순례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지나 ‘영광의 문’이라고 부르는 대성당 현관에 가까스로 다다른다. 장인 마테오가 만든 이 문은 유럽 로마네스크 조각의 걸작이자, 초기 고딕 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의 특징도 보여 준다. 순례자는 윗부분이 반원형 아치로 된 현관의 중앙 기둥에서, 순례 지팡이를 들고 상냥한 표정으로 순례자를 맞이하는 성야고보를 만날 수 있다.

 

■순례의 어제와 오늘- 중세의 순례자는 인생 최대의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우선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어 가족과 친구들한테 이별을 알렸다. 날이 밝으면, ‘그리스도교 세계의 빛’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사도 성야고보의 무덤을 향해 길고 위험한 순례 여행길에 올랐다. ‘하코비토스’라고 부르는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출발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은 문서에는 ‘프로 레메디오 아니마에 마에(내 영혼의 구제를 위해)’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그가 과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는 신의 뜻에 달려 있었다. 10세기 무렵에는 갈리시아 지방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노린 약탈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 여행했다. 오랫동안 고달픈 여행을 한 뒤 속죄를 하고 일련의 계율을 지키면,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서인 ‘콤포스텔라’를 받았다. 순례 여행이 절정에 이르렀던 11세기에 성당 기사단이나 예루살렘의 성요한 기사단, 또는 성야고보 기사단 등이 순례길을 따라 차츰 시설을 정비했고,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돌봐 주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뒤에는 순례 여행에 대한 열기가 식어, 18세기에는 순례 행렬이 가장 적었다. 가까스로 상황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부터였다. 프랑스의 에코르드샤르트르란 단체의 지식인들이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성야고보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답사하려고 계획했고, 조르주 브로딜이 자전소설 [인간은 모두 순례자]를 출판했다. 이리하여 산티아고 순례가 재발견되었다. 근래에는 순례의 목적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성야고보를 모시는 대성당에 있는 사도의 묘지가 목적이 아니라 그 곳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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