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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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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버스 |
전일 |
조식후 스페인 국토회복 운동의 중심지 부르고스 성지순례 부르고스 대성당, 구시가지광장등 순례후
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고향 로욜라로 이동 후 로욜라 대성당, 이냐시오 성인 생가 순례 로욜라의 피정의 집에서 휴식 |
■부르고스(Burgos)
아를란손 강이 내려다보이고 꼭대기에 성이 있는 언덕의 아래쪽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 약 800m 지점이다. 884년 카스티야의 백작 디에고 르드리게스 포르셀로스가 오스트리아 왕국의 동쪽 전초기지로 세운 이 시는 백작령의 중심지가 되었고 나중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494년 부르고스 길드는 우수한 양모를 비롯한 카스티야의 모든 해외 교역품을 관할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길드의 선박수송 부서는 세비야의 유명한 카사데콘트라타시온('교역소')의 모델이 되었다. 부르고스는 수도로서의 특권을 누리다가 그후 펠리페 2세의 재위기간(1556~98)중 1566년에 마드리드(214㎞ 남쪽)가 우니카코르테('유일한 왕실')로 선포된 1560년 이후 정치적인 중요성을 잃어갔다. 카스티야의 교역이 쇠퇴해짐에 따라 이 도시 또한 쇠퇴해가다가 카를 3세가 통치한 18세기에 활력을 되찾았다. 반도전쟁중 1808년에 프랑스 군이 이곳에서 스페인군을 무찔렀다. 그후 1812년 프랑스가 차지한 이 도시는 영국군들에게 포위되었으며 1813년 결국 영국에게 점령당했다. 1936년 7월 보수적인 부르고스는 스페인 내란중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민족주의 정부의 공식적인 소재지가 되었으며 마드리드와 바스크 지방을 상대로 한 작전기지가 되었다.
이 도시는 레온·산토도밍고·산탄데르 주교구로 이루어진 대주교구의 중심지이다. 1221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와 부르고스의 영국인 주교 모리스가 세운 부르고스 대성당은 화려한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1567 완공)이며 예배당이 15개 딸려 있다. 엘 시드라고 알려진 11세기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비바르델시드 근처에서 1043년경에 태어남)와 그의 부인 히메나의 유해가 1919년 이곳에 안치되었으며, 수많은 엘 시드의 유물과 기타 여러 보물들이 있다. 산타아게다 또는 산타가데아라고 하는 통로 없는 고딕 양식의 교회에서 엘 시드는 1072년 레온의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자신은 이전에 왕위에 있던 자신의 형 산초의 살해 사건과 관계가 없었음을 맹세하도록 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다른 역사적인 유적으로는 고딕 양식의 산니콜라스 교회(1505), 산에스테반 교회(1280~1350)와 원래 카스티야 왕실의 여름철 궁전이었다가 1187년 알폰소 8세가 시토 수도회의 수녀원으로 개조했던 산타마리아라레알데라스우엘가스 수도원 및 도시 주위에 있는 수많은 수녀원과 수도원들이 있다. 부르고스는 농업 중심지이며·술·밀가루·양모가죽제품·화학비료·초콜릿·종이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스페인 최초의 공공야영장과 넓은 스포츠 센터가 있으며 관광산업이 활발하다. 인구 163,507(1990).
▶부르고스 대성당
“다 보려면 2년도 더 걸린다.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고, 여성의 몸을 꾸미는 보석처럼 섬세하다. 정교한 세공품이라고나 할 이러한 건물이 몇 세기 동안이나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왔다니 정말로 야릇한 기분이 든다.” 19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인 테오필 고체가 쓴 에스파냐 기행문의 한 구절로, 그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건설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은 모리스 주교였다. 당시 유럽에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주류를 이루었고, 프랑스에서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곳곳에서 짓고 있었다. 모리스 주교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부르고스라는 도시와 그 곳에 있는 주교좌의 권위에 걸맞는 거대한 규모의 고딕 양식 대성당을 짓기로 생각했다. 1221년 7월 20일에 성왕(聖王) 페르난도 3세가 기공식을 거행했다. 이후 건설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238년에는 새로 지은 성당 사제관에 모리스 주교를 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무렵에 이미 슈베(교회의 한쪽 귀퉁이에 나와 있는 방)가 익랑까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14세기에는 건물의 기본적인 부분이 완성되었다. 시몬 데 콜로니아가 만든 것 가운데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원수(元帥)의 예배실’이다. 그 입구에 설치된 난간은 그 자체가 걸작으로, 크리스토발 안디노의 공방에서 제작했다.
고딕 후기의 대표적인 플랑부아양 양식 가운데서도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원수의 예배실’만큼 뛰어난 것은 없다. 예배실 내부는 팔각형인데, 별 모양의 궁륭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천장은 맨 끝부분이 8개인 커다란 별 모양이며, 맨 꼭대기에는 각양각색의 화려한 플랑드르 제(製)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이 천장은 후대의 에스파냐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예배실 벽에는 고딕 양식의 높은 창이 위아래 2줄로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난간, 비틀린 기둥, 아치 모양으로 멋을 냈다. ‘원수의 예배실’ 조각들을 제작하는데 관여한 사람은 조각가 힐 데 실로에이다.
가운데 있는 제단 장식벽은 펠리페 비가르니, 디에고 데 실로에, 레온 피카르도의 합작으로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성안나와 성페드로(베드로)를 소재로 한 제단 장식벽은 힐 데 실로에와 디에고 데 실로에가 만든 것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예배실 가운데 ‘처녀 잉태의 예배실’ 또는 ‘성안나의 예배실’이라 불리는 예배실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것은 1477년에 후안 데 콜로니아 부자가 만들기 시작했다. 이 예배실 안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모 마리아의 혈통을 주제로 한 제단 장식벽으로, 힐 데 실로에와 디에고 데 라 쿨스가 만들었다.
또한 루이스 데 팔레데스가 만든 고딕 양식의 격자도 지나칠 수 없다. 성모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를 찾아간 이야기에서 ‘방문’이란 이름이 붙은 예배실은 후안 데 콜로니아가 만든 것이다.
이 예배실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고딕 양식의 조각으로 꾸민 무덤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손꼽히는 것은 설화석고(雪花石膏)로 조각한, 반듯이 누운 아론소 데 카르타헤나 주교상이다. 카르타헤나 주교는 이 ‘방문의 예배실’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이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힐 데 실로에라고 한다. 신랑에 있는 기도석은 펠리페 비가르니와 안드레스 데 나헤라의 공동 작품으로 호사스러우면서도 장엄하다. 윗단 59석, 아랫단 44석을 모두 호두나무로 만들었으며, 치밀한 조각이 가득 새겨져 있다. 조각의 주제는 성서나 성인전, 또는 일상 생활에서 골라낸 것들이다. 기도석 칸막이 격자는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만들었으며, 에스파냐 동부 아라곤 지방 출신인 바우티스타 세르마의 작품이다. 중앙에 있는 제단 장식벽 역시 르네상스 양식으로 로드리고 야와 마르틴 야 형제가 만든 것이다. 제단 장식벽을 꾸민 조각 가운데 성모 승천과 성모 대관을 다룬 것이 특히 뛰어난데 제작자는 후안 데 안치에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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