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부다페스트

유럽자유여행21 부다페스트05

월요일은자유인 2011. 9. 2. 09:24

   세체니 란치 히드에서 부다 쪽을 쳐다 보면 성채의 언덕이란 뜻의 거대한 바르헤지가 보인다. 강변 위에 깎아지른 절벽위에 들어선 화려한 궁전의 자태는 이 언덕이 실제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일으킨다.  

   란치 히드 건너에는 아담 클라크 광장이 있는데 그 왼편에 바르 헤지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있다. 생긴 건 사실 절벽의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모양이다. 헝가리인들은 이를 부라바리 시클로(Budvari siklo)'라고 하는데 이는 부다성 케이블카 정도의 뜻이다.

  이케이블카는 다뉴브강변에서 부다성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다. 깎아지른 산을 오르내려서 그런지 케이블카는 계단형으로 되어 있고, 각각 세 개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 의자가 놓여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다 보면 다뉴브 강변의 절경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러다 산 주억에 보행자용 다리 밑을 지나간다.

  이 케이블카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시절인 1870년에 완공되었는데 본래 부다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오리지널 케이블카는 독일군의 공습으로 망가졌고, 사회주의 시대에도 그냥 내버려져 있다가, 사회주의 말기인 1986년에 그나마 현 상태로 복원된 것이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서 다리 끝에 이곳이 위치한다.

 터널이 보이고 왼쪽으로 가면 시클로라는 등산열차를 타고 부다 왕궁으로 올라간다.

 걸어서 올라가는 코스도 있다.

 

 왕궁인데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왕궁입구까지 올라가는 시클로이다.

 중간 다리를 통해서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승차권

 왕복승차권이다.

 

 시클로에서 본 세체니 다리이다.

 

 

 

 시클로에서본 이슈트반 대성당의 모습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왕궁입구이다.

  제일 먼저 다뉴브를 향해 날아오를 듯 날개를 활짝펴고 왕의 칼을 바레 든 투롤 상이 보인다. 그곳부터가 왕궁이다. 다뉴브강 쪽 왕궁 안뜰로 가면 먼저 말을 탄 청동상이 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보호자였던 사보이 가문의 유진왕자로, 그는 본래 파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루이 14세를 섬기는 대신 오스만 투르크와싸움을 벌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 황제를 주군으로 섬겼다.1697년 그가 이끈 연합군이 오스만투르크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던 젠타 전투 승전기념비로 1900년에 세워졌다. 유진 왕자의 쌍둥이 동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주지인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신궁 앞에도 있다.

 

 왕궁의 북쪽 끝은 아름다운 모양의 철책이 둘러쳐져 있으며, 입구 부근의 철책위에는 툴루라는 기이한 새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 아르파드를 낳았다고 하는 전설의 새이다. 최초로 성이 지어진 것은 13세기 중반이다. 몽골군의 습격 이후 벨러 4세는 부더의 언덕에 요새를 건설하고 파괴된 에스테르곰에서 부더로 궁정을 옮겼다. 동시에 비셰그라드에도 요새를 짓고 왕비와 가족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후 14세기의 카로이 1세 시대에 비셰그라드가 왕궁이 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더로 왕궁을 옮겨왔다.15세기, 중세 헝가리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마차시 1세 시대에 성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으나, 16세기에 투르크군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17세기 이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재건되었다가 화재오전쟁 등 거듭되는 참화에 시달려야 했다. 왕궁이 현재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자태르 드러낸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이다. 파란만장한 왕궁의 역사는 그대로 헝가리의 역사를 대변한다. 북쪽의 벽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박힌 탄환흔적이 무수히 많다.

 

 마침 영접행사가 있다.

 의장대들이 사열해서 준비중이고,

 아프리카 국가원수인지 사열받으러 들어가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부다왕궁정원에서는 무슨 축제가 있는지

 전통체험장과 먹거리 장터가 벌어져 있다.

 

 행사를 마치고 귀대하는 의장대이다.

 의장대 치고 군인들이 왜소하다.

 

 공사현장

 공사 인부들이 한결같이 웃통을 벗고 일을 하고 있다.

 

 이정표

 마차시성당

 어부의 요새 표지판을 따라 간다.

 아니 마치시 성당의 첨탑을 보고 가면 된다.

 

 왕궁을 나와 부다성 케이블카로 돌아와 그 반대편에 고즈넉한 3,4층 건물들 아래에는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돌아간 듯하다. 이곳을 지나면 거대한 성당의 첨탑이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마티아스(St.Matthias)성당이다.주 출입구 앞에는 본래 중세 시장이 중심이었다는 삼위일체 광장이 있고, 삼위일체탑이 그곳에 서 있다. 이 탑은 본래 18세기 초부터 시 위원회가 1691년 헝가리를 엄습했던 흑사병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잉 흑사병을 끝내는 기도를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꼭대기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비둘기의 모습으로 온 성령이 흑사병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성당 구조에 있어서 북쪽에는 출입구가 없고, 남쪽에 보조 출입구가 있고, 서쪽이 주 출입구이다. 주 출입구와 제대와 마주 하고 있다. 마티아스 주 출입구 양편에는 천사 부조상이 있다.이 교회는 정면 입구의 오른쪽에 80m마차시답’, 왼쪽에 36m벨러 탑이 솟아 있어 일핏 보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이상한 건물로 비친다. 그러나 섬세한 조각이 된 고딕양식의 외관과 선명한 색상의 졸너이제 모자이크 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벨러 4세 시대에 지금의 기초가 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교회가 건설되었고, 14세기에 현재의 모습과 같은 고딕양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차시 왕의 시대를 맞아 80m의 고딕 탑이 세워지면서 마차시교회라 불리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투르크군의 침략으로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1세기 반 동안의 투르크 지배가 끝난 뒤인 18세기에는 바로크 양식의 그리스도교회로 회복되었다.1867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 성채는 네오-고딕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19세기 말 마티아스 성당 재건축을 담당했던 슐렉의 또 다른 걸작이다. 어부의 성채는 마티아스 성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건축물에 지나지 않지만 워낙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마티아스 성당보다 더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마차시 교회 동쪽, 도나우 강변에 지어진 백색요새1895~1902년 부다 성의 한쪽 벽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것으로 요새에 있는 7개의 하얀 탑은 파노이난 산맥에 정착했던 마자르계의 7부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은 중세 시대 이 지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냈던 어부 조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